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남과 평범녀의 로맨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삼세번이건만 일일극이고 주말극이고 여기저기서 되풀이되는 본부장님과 캔디의 연애는 끝날 줄을 모른다. SBS 에서도 백마 탄 본부장님이 가난하지만 착한 여비서를 구원해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잘리는 것 말고는 두려운 것 없는 은설(최강희)은 회장님께도 “계급장 떼고” 바른 말을 해대고, 미숙한 상사 지헌(지성)을 완력을 더한 진심으로 조련한다. 뻔하지 않은 로맨스를 바탕으로 순항 중인 의 미덕을 김선영 TV평론가와 최지은 기자가 말한다. /편집자주

로맨스 장르에서 구두는 일종의 신화적 기호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부터 KBS 에서 인용된 “좋은 구두는 여자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믿음까지, 구두는 로맨스물의 여주인공을 연인에게로 이끄는 운명적 사랑의 매개체였다. SBS 에서도 은설(최강희)과 지헌(지성)의 인연을 얽히고설키게 만든 것은 구두다. 첫 만남에서 은설은 구두 한쪽을 잃어버리고, 지헌은 그녀를 찾기 위해 그 구두를 간직한다. 설정만 보면 전형적인 신데렐라 로맨스 같다. 하지만 실상 구두는 난투극 현장에서 은설의 무기였고, 지헌이 그것을 가져간 이유는 구설수에 대한 앙갚음을 위해 그 주인공인 “미친 똥머리”를 찾고자 함이었다. 가 여주인공 캐릭터와 멜로를 전형성으로부터 구원해내는 방식은 이처럼 로맨스의 신화를 부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노은설, 로맨틱 코미디계의 슈퍼 히로인
<보스를 지켜라> vs <보스를 지켜라>│로맨틱 코미디가 진화한다
vs <보스를 지켜라>│로맨틱 코미디가 진화한다" />예컨대 은설이 만원버스에서 사라진 구두 한쪽 대신 검은 비닐봉지로 발을 감싸고 출근하는 모습에서 구두의 오랜 신화는 유쾌하게 해체된다. 은설에게 구두는 로맨스의 낭만적 상징이 아니라 직장여성의 애환을 담은 생활도구다. 그녀가 구두를 자주 잃어버리는 것은 그만큼 쉴 틈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구두를 들고 찾아오는 왕자를 기다리는 대신 발뒤꿈치가 벗겨질 정도로 열심히 달리고 일하는 생계형 캔디의 모습은 MBC 의 구애정(공효진)이나 KBS 의 노순금(성유리)에게서도 발견된 진화였다. 그러나 은설은 이보다 더 나아가 스스로 백마 탄 기사 혹은 흑기사가 된다. 은설은 지헌의 ‘짱가이자 슈퍼히어로’를 넘어, 그간 꾸준히 성장해왔던 이 장르 여성 캐릭터 진화의 정점에 서있는 로맨틱 코미디계의 슈퍼 히로인이라 할 수 있다.

그 파워는 완력과 말의 힘에서 비롯된다. 이 둘은 그동안 이 장르에서 남주인공의 매력을 결정하는 요소들이었다. 육체적인 터프함은 남성미와 동일시되었으며, “내 말만 들어. 나한테만 귀 기울이라고!”로 대표되는 명령에 가까운 고백처럼 언어의 권력 역시 여성보다 상위계급에 속한 남주인공에게 주도권이 있었다. 은설은 이 두 가지 면에서 모두 남성들을 압도한다. 성희롱을 일삼던 사장을 비롯, 버스 치한, 길가에서 집적대는 취객들 등 극중 곳곳에서 은설이 처하는 상황은 그간 이 장르에서 남주인공이 흑기사로 등장해 여성들을 구원해왔던 단골 장면들이다. 그러나 은설은 스스로 해결사가 되어 이들을 응징한다. 더 통쾌한 것은 그녀가 속 시원히 “할 말은 하는” 언변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은설은 해야 할 말은 “계급장 떼고” 거침없이 하는 인물이며,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지헌의 대변인이기도 하다.

젠더와 계급의 권력 질서를 뒤집는 새로운 시각
그간 로맨스물이 완벽한 왕자님을 그리는 데에만 주력해왔다면, 는 이러한 완벽한 슈퍼히로인을 통해 이 장르에 내재된 은근한 성적, 계급적 권력관계를 뒤집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그것은 은설이 단지 완력과 언변을 갖춘 캐릭터라서만이 아니라 송 여사(김영옥)와 함께 극에서 유이하게 성숙한 어른이기 때문이다. 송 여사의 말대로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다 몸뚱이들만 컸지 머리가 어린” 아이들에 가깝다. 그리고 이 미숙함은 근본적으로 계급사회의 폐쇄성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회적으로’ 미숙하다.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자란 탓에 계급적 기준과 조건에 맞춰 인간을 평가하고 그 질서를 떠난 인간관계에는 한없이 서툰 것이다. 지헌의 대인기피증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관계의 미숙함’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반면 은설의 성숙함은 그러한 계급적 질서와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본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절대 그 안에서 못나갈 것 같았던 무원(김재중)이 은설로 인해 금 정도는 밟을 수 있었고 부끄러움도 알게 된 것과 나윤(왕지혜)이 계급적 “교육의 힘”과는 거리가 먼 은설과 자꾸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지헌이 차 회장(박영규)에게 은설만이 ‘자신을 안다’고 말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다. 따라서 이들의 멘토이자 친구이자 조련사인 은설은 전통적 성역할과 계급적 권력관계를 넘어 새로운 감정 관계의 ‘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는 이처럼 로맨스 장르의 규칙에 대한 원숙함과 독창적 시선을 동시에 보여주며 이 장르를 새롭게 즐기게 만든다.
글 김선영

“한 마디로, 제가 갑이다. 그 얘깁니다!” 자식들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기 위해 찾아온 재벌가 사모님들을 향해 노은설(최강희)은 일갈한다. 신 사장(화연)의 아들 차무원(김재중)은 은설을 좋아하고 황 관장(김청)의 딸 서나윤(왕지혜)은 말상대가 되어 줄 은설이 필요하다. 그래서 은설은 그들에게 ‘갑’이다. 현대 사회에서 빈부의 차는 분명 공고한 계급의 굴레로 존재하지만 정작 부에 대해 초연한 인물에게 그것은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대신, 더 좋아하는 사람이 을이고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을이다. 드라마에 옆집 총각보다 자주 나오는 재벌 3세와 가난하고 씩씩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도 SBS 가 클리셰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부자와 서민’이라는 이분법 대신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 가능한 ‘갑과 을’의 구도를 긴장감 있게 활용해 온 덕분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 재편한 관계망
<보스를 지켜라> vs <보스를 지켜라>│로맨틱 코미디가 진화한다
vs <보스를 지켜라>│로맨틱 코미디가 진화한다" />그리고 는 고용주와 고용인, 본부장과 파견직 비서, 회장과 말단 사원 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갑과 을, 즉 수직적 권력구도로 파악되는 관계들로부터 돈이나 직위, 나이와 같은 물리적 조건들을 걷어낸 채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들의 관계를 재편한다. 은설에게 먼저 반한 차지헌(지성)이 “학벌 있고 돈 많은 거 빼면 나머진 내가 더 꿀릴 것”이라 시인하는 것은 단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맹목이 아니라 인간을 그 자체로 공정하게 바라보려 하는 이 드라마의 시선이다. 그래서 의 재벌가 사람들은 상식선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갖춰야 할 예의를 알고 있고, 짓궂거나 철없을지언정 악랄하거나 오만하지 않다. 가난한 여주인공에게 아들과 헤어질 것을 강요할 때 물을 끼얹거나 돈 봉투를 내미는 것은 드라마의 ‘상식’이지만 지헌의 아버지 차회장(박영규)은 “노 비서가 못나서 그런 거 아니”라며 이해를 부탁하고, 지헌의 조모 송 여사(김영옥)는 “감히 그 따위 계집애가!”라며 노발대발하는 대신 “잘못 건드렸다가는 아가씨만 다치니 죄 짓는 거”라며 은설의 입장을 먼저 배려한다. 은설과 연적 관계이기도 한 나윤 역시 SBS 임세경(서효림)으로 대표되는 ‘정복자형 재벌가 여식’의 전형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매력 부족을 고민하는 소심한 여성 캐릭터로 생명력을 갖는다.

가장 ‘재벌다운’ 현실과 가장 ‘재벌답지 않은’ 캐릭터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수직적인 고용, 또는 계급관계를 해체하자 수직구조의 윗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가진 희극성이 드러난다. 족벌 경영, 편법 승계는 물론 휠체어와 검찰 출두, 미술품 투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재벌의 현재를 예리하게 꼬집는 대본이 예리한 현실비판과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가진 캐릭터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는 이유다. 심지어 극 초반 지헌이 은설 때문에 폭력 사건에 휘말리자 차 회장이 직접 아들을 때린 이들을 찾아가 응징하며 벌어진 일련의 에피소드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폭행 사건을 상당 부분 차용했다는 점은 가 가장 ‘재벌다운’ 현실과 가장 ‘재벌답지 않은’ 캐릭터를 매우 영리하게 활용한 지점이다. 그래서 사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강력한 판타지는 은설과 지헌의 티격태격 로맨스나, ‘본부장님’에서 ‘무느님’으로 진화한 완벽남 무원의 캐릭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전제 그 자체다. “재벌 3세와 88만원 세대가 계급장 떼고 맞붙는 이야기”에서 출발했다는 제작진의 의도는 드라마에서 분명 성공적으로 구현되었다. 그래서 는 빈부와 계급과 권력의 관계가 전면에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불편하지 않은 드라마다. 다만 판타지와 현실의 간극을 깨닫는 순간, 씁쓸함이 배가될 뿐이다.
글 최지은

글. 김선영(TV평론가)
글. 최지은 fiv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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