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지혜│이 아가씨를 어떻게 미워해
왕지혜│이 아가씨를 어떻게 미워해
이번에도 욕하면서 볼 줄 알았다.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 딸은 늘 돈 많은 부모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차도녀, 악녀, 완벽녀였으니까. 하지만 SBS 의 P그룹 장녀 서나윤은 다르다. 질투에 눈이 멀어 여자주인공 은설(최강희)의 치마에 아이스크림 묻히는 소심한 복수를 했다가 그대로 앙갚음당하는 순간, 정략결혼이 깨진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때마침 은설이 뻥- 차버린 깡통에 이마를 딱- 맞고는 “진짜 왜 그래요, 나한테?”라고 울먹거리는 순간, 이 여자를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게 됐다. 이런 허당, 아니 재벌녀는 서나윤 네가 처음이야!

‘허당 나윤’보다 한 술 더 뜨는 엉뚱한 아가씨
왕지혜│이 아가씨를 어떻게 미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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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서나윤을 연기하고 있는 왕지혜는 한 술 더 뜬다. “만날 화려하게 칼질만 할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저, 기사식당 가는 거 정말 좋아하거든요. 으헤헤헤. 돼지불백(돼지불고기백반) 같은 거 잘 먹어요.” 오- 마이 갓. 아가씨 외모와 아저씨 식성, 이 의외의 조합만으로도 왕지혜는 ‘예쁜 여배우’라는 빤한 수식어를 벗어난다. 에 함께 출연하고 있는 박영규(차회장 역) 이름만 들어도 “깔깔깔깔” 뒤로 넘어가고 나윤의 러브라인에 대해 “설마 김 비서님과 연결되는 반전? 으하하하”라는 엉뚱한 상상을 늘어놓는 모습은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터진다는 여고생의 모습에 가깝다. 그래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서나윤에게서 “내숭을 못 떠는” 왕지혜의 본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제가 한 번씩 욱하면 남자처럼 복식호흡으로 말하거든요. 그런 말투가 듬성듬성 나오는 것 같아요. 시끄러!! 하지 말라고!!! 이런 대사들. (웃음)” 입이 커서 살짝만 웃어보여도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왕지혜는 질문과 질문 사이 조그만 틈도 놓치지 않고 “근데 있잖아요”, “아 맞다, 제가 이런 댓글도 봤어요”라며 어느새 신나게 대화를 주도해간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자신의 근황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해주듯이.

“기다리니까 큰 게 딱 오는구나”
왕지혜│이 아가씨를 어떻게 미워해
왕지혜│이 아가씨를 어떻게 미워해
하지만 10년 전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잡지 모델로 데뷔했을 때만 해도 왕지혜는 내성적인 열일곱 소녀였다. “연기해 보라고 짧은 대사를 주셨는데 그 한 마디도 수줍어서 못했어요. 오디션 때도 모범생처럼 흰색 가디건과 검정색 A라인 스커트에 낮은 단화를 신고 갔던 기억이 나요. 누가 봐도 ‘얘는 뭐야?’ 이랬을 거예요. (웃음)” 광고와 드라마 촬영을 하며 점점 얼굴을 비췄지만 2007년 SBS 이후에는 꼬박 2년간의 공백기를 견뎌야 했다. 스케줄이 없어도 “아침 10시에 회사에 가서 시나리오 보고 운동 갔다가 다른 신인 배우들과 같이 밥 먹고 연기 수업 받은 뒤 밤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던 차에, MBC 의 진숙 역으로 캐스팅됐다. 곽경택 감독에게 캐스팅 확정 전화를 받던 날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할 정도로, 왕지혜에게 은 각별한 작품이다. “그 때 ‘기다리니까 큰 게 딱 오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먼 길을 돌아 왕지혜는 이제야 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이후 MBC 과 KBS 에 잇달아 캐스팅됐지만, 어느 작품에서보다 사랑받고 있고 자신의 실제 성격과 말투를 반영할 수 있는 현장은 유독 즐겁다. “대본 리딩 끝나고 MT 두 번 갔고 시간될 때마다 회식을 하니까 분위기가 안 좋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들과 촬영하면 으레 어렵고 불편할거라 생각하는데, 저는 그런 게 없어요.” 이런 속 깊은 수다쟁이라니, 정말 이런 아가씨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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