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과 복싱 국가대표 선발전의 준우승자. 이시영은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상반된 영역에서 남다른 에너지를 보여 주고 있다. <위험한 상견례>의 발랄한 경상도 아가씨 다홍으로 시작된 로맨틱 코미디에서의 행보는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커플즈>의 발칙한 나리를 거쳐 드라마 <난폭한 로맨스>의 은재에게 안착했다. 야구가 종교이기에 과격해질 수밖에 없었고, 경호원이 직업이기에 예쁘게 차려입지도 못했던 은재는 동시간대 방영되던 MBC <해를 품은 달>이나 SBS <부탁해요 캡틴>의 여주인공들과는 달랐다. 청순가련하지도 애교 넘치지도 않지만 소년 같은 담백함이 역시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던 은재는 이시영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동시에 단막극 준비로 시작했던 복싱으로 전국 아마추어 대회 우승에 이어 국가대표까지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냥 열심히 즐겁게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스스로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특히 제가 약한 일상 연기를 극에 녹아들게 잘하시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러워요. 저는 아직 배우로서 다져가는 단계니까 영화도 많이 보고 배우려고 노력해요. 복싱도 처음에는 이런저런 오해들을 많이 받았지만 계속해서 열심히 오래 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이제껏 본 적 없었던 로맨틱 코미디’이기에 하는 내내 ‘헷갈리고 어려웠던’ <남자사용설명서>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열심히 질문하고, 열심히 긍정한 덕분이었다. “질문에 끝이 없다고 할 정도로 감독님께 많은 걸 물었어요. 이번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니까 질문이 당연히 많아진 것 같아요. 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이 영화를 선택하고 촬영을 하고 끝나는 순간까지도 힘들고 불안하고 헷갈렸어요. 영화의 반 이상이 CG이기 때문에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했죠. 로맨틱 코미디의 틀을 가졌지만 그 전개를 푸는 방식이 거의 다 CG였거든요. 그래서 뒤에 블루 스크린만 걸어놓고 연기한 장면도 많았어요. (오)정세 오빠랑 연기하면서 이게 맞을까, 우리 잘하고 있을까 늘 불안했죠. 그래서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무한 긍정의 주문을 외우면서 버텼죠. (웃음)” 그 결과 파트너 오정세와는 애드리브만으로 한 신을 완성할 만큼 풍성한 앙상블을 이뤘고, 완성본을 보고선 ‘참여한 것이 영광’인 ‘새로운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다음은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이시영의 반대쪽 얼굴, 일본 드라마 <백야행>을 ‘심하게 좋아’하고 우타다 히카루의 목소리를 사랑하는 감성 충만한 이시영이 고른 5편의 영화들이다. 그녀의 연기 교본이 되기도 하고, 영화 선생님이 되기도 했던 작품들에게서 이시영이 꿈꾸는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My Week With Marilyn)
2012년 | 사이먼 커티스
“미쉘 윌리엄스를 좋아해요. 보면 볼수록 무서운 배우인 것 같아요. 엄청난 미인도 아니고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데 어떤 영화에서도 같은 모습이었던 적이 없어요. 특히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을 보고서 참 놀랐어요. 이 배우의 영화를 많이 챙겨봤기 때문에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마릴린 먼로를 완벽하게 해내잖아요.”
마릴린 먼로는 배우 생활을 하는 내내 금발 미녀가 받을 수 있는 오해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했다. 당대 최고의 섹시심벌이지만 늘 진정한 연기에 목이 말라있었고, 백치미로 포장된 역할로 인한 멍청하다는 오해에도 질려 있었다. 영화는 모든 것에 지쳐있던 마릴린 먼로에게 단비처럼 찾아온 짧은 해방의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2. <우리도 사랑일까> (Take This Waltz)
2012년 | 사라 폴리
“미쉘 윌리엄스의 영화 중에서 제일 좋았어요. 비교적 닮았다고 할 수 있는 영화 <블루 발렌타인>이 좀 더 현실적이라서 연출이나 색감 자체도 어둡고 거친데 <우리도 사랑일까>는 좀 더 밝은 느낌이잖아요.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면 영화 자체의 느낌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배웠어요. 저는 지금 다져가는 단계니까 그런 쪽으로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거 같아요. 연기를 잘하는 편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기인데, 연기하면서 또 영화 보면서 많이 배우려고 해요.”
편하지만 두근거림이 사라진 남편을 떠나 불안한 떨림을 주는 남자를 쫓아간 여자의 다음 날은 어떨까? ‘그렇게 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무리될 순간에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랑의 유효기간을 다시 경험하는 마고(미쉘 윌리엄스)를 통해 영화는 사랑이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하는 이들이 느끼는 감정의 실체를 예리하게 파고들어 가는 관찰일기에 가깝다.
3. <고백> (Confessions)
2011년 | 나카시마 테츠야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영화예요. 저는 이런 정서랑 잘 맞나 봐요. 일본 드라마도 되게 좋아하고요. 몇 번을 봤는데도 울면서, 감동하면서 봤어요. 그래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을 좋아하게 됐고 전작들을 찾아보는데, 예전에 인상 깊게 봤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연출하셨더라고요. <고백>은 볼 때마다 촬영이나 연출적으로 못 봤던 부분들이 계속 나와서 되풀이해서 봤어요. 같은 회상 장면이라서 다 플래시백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매 장면 다른 기법을 썼더라고요. 그래서 의문점을 갖게 되고 다시 찾아보게 되고. 아, 이렇게 촬영하는 방법도 있구나 공부하게 됐고요.”
늘 차분한 얼굴로 반을 돌봐온 담임 선생님이 어느 날 아이들에게 선언한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 반에 있습니다.” 딸을 잃은 어머니 유코(마츠 다카코)는 아이들에게 범인을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하겠다고 말한다. 이후 아수라장이 되는 교실은 그나마 인간적이다. 문제를 들쑤시기 전에는 고요한 수면 아래 숨어있었던 교실이 지옥처럼 변해버린 지는 이미 오래.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이들이 만들어온 서늘한 마지막이 여기에 있다.
4. <드라이브> (Drive)
2011년 | 니콜라스 윈딩 레픈
“요즘에 영화를 많이 몰아서 보고 있어요. 주변에서 추천을 받기도 하고 리뷰 사이트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이 좋게 본 영화들을 찾아보기도 해요. <드라이브>도 최근에 본 영화인데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성격의 영화였어요. 제목만 듣고선 자동차 영화인 줄 알았다니까요. (웃음) 잔인한 장면에 크게 거부감은 없는데 영화 보면서 고개 돌리게 되는 장면이 많아서 놀랐죠. 그럼에도 보면서 좋다고 느꼈고, 부러웠어요. 이런 스타일의 액션도 찍어보고 싶어졌어요.”
<드라이브>는 시종일관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키는 영화다. 어두운 도시 곳곳을 제 집처럼 누비는 남자(라이언 고슬링)의 자동차는 엔진 굉음으로 심장을 두드리고, 선혈이 낭자하고 살이 으스러지는 액션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 영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한 여자(캐리 멀리건)를 지켜주기 위해 거침없었던 남자의 순정이다.
5.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5년 | 미셸 공드리
“원래 한 번 봤던 영화를 또 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터널 선샤인>은 10번 넘게 봤어요. 연인들이 기억 안에서 겪는 표현들과 연기가 대단했어요. 저는 영화를 아무래도 연기자 입장에서 보니까 감독님을 믿지 않고서는 찍기 힘들었을 것 같은 순간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와, 감독님도 대단하고 저렇게 한 배우들도 대단하다. 특히 주인공의 기억 속으로 숨어들어 가면서 집 안에서 기억들이 무너지던 장면이 참 신선했어요.”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의 이별 후 그녀와의 기억들에 괴로운 조엘(짐 캐리)은 기억을 삭제하는 회사의 도움으로 모든 추억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말끔히 지워지지 않은 기억들은 뒤범벅되어 그를 더욱 괴롭히고, 기억만 없애면 쉽게 잊혀질 줄 알았던 사랑은 쉽사리 떨쳐버릴 수가 없다. 미셸 공드리 감독은 특유의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화법으로 사랑에 대해 어디서도 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시영은 최근 인천시청 복싱팀에 정식으로 입단했다. 이미 그녀에게 운동이 취미가 아닌 지는 오래 되었지만 배우로서 차근차근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와중에도 링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싱은 어떤 타이틀에 도전한다기보다 절 꿈꾸게 만들어서 좋았어요. 일반적으로 고등학교 때는 수능 준비하고, 대학 가서는 취직 준비하고, 그러다가 회사에 들어가면 일하느라 정신없고 그렇잖아요. 나이 들면서 어렸을 때처럼 꿈을 가지고 그것을 이룬다는 게 어렵고요. 저 역시도 연기자로서 연기만 하기도 벅찬 와중에 우연히 복싱을 만났지만 그로 인해서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물론 지금 바빠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순간인 것 같아요. 그것이 꼭 운동이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기회나 인연일지라도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삶에 또 다른 원동력이 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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