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ame is 강동호. 본명은 김동호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님도 계시고, 김동호 기자님도 굉장히 열심히 활동하시더라. 아무리 나에 대한 좋은 기사가 떠도 금방 묻혀버려서 수월한 방송 생활을 위해 예명을 만들었다. 회사에서는 이신, 민지후 같은 이름을 제시했는데 어우, 미칠 뻔 했다. (웃음) 그 이름으로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 내가 강동호를 제안했다.
1985년 8월 17일에 태어났다. 3살, 8살 터울의 동생이 있다.
키가 187cm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킨데 한 번도 앞자리에 앉은 적이 없고 늘 맨 끝에 앉았다. 키가 크니까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다른 연예인이랑 헷갈리지 않으신다.
혹시 사람들이 날 못 알아보면 엄마가 정말 속상해하신다. 한 번은 새벽에 엄마랑 패스트푸드점에 갔는데, 주문하기 전에 분명히 “엄마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제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근데 주문받으시는 분이 나를 못 알아보셨다. 엄마가 잠시 한숨을 쉬시더니 대뜸 절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강동호!!! 반짝반짝!!”이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웃음)
다섯 살 때 동네 친구들한테 단체로 얻어맞은 적이 있다. 어릴 땐 불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어른, 어린애 상관없이 머리카락을 막 뜯고 다녔다. 얼마나 심하게 그랬으면 다섯 살짜리 애들이 ‘얘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겠나. 엄마도 그 모습이 웃겼는지 얼굴 다 터진 사진을 찍어놓으셨다. 하하.
그러다가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한 건 아버지의 회초리 때문이었다. 웬만큼 때리면 애가 항복을 하는데 난 악에 받쳐서 얼굴이 파래지도록 소리만 꽥꽥 질렀다. 아버지가 ‘이러다 애가 넘어가겠다’ 싶어서 마지막으로 딱 때리셨는데, 결국 넘어갔다. (웃음) 그 때 이후로 성격이 온화해지고 낯도 가리게 됐다.
KBS 에서 원래 내 콘셉트는 이숙(조윤희)이의 첫사랑 교회오빠 이미지였다. 재용(이희준)으로 하여금 질투심을 유발해서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진행시키는 양념 같은 존재였는데, 작가님께서 재용이가 질투하는 모습이 재밌으셨던 모양이다. 알고 봤더니 규현이도 이숙이를 좋아했고 그러다가 갑자기 파혼을 하더니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상황까지 갔다. (웃음)
(이)희준이 형과 격투 신을 찍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다행히도 작가님이 규현이의 마지막을 좋게 마무리해주셔서 감사하다. 규현이가 미움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오래 미움을 받다보니까 사실 조금은 섭섭하더라.
‘무대뽀’ 정신 덕분에 첫사랑이 이루어졌다. 중학교 3학년 첫 수업이 국어 시간이었는데, 그 친구가 시를 발표하는 모습에 완전 반했다. 그 친구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내서 다짜고짜 전화를 했다. “안녕? 난 너랑 같은 반 김동호라고 해. 너 나 아니?”, “어… 알지”, “난 너가 좋아. 나랑 사귈래?”, “어…어 그래.” 정말 순식간에 사귀게 됐다. 하하.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도 의 이숙이나 뮤지컬 의 여자랑 비슷했던 것 같다. 어릴때 장기자랑을 하면 무조건 춤을 췄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 5학년 때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 6학년 때는 H.O.T.의 ‘We are the future’.
노래에 흥미를 느낀 건 중학교 때부터였다. 학교 축제나 경기도 노래 대회를 다 나갔다. 고등학교 때 ‘도시락’이라는 밴드 보컬로 활동했는데, KBS 에 출연해 ‘오 필승 코리아’를 ‘오 도전 골든벨’로 개사해서 부른 적도 있다. 그 땐 노래 참 잘했는데…
예전엔 정말 피곤한 완벽주의자였다. 어느 날 노래 슬럼프가 왔다. 그 때 차라리 좀 놔버렸으면 일찍 해결이 됐을 텐데 그걸 용납하지 못하고 공연 끝나고 열 시간 씩 연습을 했다. 계속 악을 쓴 거지.
그래서 뮤지컬 할 때가 가장 우울한 시기였다. ‘그’를 좋아해주셨던 분들도 계셨지만 솔직히 스트레스 정말 많이 받았고 자괴감에 빠진 적도 많았다. 내 노래를 듣는 게 힘들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고, 결국 그 시기가 나한테 약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중에 앨범을 내고 싶다. 내 목소리랑 제일 잘 맞는 장르는 발라드 같은 서정적인 분위기인 것 같다. 분명 록은 아닐 테니까. (웃음)
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좋은 작품이지만 너무 장기 공연으로 가다보니까 본래 작품이 갖고 있던 진정성이 조금 흐려지고 즉흥적인 재미만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전 시즌에 출연하신 정동화 선배를 보고 편견이 깨졌다. 극 중 여자가 기차를 타기 직전에 김종욱이 여자를 붙잡고 이름이라도 가르쳐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때 동화 형이 막 울더라. 김종욱의 그런 솔직한 모습이 좋아서 늦게 를 하게 됐다.
방송을 하면서 새롭게 느낀 재미는 파급력인 것 같다. 공연할 때는 만족스러운 공연을 해도 500명, 700명 말고는 아무도 모르니까 아쉬웠는데 방송은 내가 잘하든 못하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본다는 게 재밌는 것 같다.
실제로는 안경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MBC 때는 안경이 필요한 캐릭터라고 생각해서 썼지만 KBS 때는 안경을 안 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은 안경으로 김 실장의 지적인 이미지를 어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난 김 실장이 살짝 풀어진 모습에서 오는 차가운 매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경을 쓰면서 김이 빠지기도 했다.
요즘 런던 올림픽 경기를 보느라 잠을 못 자고 있다. 새벽 3~4시가 되면 야식 배달해주는 곳도 문을 닫기 때문에 주로 24시간 김밥집을 이용한다. 치즈 라볶이랑 김밥이 최고다. 아! 얼마 전에 빙수기계도 샀다.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장경진 three@
1985년 8월 17일에 태어났다. 3살, 8살 터울의 동생이 있다.
키가 187cm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킨데 한 번도 앞자리에 앉은 적이 없고 늘 맨 끝에 앉았다. 키가 크니까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다른 연예인이랑 헷갈리지 않으신다.
혹시 사람들이 날 못 알아보면 엄마가 정말 속상해하신다. 한 번은 새벽에 엄마랑 패스트푸드점에 갔는데, 주문하기 전에 분명히 “엄마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제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근데 주문받으시는 분이 나를 못 알아보셨다. 엄마가 잠시 한숨을 쉬시더니 대뜸 절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강동호!!! 반짝반짝!!”이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웃음)
다섯 살 때 동네 친구들한테 단체로 얻어맞은 적이 있다. 어릴 땐 불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어른, 어린애 상관없이 머리카락을 막 뜯고 다녔다. 얼마나 심하게 그랬으면 다섯 살짜리 애들이 ‘얘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겠나. 엄마도 그 모습이 웃겼는지 얼굴 다 터진 사진을 찍어놓으셨다. 하하.
그러다가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한 건 아버지의 회초리 때문이었다. 웬만큼 때리면 애가 항복을 하는데 난 악에 받쳐서 얼굴이 파래지도록 소리만 꽥꽥 질렀다. 아버지가 ‘이러다 애가 넘어가겠다’ 싶어서 마지막으로 딱 때리셨는데, 결국 넘어갔다. (웃음) 그 때 이후로 성격이 온화해지고 낯도 가리게 됐다.
KBS 에서 원래 내 콘셉트는 이숙(조윤희)이의 첫사랑 교회오빠 이미지였다. 재용(이희준)으로 하여금 질투심을 유발해서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진행시키는 양념 같은 존재였는데, 작가님께서 재용이가 질투하는 모습이 재밌으셨던 모양이다. 알고 봤더니 규현이도 이숙이를 좋아했고 그러다가 갑자기 파혼을 하더니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상황까지 갔다. (웃음)
(이)희준이 형과 격투 신을 찍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다행히도 작가님이 규현이의 마지막을 좋게 마무리해주셔서 감사하다. 규현이가 미움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오래 미움을 받다보니까 사실 조금은 섭섭하더라.
‘무대뽀’ 정신 덕분에 첫사랑이 이루어졌다. 중학교 3학년 첫 수업이 국어 시간이었는데, 그 친구가 시를 발표하는 모습에 완전 반했다. 그 친구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내서 다짜고짜 전화를 했다. “안녕? 난 너랑 같은 반 김동호라고 해. 너 나 아니?”, “어… 알지”, “난 너가 좋아. 나랑 사귈래?”, “어…어 그래.” 정말 순식간에 사귀게 됐다. 하하.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도 의 이숙이나 뮤지컬 의 여자랑 비슷했던 것 같다. 어릴때 장기자랑을 하면 무조건 춤을 췄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 5학년 때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 6학년 때는 H.O.T.의 ‘We are the future’.
노래에 흥미를 느낀 건 중학교 때부터였다. 학교 축제나 경기도 노래 대회를 다 나갔다. 고등학교 때 ‘도시락’이라는 밴드 보컬로 활동했는데, KBS 에 출연해 ‘오 필승 코리아’를 ‘오 도전 골든벨’로 개사해서 부른 적도 있다. 그 땐 노래 참 잘했는데…
예전엔 정말 피곤한 완벽주의자였다. 어느 날 노래 슬럼프가 왔다. 그 때 차라리 좀 놔버렸으면 일찍 해결이 됐을 텐데 그걸 용납하지 못하고 공연 끝나고 열 시간 씩 연습을 했다. 계속 악을 쓴 거지.
그래서 뮤지컬 할 때가 가장 우울한 시기였다. ‘그’를 좋아해주셨던 분들도 계셨지만 솔직히 스트레스 정말 많이 받았고 자괴감에 빠진 적도 많았다. 내 노래를 듣는 게 힘들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고, 결국 그 시기가 나한테 약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중에 앨범을 내고 싶다. 내 목소리랑 제일 잘 맞는 장르는 발라드 같은 서정적인 분위기인 것 같다. 분명 록은 아닐 테니까. (웃음)
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좋은 작품이지만 너무 장기 공연으로 가다보니까 본래 작품이 갖고 있던 진정성이 조금 흐려지고 즉흥적인 재미만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전 시즌에 출연하신 정동화 선배를 보고 편견이 깨졌다. 극 중 여자가 기차를 타기 직전에 김종욱이 여자를 붙잡고 이름이라도 가르쳐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때 동화 형이 막 울더라. 김종욱의 그런 솔직한 모습이 좋아서 늦게 를 하게 됐다.
방송을 하면서 새롭게 느낀 재미는 파급력인 것 같다. 공연할 때는 만족스러운 공연을 해도 500명, 700명 말고는 아무도 모르니까 아쉬웠는데 방송은 내가 잘하든 못하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본다는 게 재밌는 것 같다.
실제로는 안경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MBC 때는 안경이 필요한 캐릭터라고 생각해서 썼지만 KBS 때는 안경을 안 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은 안경으로 김 실장의 지적인 이미지를 어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난 김 실장이 살짝 풀어진 모습에서 오는 차가운 매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경을 쓰면서 김이 빠지기도 했다.
요즘 런던 올림픽 경기를 보느라 잠을 못 자고 있다. 새벽 3~4시가 되면 야식 배달해주는 곳도 문을 닫기 때문에 주로 24시간 김밥집을 이용한다. 치즈 라볶이랑 김밥이 최고다. 아! 얼마 전에 빙수기계도 샀다.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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