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근우의 10 Voice] 좋은 드라마에는 좋은 ‘서브’가 있다
[위근우의 10 Voice] 좋은 드라마에는 좋은 ‘서브’가 있다
한 남자가 있다. 좋아하던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떠나보내며 자신은 그녀에게 “아빠이고 오빠이고 싶은” 존재였노라고, 앞으로 당신이 그래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또 다른 남자는 아끼는 여자 제자에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걸 말하고 싶으면 대나무 숲에 가지 말고 나한테 오라”고 말한다. SBS 의 종수(이필립)와 MBC 의 정우(류수영)는 이처럼 소위 ‘서브남주(서브 남자주인공)’의 역할에 충실하다. 잘나고 까칠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과 밀고 당기는 감정싸움을 할 때, 그들은 배려와 이해로 여자주인공을 챙긴다. 남녀주인공이 연애의 알콩달콩한 감정들을 시청자에게 환기한다면, ‘서브남주’는 먼발치서 여자주인공을 지켜보며 흔들림 없는 남자의 마음에 대한 판타지를 충족시킨다.

‘서브남주’, 정물로 쓰이거나 자신만의 이름을 갖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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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종수와 정우는 공통분모만큼이나 차이도 명확하다. 오직 라임(하지원)만을 바라보는 종수와 ‘서브여주’인 윤주(박예진)와도 깊은 관계로 엮인 정우의 연애 관계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종수는 능력 있는 액션스쿨 무술감독으로 나오지만, 그가 그 자리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팀원들과 좋은 액션을 만드는 것이 아닌 팀원인 라임을 챙기고 보살피는 것이다. 주연 여배우의 실수로 팔을 심하게 다친 라임을 위해 감독에게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은 멋있지만, 어떻게 의 결말처럼 인기 여배우의 콜을 받는 감독으로 성장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는 작품 내내 철저히 수호천사 판타지를 충족하기 위한 서브플롯의 장치로서 기능한다. 그에 반해 정우는 고고학자이자 교수라는 사회적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선에서 여주인공들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는 첫사랑 윤주가 찾아올 때마다 뿌리치지 못하지만 그녀가 자기 몰래 순종의 친서를 공개한 것에 대해 분노할 줄 알고, 이설(김태희)에게 그저 좋은 선생이자 상담자이지만 정황 증거만으로 그녀가 공주인 걸 알아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말할 줄 아는 존재다. 두 작품 중 어느 것이 더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건 은 김주원만을 남겼고, 현재까지의 는 이설과 해영(송승헌)만으로 기억될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공적인 로맨스 드라마에는 대부분 매력적인 ‘서브남주’가 있다. 많은 여성 시청자들은 종종 남자주인공보다 이 수호천사 혹은 키다리 아저씨에게 더 큰 지지를 보낸다. 하지만 매력이 뛰어난 것과 플롯 안에서 ‘서브남주’ 역할 이상을 해내는 것은 별개의 차원이다. SBS 의 신우 형님(정용화)은 “넌 왠지 길 잃은 강아지 같아. 항상 지켜보고 돌봐줘야 할 거 같아”라는 말로 미남(박신혜)과 시청자 모두를 설레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마다 한 발 물러서며 결과적으로 태경(장근석)과 미남의 연애 스토리를 풍성하게 하는 조연으로만 기능한다. 하나의 결과 혹은 결말을 위해 ‘서브남주’가 봉사할 때, 그 이야기는 수많은 캐릭터와 명품 대사에도 불구하고 창작자의 독백이 된다. 물론 이 역시 과 처럼 얼마든지 괜찮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다만 ‘서브남주’가 미처 예측할 수 없었던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이야기에 균열을 일으킬 때, 창작자의 의도와는 별개로 풍부한 가능성이 드라마에 담기는 흥미로운 순간이 생긴다.

전형의 함정에 빠지기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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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SBS 의 인욱(소지섭)이 인상적인 건, 그가 가진 삶의 태도가 재민(조인성)의 그것과 동등한 위치에서 다뤄지기 때문이다. 이 때 드라마는 창작자의 스토리가 펼쳐지는 공간이 아닌,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인물들이 부딪치며 사건을 일으키는 공간이 된다. 심지어 아무런 사건이 없는 순간조차, 이들이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의 가능성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을 기존 ‘서브남주’의 판타지와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시킨 건 KBS 의 재신(유아인)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수많은 인물들이 자신의 당파적 입장 안에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냈던 이 드라마에서, 그의 순정은 윤희(박민영)와 선준(박유천)을 통해 스스로 변하고 또 그들을 변화시키는 대화의 장 안에서 만들어진다. 수없이 회자되던 “내가… 이 말 한 적 있던가? 고맙다. 네가, 고맙다고”라는 대사가 무게를 얻는 건, 단지 ‘서브남주’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줘서가 아니라 그 부딪힘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드라마가 남녀주인공, ‘서브남주’와 ‘서브여주’의 사각구도를 이루는 상황에서 빤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드는 건, 그래서 오히려 이들 ‘서브’ 캐릭터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 그들이 로맨스에서건 사회적 활동에서건 누군가의 ‘서브’가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존재로 등장할 때 드라마는 예측 불가능한 경우의 수를 담게 된다. 그것이 웰메이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전형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글. 위근우 eight@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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