
작품 소개만 보자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던 대학생이 군인에게 쫓기다 여자 기숙사에 숨어든 이야기 같다. 물론 이렇게만 전개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소개에서 눈에 거슬리는 점은 여주인공 이름과 '시대를 거스른'이라는 부분.
찜찜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온라인을 통해 '설강화'의 시놉시스 일부가 유출되면서 '설강화' 논란이 시작됐다. 시놉시스에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고 군부독재 및 안기부와 간첩을 미화하려는 듯한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었다. 왜곡이 우려되는 가장 큰 부분은 운동권 학생인 줄 알았던 메인 남자 주인공(정해인 분)이 알고보니 남파 간첩이었다는 설정이었던 것(민주화 운동 폄훼)과 서브 남자 주인공(장승조 분)이 '대쪽같은 인물'로 묘사되는 안기부 팀장(군부독재 및 안기부 미화)이며 또 다른 안기부 요원(정유진 분)은 거침없이 뛰어드는 열정을 가진 인물로 묘사(군부독재 및 안기부 미화)된 것이었다.
'설강화'의 문제를 짚기 전 '설강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87년이 어떤 시기였는지 알 필요가 있다. 1987년은 전국이 반독재, 민주화 목소리로 덮인 해였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로 국민을 공분케 했던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 치사 사건과 민주화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고(故) 이한열 열사로 시작돼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다. 6월 민주 항쟁으로 대한민국 헌법이 대통령 직선제로 바뀌었다.
![[TEN 이슈] '설강화' 말장난은 그만, 민주화 운동에 터치 NO](https://img.hankyung.com/photo/202104/BF.25915826.1.jpg)
다시 '설강화'로 돌아와서 우려가 되는 부분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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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에게 대쪽 같은, 넘치는 열정 같은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안기부 요원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군부 지시 아래 시민을 협박하고 고문했던 사람. 시민을 간첩으로 몰아 협박과 고문을 일삼았으니 그런 면에서 대쪽 같고 열정 넘치는 인물은 맞겠다. 아무리 창작의 자유가 있는 드라마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

이러한 움직임에 JTBC는 즉각 입장을 내놨다. 내용 일부까지 공개하면서 이해를 구한다고 했지만 입장문을 밝히면 밝힐수록 더더욱 제작되어선 안된다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구구절절 해명하면 '아 그렇구나'하며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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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주화 운동과 정치는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히려 이 시기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만들면서 정국만 강조하고 민주화 운동을 지운다는 것 자체가 민주화 운동의 폄훼다. 1987년은 6월 민주 항쟁을 통해 국민의 직접 선거가 처음 이뤄졌던 역사적인 날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양김(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분열로 군부 세력이었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긴 했지만, 이 흐름을 어떻게 블랙코미디로 표현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민주주의를 외친 정치인과 운동권을 간첩으로 조작했던 군부세력의 경쟁이 블랙코미디라는 말로 끝낼 수 있는 문제일까.
군부정권, 안기부 등 기득권 세력이 권력유지를 위해 북한 독재 정권과 야합해 음모를 벌인다는 설정도 위험하다. 군부정권과 안기부는 권력유지와 민주화를 막기 위해 민주주의 외친 시민을 간첩으로 몰아 고문하고 죽였다. 북한 간첩이라고 조작한 군부정권인데 '북한 독재 정권과 야합해 음모를 벌인다'는 가상이 아니라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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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 미화가 아니라 안기부에게 보통의 성품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미화라는 말이다. 군부독제의 그림자, 군부독재의 반려 외에 다른 수식어가 붙는다면 다 미화다. 이건 역사에도 남아 있는 진실이다. 해외 파트에 근무한 기부 블랙요원이라고 넘어가려 하지만, '수지킴 간첩 조작 사건'이 안기부 해외파트도 동조한 일임을 이미 많은 방송에서 보여줬다.
또 하나의 지적은 여주인공 지수가 연기할 캐릭터 이름이 은영초가 실제 운동권의 상징적 인물인 천영초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 천영초 선생님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이로 인해 안기부에 잡혀 고문까지 당했다. '설강화' 측은 "극 중 캐릭터의 이름 설정은 천영초 선생님과 무관하다. 하지만 선생님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나온 만큼 관련 여주인공 이름은 수정하겠다"고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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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이 아주 먼 과거인가. 우리 곁에 버젓이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와 증인이 있는데. 우리의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가 지나온 삶이고 민주화를 외친 분들의 피와 눈물로 살고 있는 평화의 시대다. 작가와 감독이 창작의 자유를 외치며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시청자가 옳다 그르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다 이러한 과거를 밟고 섰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이룬 민주주의는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시민의 손으로 얻은 결과다.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국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고 군부독재의 폭력과 폭정에 맞서 일궈낸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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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 이슈] '설강화' 말장난은 그만, 민주화 운동에 터치 NO](https://img.hankyung.com/photo/202104/BF.25915652.1.jpg)
지난달 조선 건국과 왕을 왜곡하고 비하하려 했던 SBS '조선구마사'가 2회 만에 방영 폐지됐다. 뿌리를 흔들고자 하는 음모엔 함께 분노하고 일어난다. 처음은 어려워도 두 번째는 쉽다.
대중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설강화'의 왜곡과 미화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제작진은 구구절절한 입장문 대신 대중이 지적한 부분은 완벽하게 고치고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할 때다.
우빈 기자 bin0604@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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