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성민과 의사 최인혁은 닮았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에서 언젠가 번듯하게 마련될 중증외상센터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MBC 의 최인혁처럼, 이성민도 서른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무릅쓰고 대학로에 입성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왔다. 지난 8일 SBS 에 출연한 이성민은 상경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 “배우로서 스스로에 대해 검증하고 싶었고 큰 무대에서 부딪히면서 내가 어느 정도인지 체크하고 싶었다”며 “딱 3년만 버텨보자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최인혁이 얼마나 처절하게 중증외상센터 설립을 원하는지 모두가 느낄 수 있었던 건 절박함이 무엇인지 아는 배우가 연기한 덕분이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좋은 선배이자 따뜻한 의사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최인혁은 세중병원 내 유일한 어른이었다. 어른스러운 연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하던 차에 MBC 와 을 만났다는 이성민은 어떤 마음으로 이재강과 최인혁을 연기했을까. 부터 부쩍 훈훈해진 외모와 온화한 미소로 꽃중년 대열에 합류한 이성민을 만났다.제작발표회에서 “첫 주연인데 드라마가 잘 안 되면 미안할 것 같다”고 했는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로 종영했다. 소감이 어떤가.
이성민: 다행이다. 1~2회 때 생각보다 시청률이 너무 안 나와서 힘들었다. 이게 내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조연으로 출연했을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가서 찍고 내 역할에만 충실했다. 에서도 메인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주연이라는 게 아무나 할 게 아닌 것 같다. 책임도 따르고 내가 잘못하면 전체가 흔들릴 수 있으니까 긴장도 유지해야 되고. 분량도 분량이지만 의학드라마라 후반에 수술 신, 처치 장면이 너무 많았다. 중반쯤에는 체력적인 한계가 왔다. 길거리에서 박원국 환자를 발견했을 땐 내가 막 현기증이 났다.
“ 현장은 지긋지긋하게 무서웠다” 권석장 감독과의 두 번째 호흡이다. 의 설준석 사장과 정반대 캐릭터인데 어떻게 캐스팅됐나.
이성민: 처음엔 좀 황당했다. 메인 캐릭터인데 나를 쓴 것도 그렇고, 자기 드라마에서 설 사장을 연기했던 사람을 데려다가 최인혁으로 쓰겠다는 것도 대단한 선택 아닌가. 분명 무난한 카드는 아니었다. 근데 나한테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하더라. 그리고 계속 멋있어야 된다고, 멋있을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게 가장 걱정되셨던 모양이다. 최인혁이 주류가 아니었으면 하는 게 연출의도였기 때문에 계속 주연을 맡아 온 배우가 그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좀 낮은 곳에 있는 배우가 맡는 게 최인혁이라는 캐릭터와도 어울린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소위 스타라고 불리는 잘생기고 멋있는 배우가 최인혁을 연기했다면 그렇지 않은 배우를 썼을 때보다 절박함이 덜하지 않을까 라는 계산도 있었던 것 같고. 신선한 연출 의도였고, 그래서 나를 택한 것 같다. 감독한테도, 나한테도 모험이고 도전이었다. 그동안 이런 역할 안 시켜줘서 못했다. (웃음)
이미 한 번 작업을 해 본 감독이라 커뮤니케이션이 수월했겠다.
이성민: 권석장 감독의 가장 큰 미덕은 현장에서 토론을 통해 신을 만들어간다는 점이다. 그걸 잘하는 배우가 이선균이고, 난 웬만하면 하자는 대로 하는 편이다. 그런데 현장은 지긋지긋하게 무서웠다.
어째서? (웃음)
이성민: 권석장 감독은 배우가 대사가 되든 안 되든 무조건 마스터를 찍는다. 27시간씩 수술 장면을 찍게 되면 다들 눈에 광기가 보인다. 뻘건 피를 보면 우리 배우들도 미치고, 감독님도 미친다. 아마 이상의 수술 장면은 나오지 않을 거다. 수술 장면의 새로운 기준을 마련했다. 권석장 감독이 최인혁이다. 내가 MBC의 최인혁이라고 했다. 마지막 회에서 민우(이선균), 재인(황정음)을 떠나보내는 최인혁의 뒷모습은 언뜻 보면 권석장 감독 같다. 은근히 자기 모습을 담아서 촬영한 게 아닌가. (웃음) 그리고 권석장 감독은 내 운명, 내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이다. 마지막에 끝나고 포옹하는데 울컥했다.
최인혁은 잘 꾸미지도 않고 비주류에 속하는 의사지만 딱 봤을 때 굉장히 멋있는 분위기가 묻어나온다.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나.
이성민: 멋있어 보이려고 한 건 절대 아니다. 중증외상센터 이국종 교수님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굉장히 마르셨더라. 그래, 저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의사는 살도 안 찌겠다 싶었다.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게 체중감량이었다. 원래 좋아하던 고기도 몇 달 전부터 끊고 채소만 먹었다.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아침에 선식 먹고 점심엔 만날 물회를 먹었다. 수술 장면 찍기 전에는 탄수화물 보충한다고 꼭 국수 챙겨먹고. 사실 머리 모양도 신경 안 쓰고 수염도 정돈돼 있지 않고 뭔가 부스스하고 만날 피곤하고 발도 뻘겋지 않나.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캐릭터가 가진 매력 때문에 그렇게 착각하는 거지 그게 뭐가 멋있나. (웃음) 아마 누가 최인혁을 했어도 다 멋있었을 거다.
은아(송선미)에게 보일 듯 말 듯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남녀와 동료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은아와 인혁의 관계를 표현하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이성민: 신은아와 멜로 하려고 한 게 아니라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그렇게 몰아갔다. 최인혁과 신은아의 관계는 일로 맺어진 관계고 가장 중요한 건 두 사람이 구석진 음지에서 정말 불쌍하게 아등바등하게 사는 벌레 같은 존재라는 거다. 어떻게든 한 번 버텨보려고 하는 그 공간에서 신은아는 최인혁을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이고, 유일하게 최인혁을 컨트롤하고 최인혁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다. 신념이 같고 누구보다 최인혁을 잘 알고 있는 여자니까 최인혁이 수술장에서 쫓겨났을 때 충분히 눈물도 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은아의 약혼남 앞에서 와인을 두 번이나 원샷한 건 동료 이상의 감정처럼 보였다.
이성민: 갑자기 은아가 캐나다로 간다고 하니까 최인혁의 마음이 그럴 것 같더라. 머리로는 이 여자를 보내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게 싫은 거다. 그래서 와인도 마셨고, 술 한 잔 마시고 소리도 버럭 질렀다. 그 지점에서 작가가 두 사람을 멜로로 풀어갔다면 충분히 이어질 수 있었다고 본다. 우리도 상상했다. 그냥 간단하게 커피숍에서 손 한 번 잡아버리면 끝나는 거 아니냐고. (웃음) 근데 작가가 그렇게 안 풀길래 우리도 이게 멜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쓰레기통 옆에 쭈그려 앉은 이후부터는 멜로 아닌 연기를 했다. 그리고 초반에 선미 씨와도 상의했지만, 은아는 최인혁만 보고 병원에 남을 여자가 아니다.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는 의 최만리” 전작 MBC 의 이재강에 이어 최인혁도 좋은 어른의 표본을 보여줬다. 두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좋은 어른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텐데.
이성민: 이제 나이가 마흔 다섯이니 연기를 어른스럽게 해야 될 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연기에 적용된 건 아니지만 때는 왕이 우선이 아니라 착한 형이 우선이 되는 캐릭터를 연기했고, 에서는 내가 병원에 갔을 때 이런 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지점들을 반영했다. 환자와 있을 때는 그들의 눈높이에서 대화하는 의사, 민우나 재인과 함께 있을 때는 공자님이 제자들과 대화하는 모습이면 어떨까. 제자들의 질문에 늘 흐뭇해하고 어떤 질문이든 친절하게 답해줄 수 있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을 만났다. 민우, 재인이 인혁한테 고집부리 듯이 질문하고 인혁은 그걸 야단치지 않고 잘 들어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이 이번 작품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현실에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리더 상이 드라마에서 구현된 셈이다.
이성민: 연기할 때는 ‘이건 현실에 없어’가 아니라 ‘어딘가에 이런 의사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연기했다. 자문해주시는 의사도 그런 말씀을 해주셨고.
최인혁과 정반대 캐릭터인 KBS 의 고재학 과장을 연기할 때도 같은 마음이었나.
이성민: 고재학이 아주 민폐 끼치는 의사이긴 했지만 수술 장면에 있어서만큼은 진지하게 하려고 했다. 촬영할 때도 고재학은 악당이지만 의사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람 생명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된다, 고재학이 실력이 없어서 못 고치는 거지 고치다가 환자 죽이려는 사람은 아니다. 최소한 직업에 대한 존중은 해줘야 한다.
고재학 과장과 설준석 사장 모두 마냥 악역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도 그들이 직업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웠기 때문이다.
이성민: 설 사장은 평생을 라스페라에 바친 사람이고 고재학 과장도 굉장히 절박한 친구다. 간절하게 필요한 것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의 차이다. 최인혁은 정직하게 승부를 본 사람이고 고재학은 좀 비열하게 접근한 사람이다. 그러고 보면 진짜 나쁜 악당은 별로 안 해봤다. 늘 불쌍한 악당들을 맡았다. (웃음)
상대적으로 악역인 캐릭터를 받았을 때도 스스로 납득을 해야 연기가 나오는 편인가.
이성민: 좀 그런 편이다. 왜 이 사람이 이렇게 됐으며 이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다는 걸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캐릭터에 두 가지 면이 공존하게 된다.
가장 많은 고민과 납득이 필요했던 캐릭터는 KBS 의 최만리가 아니었나 싶다.
이성민: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맡았던 역할이었는데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다. 최인혁보다 더 어려운 역할이었다. 세종과 갈등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고 그 명분이라는 것이 보는 사람 입장에서 설득력 있어야 하고 긴장감도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본엔 최만리는 계속 반대만 하고 세종은 계속 옳은 말만 하고 있는데 지는 게 빤히 보이는 대화에서 어떻게 긴장감을 유지할 것인가. 이건 순전히 배우의 기량이 필요한 것 같더라. 배우가 가진 신뢰도에 따라 최만리의 반대가 설득력 있게 보여지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는 게 힘들었다. 지금 다시 한 번 하라면 정말 잘 할 자신 있다.
그런 고민이 있었기에 모든 캐릭터에 리얼리티가 살아있었던 게 아닐까.
이성민: 관성대로 가는 것보다 그게 재밌더라. 최인혁도 수술할 때, 응급상황일 때, 환자를 데려올 때, 은아를 대할 때 모두 다른 모습을 보인다. 처음에 권석장 감독과 그런 얘길 했다. 초반에 최인혁이 수술하다가 환자 죽어야 된다고. 환자들이 최인혁 손에 가면 다 살아난다? 그건 아니라는 거다. 이 사람이 완벽한 의사, 판타지처럼 보이면 절대 안됐다.
“시트콤에서 다 같이 제대로 한 번 잘 놀아봤으면” 의 이재강을 통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평범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배우에게 있어 평범함이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이성민: 평범하다는 것은… 그냥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아저씨? 형? 삼촌? 그런 모습인 것 같다. 그게 나한테 있는 것 같다. 난 개성이 뚜렷한 배우도 아니고 캐릭터가 강한 배우도 아니다. 캐리커처로 그리기 어려운 배우라는 소리도 들었다.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땐 그게 불만이었다. 화면에 나오는 인상이 각인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싫었다. 배우가 캐릭터를 가지는 게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나의 경쟁력은 뭘까. 결론은 그냥 아무것도 없음이었다. 그래서 재강을 연기할 때도 왕이지만 형, 보통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같은 배우가 연기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각 캐릭터의 임팩트가 강했다. 대본에 나와 있는 것 이상으로 배우 스스로 고민하는 부분이 많았을 텐데.
이성민: 어느 순간 이걸 입어도 되고 저걸 입어도 되는 위치가 되더라. 고재학처럼 파마를 하면 고재학처럼 보이고 재강이처럼 행동하면 또 재강이처럼 보이고.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것 같다. 매번 캐릭터를 찾아가고 만나고 어느 지점에서 나 자신과 교차되는데 그 지점이 지나면 캐릭터가 단단해지고 끝나면 또 아쉽고. 매번 어려운 과정이다. 특히 최인혁은 가슴에 많이 남아있다. 나와 많이 닮기도 했고, 조금 과하게 인혁을 만났다. 많이 빠져있었다. 계속 부산에 있으니까 드라마 생각만 하고 배우들을 만나도 계속 드라마 얘기만 했다.
어떤 부분이 닮았나.
이성민: 대인관계가 좋지 않고 술도 못 먹는다. 어릴 때는 어떻게든 껴 있었는데 나이 들어서도 술을 안 먹으니까 사람들이 연락을 안 한다. 살면서 내가 친구하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일 없으면 집에서 거의 안 나가고.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연기지만 외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부분도 있는데 성격상 맞지 않는 부분도 있겠다.
이성민: 배우로서 유명세를 얻게 되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일들이 아직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제는 내가 배우이면서도 연예인이라는 걸 자각해야 되는 때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불편해할 게 아니라 내가 좀 불편해도 감수해야 될 부분이다.
그래도 내 성격상 이건 죽어도 못하겠다는 게 있다면.
이성민: 아직은 연기할 때 말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게 힘들다. 영화 시사회 포토월에서 플래시 막 터지는 거 있잖나. 아직도 사진 찍을 때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렇다면 배우 이성민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뭔가.
이성민: 지금 현재다. 드라마 하나 했다고 이렇게 주목받는 게 당황스럽기도 하고, 기자분들 모셔놓고 인터뷰하는 건 또 무슨 상황인건지 모르겠고. 어제도 잠을 못 잤다. 연기하면서 적정 수준을 유지해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큰 역할을 맡아서 이렇게 됐는데 내가 만들어 놓은 라인에서 일탈한 것 같다. 그 라인을 다시 찾아야 되는데 내가 생각한 안정적인 라인으로 잘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이다. 다들 다음 작품 뭐하냐고 하는데 그런 거 없다. 이제 조연할 수 있겠냐고 하는데, 왜? 조연하면 안돼? 난 별 문제없을 것 같다. 늘 똑같다. 날 필요로 하면 어디든 갈 거다.
마침 드라마를 끝내자마자 연극 에 합류하게 됐다.
이성민: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굉장히 위로받고 있다. 빵에 버터 발라 먹다가 다시 김치 먹는 기분이다. 연극은 지금 나한테 새살을 돋게 해주는 것 같다.
덕분에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을 텐데,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이성민: 시트콤은 언젠가 한 번 해보고 싶다. 정극을 시트콤처럼 연기한다는 얘기도 들어봤으니까 나와 좀 맞는 코드도 있는 것 같고 즉흥적인 것들을 연기해보고 싶다. 시트콤에서 다 같이 제대로 한 번 잘 놀아봤으면 좋겠다. 시트콤이 힘들다고 하던데, 했는데 뭘 못하겠나. 하하. 이거 하고 나니까 어지간한 드라마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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