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지원 기자]
영화 ‘마녀’에서 닥터 백 역으로 열연한 조민수./사진제공=엔터스테이션
영화 ‘마녀’에서 닥터 백 역으로 열연한 조민수./사진제공=엔터스테이션
“죽었던 인물이 살아나도 아무렇지 않을 영화가 ‘마녀’죠. 어디로 튀어도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구성이에요.”

영화 ‘마녀’에서 자윤(김다미 분)의 정체를 알고 있는 닥터 백 역을 연기한 조민수는 이같이 말했다. ‘마녀’는 아동시설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은 날, 홀로 탈출한 후 기억을 잃고 살아온 자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미스터리 액션 영화다. 25일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조민수를 만났다. 조민수는 영화 ‘관능의 법칙’ 이후 4년 만의 복귀작으로 ‘마녀’를 택했다.

“드라마든 영화든 그간 일이 없었어요. 종종 ‘엄마’ 역할이 들어오긴 했는데 이미 그 역할로 활약하고 계신 배우들 자리를 빼앗는 게 아닐까 싶었죠. ‘좀 더 있다가 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도 들었고… 그러다가 닥터 백 역이 들어와서 마냥 행복해요. 배우로서 하고 싶은 역할을 하려면 버티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럴 법도 한 것이 조민수는 50대 중반에 들어섰다. 버티는 동안 대중에게 잊혀질지 모른다는 불안함은 없었느냐고 묻자 “없었다. 다행히도 그런 고민을 이미 오래 전에 끝냈다. 바보처럼 고민을 계속하다가 답이 없는 고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며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영화 ‘관능의 법칙’ 이후 4년만에 ‘마녀’로 돌아온 조민수./사진제공=엔터스테이션
영화 ‘관능의 법칙’ 이후 4년만에 ‘마녀’로 돌아온 조민수./사진제공=엔터스테이션
‘마녀’는 그동안 ‘신세계’ ‘브이아이피’ 등을 통해 선 굵은 남성 느와르를 선보였던 박훈정 감독의 여성 느와르물 도전작이다. 닥터 백과 자윤으로 대표되는 여성과 여성의 대결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 가운데 닥터 백은 악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 그러나 조민수는 “닥터 백은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모른다”고 설명했다.

“우리 사회에도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종자가 있잖아요? 닥터 백이 가진 가치관으로는 자신이 저지르는 일이 당연한 일상인 거죠. 우리나라 영화에서 흔히 하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그 인물을 미치광이로 표현하곤 해요. 닥터 백은 그냥 갑질하는 인물 정도로 보이길 바랐어요.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물건’들을 처리하기도 하는 사회 속의 인간이죠. 표현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물건’들을 대놓고 사랑하지도 못해요. 단순 악을 표현했으면 오히려 쉬웠을 거에요.”

다른 이들을 조종하고 상처를 주기만 했던 닥터 백은 총을 맞으면서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아픔을 느낀다. 조민수는 이번 영화를 통해 총 맞는 연기를 처음 선보였다. “한 번도 안 해본 연기라서 주변에 계속 조언을 구했어요. 진짜 아프게 저한테 폭탄을 달아주면 안 되냐고 하기도 했어요. 그 장면은 저에게 특히 중요했기 때문이에요. 누군가를 다치게만 하던 닥터 백이 처음으로 아픔을 경험하게 된 거죠. 닥터 백이 일그러지면서 본성이 튀어나오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연기하면서) 처음으로 총을 맞아보는 것도 너무 설레었죠. 하하”

닥터 백은 푸른 눈동자와 회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다. 조민수는 냉혹한 닥터 백을 표현하기 위해 “별 짓 다했다”고 털어놓았다. “보여지는 미장센도 중요해요. 이번에는 분장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 친구가 ‘주근깨를 그려도 되냐’고 해서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요. 긁힌 상처를 그려도 된다고 했죠. 10년 전 닥터 백의 눈동자 색과 현재의 색도 미세하게 달라요. 세월에 찌들어 퇴색한 모습을 표현했죠.”

조민수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고 했다. /사진제공=엔터스테이션
조민수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고 했다. /사진제공=엔터스테이션
조민수는 닥터 백에 몰입하기 위해 촬영 전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배역에 맡게) 저를 바로 확 바꾸는 걸 못해요. 뭐든 할수록 요령이라는 게 생기는데 보는 사람들은 그걸 다 알아차리죠. 그래서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촬영 전에는 사람도 안 만나요. 대본을 내내 뚫어지게 쳐다보지는 않지만 옆에 두고 곁눈질로 보고 (시간 날 때마다) 한 번 더 펴봤어요. 그러면서 배역에 대해 끊임 없이 생각해요. 그래도 만들어 놓고 보면 항상 후회가 남죠. 내 연기에 대해 누군가는 잘했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못했다고 평가하겠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시간과 노력을 들여요.”

한국 영화시장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는 작품은 많지 않다. 조민수는 이번 영화를 시작으로 여성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작품이 많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했다.

“남성 배우들이 주체적인 영화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갑자기 확 바뀌면 관객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 제가 한참 일할 때는 여성이 활약한다고 하면 검사, 변호사, 의사 그 이상이 없었어요. 일종의 문화 흐름이죠. 이제는 더 다양해 질 거예요. 10년쯤 흐르면 남성이 주체냐, 여성이 주체냐는 경계도 희미해질 것 같아요.”

특히 닥터 백 역은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남성으로 그려졌기에 조민수의 활약이 더욱 의미 있다. 그는 남성적 톤을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자동차 창문 밖으로 박희순을 향해 담배를 던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고 하자 “너무 몰입했는지 잘못해서 박희순의 중요 부분(?)으로 담배가 날아가고 말았다. 큰 일 날뻔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조민수는 남자 역할이던 닥터 백을 자신에게 맡겨준 박훈정 감독에 대해 “영화 출연을 결정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또한 ‘마녀’가 자신의 연기 인생에 분명 특별한 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예인은 외면당하기 좋은 직업이에요. (연기를 하다 보면) 제 자신이 없어지는 순간도 있죠. 대중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면 저만 아프고 다치더라고요. 그러면 오래 못살아요. 하하. 그래도 작품을 통해서 대중을 만나고 그 안에서 (배우 인생의) 답을 찾아야 해요. 참여하는 자체로 신나고 나에게 즐거운 시간을 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김지원 기자 bell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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