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긴 해요. 그런데 아예 관계가 없는 분야였다면 힘들었겠지만, 제가 늘 하던 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고, 성격도 생각보단 예민한 편이 아니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느끼진 않아요.” 일하던 도중 잠깐 짬을 내어 인터뷰해야 할 만큼 바쁜 스케줄이건만, 스타일리스트 한혜연은 좀처럼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시원시원한 답변과 간간이 터뜨리는 웃음에서는 오히려 에너지마저 느껴질 정도다. 수많은 패셔니스타들의 스타일링과 홈쇼핑, 방송 출연까지 쉴 틈이 없는 빡빡한 일상임에도 그의 이야기에선 피로감 대신 즐거움만이 묻어난다. “길을 가다 보면 아주 수줍게 ‘안녕하세요~’ 이러시는 분들이 꽤 계세요. 분명 제가 모르는 분인 것 같은데, 다정다감하게 아는 척을 해주시니까 ‘아, 네. 혹시…’ 이러면 ‘TV에서 뵀어요!’ 이러시더라고요. 워낙 많은 분이 인사를 해주셔서, 이 정도가 요즘 겪는 생활의 불편이랄까요. 하하하.”
그렇게 많은 이들이 한혜연을 알아보게 된 데는 그의 솔직한 매력이 한몫을 했다. 디자이너 요니, 포토그래퍼 홍장현 등 이효리의 친구들로 구성된 온스타일 <골든 12>에서 그는 방송을 위해 애써 꾸민 모습 대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보였다. “처음에는 얌전하게 ‘어, 그래. 알았어, 효리야’ 이랬는데 카메라가 열 대 이상 돌아가면서 2, 3일씩 찍으니까 원래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더라고요. 평소에 제가 험한 말도 조금 쓰는 편인데, 방송이니까 신경을 쓴다고 써도 종종 제어가 안 됐어요.” 방송에 적응하기까지의 어려움을 털어놓는가 싶더니, 금세 거리낌 없는 농담을 덧붙인다. “그래도 저만큼 애교 있게 욕하는 사람이 없다더라고요. 하하.” 솔직함을 지닌 사람은 많겠지만, 한혜연처럼 마주 보고 앉은 사람까지 웃게 하는 진솔함을 갖춘 이는 드물 것이다.
더불어 그런 한혜연이 프로의 얼굴을 내비칠 때면, 그가 가진 매력은 완성형을 이룬다. 미션디렉터로 참여했던 온스타일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3>에서는 매서운 시선으로 아마추어 모델들의 포즈를 꼼꼼하게 지적하다가도, 발전의 가능성을 보이는 이에겐 “어머, 베이비~ 너 너무 예쁘다” 등의 칭찬으로 기운을 북돋워 준 것이다. “애들한테 자극이 되고 싶었지, 그들이 자학하게 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아주 잘하지 않았는데도 ‘잘했어’, ‘너 많이 달라졌다’ 이런 말을 해주는 방식을 선택했죠. 그러니까 확실히 애들이 더 나아지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건 단지 한 명의 톱 모델을 선발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패션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부터 우러난 태도였다. “패션계가 그렇게 냉혹한 바닥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기도 얼마든지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비전이 있는 곳이거든요.” 그래서 스타일리스트로서 매일을 충실히 채워가며 살아가고 있는 한혜연이 ‘일상의 BGM’을 추천했다.
1.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의 <**Breath>
일상이 온갖 일들로 둘러싸여 있는 만큼, 한혜연이 일에 몰두할 때 듣는 음악은 중요하다. 마스터 클래스의 ‘Fame’은 그가 “주로 우울하거나 일할 때 듣는 곡이에요”라는 말과 함께 첫 번째로 꼽은 생활의 BGM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한 남성의 목소리와 올드하면서도 우울한 느낌의 사운드를 믹스했으며, 클라이막스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리듬은 집중하기에 꼭 알맞다. 이 곡을 만든 음악감독 겸 DJ 마스터 클래스는 15세 때부터 본격적인 음악 작업을 시작해 첫 디지털 싱글 ‘Draw Out’을 포함, 지금까지 총 아홉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또한, 지난 4월에는 일본의 재지힙합레이블 ‘GoonTrax’의 컴필레이션 앨범 < In Ya Mellow Tone Vol. 7 >에 한국인 최초로 자신의 음악을 수록하기도 했다.
2. Zoltan Kocsis ‘Vocalise Op.34 No.14’가 수록된 < The Best Of Rachmaninoff >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는 제가 생각이 많을 때 자주 듣는 음악이에요.” 머릿속이 복잡할 때 음악을 듣는다는 건, 머리를 쉬게 하거나 혹은 생각을 하나의 지점으로 모은다는 의미다. ‘보칼리제’는 가사나 음이름, 계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모음으로 발음하는 발성연습곡 또는 모음 창법으로 부르도록 작곡된 악곡으로, 라흐마니노프는 성악가 안토니나 네즈다노바에게 헌정하기 위해 이 음악을 만들었다. 애절하고 슬픈 선율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 덕분에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 현악용으로 많이 연주되기도 하지만, 원곡은 독창에 피아노 반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과 머리를 깨끗하게 만들기 좋은 멜로디인 만큼, “일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평정심이에요. 내 마음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거든요”라고 말한 한혜연과 잘 어울리는 곡이기도 하다.
3. Corinne Bailey Rae의 < Like A Star >
한혜연이 추천한 세 번째 BGM은 이젠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코린 베일리 래의 ‘Like A Star’다. 영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인 코린 베일리 래는 2006년 내놓은 데뷔 앨범 < Like A Star >로 영국 앨범과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그래미상 3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며 이름을 알렸다. “저는 책 읽는 걸 좋아해요. 못 읽어도 일 년에 열권은 봐야지 했는데, 잘 안되긴 하더라고요. (웃음) 그래도 가능한 한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베스트셀러라는 책들도 읽어보고, 자기계발서 같은 것도 보고, 다른 스타일리스트 분들이 낸 책 같은 것도 챙겨봐요. 물론 흥미 위주의 책들도 많이 읽고요. 그럴 때 많이 듣는 것이 이 노래예요.” 전주 없이 ‘Just like a star across my sky’라는 가사로 바로 시작되는 ‘Like A Star’의 도입부는 단숨에 귀를 잡아챌 만큼 매력적이다.
4. Pink Martini의 < Hey Eugene >
“남자친구와 함께 자주 듣는 음악이에요”라는 말과 함께 한혜연이 웃으며 추천해준 네 번째 음악은 핑크 마티니의 ‘Hey Eugene’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역사와 미술을 전공한 토마스 로더데일과 차이나 포브스를 비롯해 12인조로 꾸려진 밴드 핑크 마티니는 1997년 프랑스 칸 영화제를 통해 유럽에 데뷔했으며, 보컬과 피아노, 바이올린, 트럼펫, 트롬본 등의 선율악기와 퍼커션, 콩가 드럼 등의 타악기로 구성돼 있다. 토마스 로더데일은 이 밴드에 대해 “다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던 문화를 다시 한 번 세우고자 하는 바람에서 설립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Hey Eugene’의 경쾌한 리듬은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하지만, 파티에서 만난 후 연락 없는 남자 Eugene을 찾는 내용의 가사는 ‘웃프다(웃기다+슬프다)’라는 표현에 적합하다.
5. 이랑의 <1집 욘욘슨>
패션쇼에서 음악은 그 쇼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이다. 한혜연이 마지막으로 추천한 곡은 ‘2013 S/S 서울패션위크’의 ‘스티브J & 요니P’ 쇼에서 라이브를 선보였던 이랑의 ‘욘욘슨’이다. “들을수록 참 좋은 노래인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자주 틀어놓고 있어요.” 이랑은 툭 내뱉듯 노래하지만, 그 목소리는 사근사근하지 않고, 오히려 단단하면서도 담백하다. ‘욘욘슨’은 여기에 ‘개똥아 똥 쌌니 아니오 / 개똥아 똥 먹니 아니오’라는 독특한 후렴구와 서툴지만 망설임 없는 기타 연주, 중간 중간 들려오는 트라이앵글 소리가 어우러져 완성된 곡이다. 비단 이 노래뿐 아니라 앨범의 전 곡은 특별한 기교 없이 몇 개의 코드만으로 완성된 것이며, 녹음 역시 맥 북에 내장된 마이크를 이용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꽤 오랜 시간 톱스타들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해왔고, 이제는 베테랑이 되었지만, 한혜연은 아직도 배울 게 많다고 말한다. “예전부터 현장에서 뭐 하나라도 얻어가는 게 없으면 그 촬영은 실패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했어요. 워낙 상황도, 트렌드도 자주 바뀌는 곳이다 보니 공부도 많이 필요하고요. 그래서 제가 이 일을 재미있어하나 봐요. 흥미가 없으면 뭘 해도 다 똑같이 느껴지고, 하기 싫거나 돈으로만 보일 텐데 그렇지가 않아요.” 현재 기성 디자이너들의 옷을 심사하는 온스타일 <솔드 아웃>에 출연 중인 것 또한 “패션에 관한 거라면 재미있어서 뭐든지 해보고 싶다”는 그의 마음가짐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한혜연에게 ‘방송인’이라는 타이틀을 섣불리 달진 말기를. 그에게 방송이란, 그저 패션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일 뿐이다. “가끔 누가 ‘방송인 다 됐네?’라고 이야기하면 좀 섭섭해요. 저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노하우 같은 것도 없어요. 방송 관계자분들도 패션계가 궁금하고, 어떻게 일을 하는지 보고 싶어서 저를 섭외하시는 거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에요. 그게 지루하다면 아마 더는 저를 부르지 않겠죠.” 지루해지기는커녕, 볼수록 더 궁금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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