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주의 10 Voice] 우리에겐 ‘88만원 세대’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2011092206371473731_1.jpg)
지난 화요일 MBC 의 에피소드는 “대학 4년 반 동안 추억도 없고 알바만 했는데 남은 거라고는 학자금 대출 3658만 원”인 휴학생 백진희의 이야기였다. 방송이 나간 후 쏟아져 나온 기사들은 하나같이 ‘88만원 세대 애환 온몸으로 표현’, ‘88만원세대 리얼 연기 호평’이라는 헤드라인을 내걸었다. 알바, 학자금 대출, 취업난 같은 키워드로 분류되는 20대는 이처럼 쉽게 ‘88만원 세대’라 지칭된다. 지난 2007년 우석훈과 박권일이 함께 쓴 는 20대를 무대 위로 불러내며 이 센세이셔널한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책 속에서 만난, 청춘이니 낭만 혹은 열정이라는 사탕발림을 벗겨 내고 마주한 날 것의 20대는 고용 불안과 승자독식의 세계 주위를 맴돌며 한국 사회의 맨 밑바닥을 지탱하는 이들이었다.
취업이 88만 원 세대의 고통을 끝내주진 않는다
![[김희주의 10 Voice] 우리에겐 ‘88만원 세대’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2011092206371473731_2.jpg)
백진희와 마찬가지로 ‘88만원 세대’의 꼬리표를 단 이가 SBS 의 노은설(최강희)이다. 하지만 노은설은 다르다. 그녀는 지금껏 드라마에서 보지 못했던 캐릭터인 동시에 가장 부러운 캐릭터기도 하다. 부족한 스펙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취업에 성공해서도, 좌 지헌(지성) 우 무원(김재중)을 두고 그들의 애정 공세를 받아서도, 차봉만(박영규) 회장의 무한 지지를 받아서도 아니다. 극 중 인물 중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어른’으로 그려지는 노은설은 온몸으로 ‘로맨스’와 ‘성공’ 신화에 도전하고 세상과 맞장 뜬다. 그리고 그녀가 부딪혀 만들어낸 작은 실금은 관습과 비리로 얼룩진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는 남들처럼, 사람대접 받고 살기 위해 “애들 클럽 다닐 때 밤새 알바 뛰고 애들 연애할 때 죽어라 공부하고 진짜 죽자 살자 열심히 살았”던 노은설이 우여곡절 끝에 사회로 입성한 이후의 이야기다. 낙하산이든 스파이든 결국엔 판타지든 대기업에 자신의 책상을 마련한 노은설이 그 세계 안의 사람들과 부딪히며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드라마의 중심을 이룬다. 물론 과거 좀 놀았던 전력이 있고 명문대 출신이 아닌 노은설에게 세상은 녹록치 않다. 성희롱을 일삼는 사장과 노골적인 무시와 비아냥을 보내는 동료는 차라리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돈과 권력 앞에 비굴하지 않았던 노은설이 자신의 신념과 배치되는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다. 회장님의 비자금과 경영권 불법 승계 자료를 우연히 보게 되는 것처럼.
노은설, 청춘들의 새로운 롤모델
![[김희주의 10 Voice] 우리에겐 ‘88만원 세대’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2011092206371473731_3.jpg)
이후 20대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성공한 시도라 평가받는 의 저자 엄기호는 이렇게 말한다. “20대가 아무리 순응한들 이 체제는 그들의 순응을 감당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낙관한다. 이들이 순응을 배신하는 사회와 맞닥뜨렸을 때, 폭발적인 파괴력이 나올 것이다”라고. 하지만 순응에 익숙해지거나 한 번 기득권을 가지면 이를 놓기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 노은설이 부럽다. 그녀 역시 무결점의 완벽한 인간은 아니지만, 적어도 비겁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필요하면 언제든 “계급장 떼고” 덤빌 수 있고, 바른 말 하며 세상과 맞장 뜰 수 있는 건 노은설이 “또라이”라서가 아니다. 사회인이 되기 위해 “진짜 죽자 살자 열심히 살“면서도 그녀가 잃지 않았던 건 ‘무엇’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 온 삶의 자세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 학점을 관리하고 토익 점수를 높이고 인턴십 경력을 쌓는 것만큼이나 자기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세상이 모두 옳다고 말하는 모범 답안이 내 인생에도 정답인지, 사회에 내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만 열중하느라 그곳에 앉아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으면 좋겠다. 구로사와 키요시 감독은 서두의 글에 이어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깔린 철로의 끝에 전 세계의 미래가 있다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그리고 노은설의 친구 명란(하재숙)은 “가장 큰 복수는 적들이 그러건 말건 나만 재밌게 사는 거야”라고 말했다.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싣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기차가 향하는 곳이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아니라면 기차에서 뛰어내릴 용기도 가졌으면 좋겠다. 저 철로의 끝에 있는 건 어쩌면 우리를 88만원 세대라 부르며 동정하거나 소외시킨 ‘당신들의 미래’일지도 모르니까.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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