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정은 늘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었다. 생활의 흔적이나 일상의 고단함으로부터 격리되어 무균 상태에 놓인 석고상 같은 소녀. 그래서 동생을 앗아간 잔인한 현실에 눈을 감거나(영화 ) 연인과의 이별을 감당하지 못해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KBS ) 사랑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순간에도 몸과 마음이 아팠고, () 앓고 있는 병 때문에 사랑이 깨지기도 했다. (영화 ) 영화 에서 자동차를 움직이는 괴력에 도취되는 모습이 가장 낯설 수밖에 없었던 그녀에게는 환자복이나 소독약 냄새가 연상되는 특유의 인상이 있었다.
그랬기에 영화 에서 아버지에게 잔소리 듣는 노처녀 지우는 이제까지의 임수정과 가장 동떨어졌다. 선배의 고까운 커피 심부름도 참아내고, 실수에 책임도 질 줄 아는 삼십대 초반의 직장 여성. 가끔 애교도 부리고, 옛 추억에 젖는 감성도 있지만 대부분 일하느라 정신없는 보통 여자. 병약한 소녀로만 보이는 그녀의 몸에 삼십대 초반의 평범한 여자를 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실제 가지고 있는 고민이나 감성과 일치하는” 지우는 임수정에게 “오히려 연기하기 어렵지 않았다.” 남자의 첫사랑으로 스케치북에 담겨 있던 광고 속 이미지 대신 서른한 살 여자의 고민이 남은 시간. 첫사랑을 간직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고, 먼 훗날에는 “작은 오두막에서 남편과 함께 글을 쓰는” 꿈을 꾸는 임수정을 만났다.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공감하고, 소통하고 싶다” 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들을 보니까 첫사랑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더라.
임수정: 아무래도 영화가 첫사랑을 소재로 하고,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얘기하다보니까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난 극중의 지우처럼 첫사랑이 기억을 지배할 정도의 추억 같은 게 별로 없다. (웃음)
확실히 남자들보다 여자들은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평균적으로 덜한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첫사랑을 사랑의 원형처럼 간직하는 건 남자들 아닌가. (웃음)
임수정: 그래서 남자 분들도 즐겁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긴 왜 그런 얘기 있지 않나. 현재의 사랑에 더 집중하는 게 여자라고. 남자들이 더 많이 첫사랑이나 옛사랑을 그리워하거나 생각하는 거 같긴 하다. 여자는 현재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지막 사랑이었으면 좋겠단 희망을 안고 연애를 하니까.
사실 뮤지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의 영화 캐스팅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임수정과 지우는 쉽게 연결되지 않더라. 대중들이 생각하는 임수정의 이미지는 의 소녀처럼 첫사랑의 대상에 가까운데 오히려 첫사랑을 찾는 평범한 여자로 나온다는 게 의아했다.
임수정: 아, 그렇구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런 것처럼 사람들이 내게 갖고 있는 이미지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난 나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런 얘기를 들으면 가 남자 분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지 궁금하기도 하다. (웃음)
데뷔한지 10년이 넘었고, 많은 작품을 해왔다. 그 정도로 배우 생활을 하면 대중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무얼 바라는지에 대해 잘 알고 거기에 맞춰서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는 배우들도 많은데, 그런 타입은 아닌가보다.
임수정: 지금까지는 주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주로 해왔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확실히 십 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20대에서 30대로 넘어온 시점에서 좀 달라진 건 있다. 대중들이 내게 원하는 모습, 배우로서 보고 싶어 하는 모습들을 때로는 보여줘야만 한다는 거다. 그게 배우의 책임이고, 의무이고, 몫이 아닌가 한다. 그런 생각은 사실 빨리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 동안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중점적으로 해왔으니까. 이번에 같은 경우는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공감하고, 소통하고 싶었던 게 가장 컸다. 그래서 나도 훨씬 편해졌고. 그동안 해왔던 작품들에는 작가주의 영화들이 많아서 어려운 부분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좀 더 편하게 사람들과 영화를 함께 보면서 나눌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다.
“는 30대 여자의 성장이야기” 요즘 배우들은 작품 외적으로도 대중들과 여러 가지 창구로 생각을 주고받곤 하는데 오로지 작품으로만 소통하려고 하는 건 더 쉽지 않을 것 같다.
임수정: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 대한 이미지적인 말들도 나오는 거 같고… 물론 배우니까 작품만으로 소통할 수 있으면 그것이 최상이고, 최곤데 시대가 점점 달라지면서 배우에게 그것만을 허락하진 않는 거 같다. 물론 나도 다른 소통들을 끊임없이 원하지만 내게 맞는 방법으로 소통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온라인 쪽으로는 잘 안 맞아서 다양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긴 하다. 배우로서 계속 하는 부분이 있겠지만 다른 영역에서도 활동하면서 보여드려하지 하고 혼자만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 아직 구체적으론 아니고 혼자만의 생각이다. 짠하고 꺼내려고 숨기고 있다. (웃음)
에서 지우는 30대 초반의 뮤지컬 무대감독으로 연애보다는 일이 더 중요한 평범한 여자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임수정이라는 배우는 소녀적인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역할에 현실감을 부여하는데 힘들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임수정: 여배우로서의 모습 말고 개인의 모습은 사실 지우랑 닮아있다. 물론 첫사랑을 그렇게 오랫동안 갖고 있지는 않지만. (웃음) 일과 사랑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 사회에서 일하는 30대 초반의 여자로서 갖고 있는 감성이나 고민들이 일치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모습을 투영해서 연기하면 되는 거여서 어렵진 않았다. 물론 관객들에게는 색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거 같다. 아무래도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드린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여배우로서 갖춘 모습으로만 대중들 앞에 섰으니까 내게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 같다. 여배우로서 공식 석상에 나갈 때는 최대한 다 갖춰서 예쁘게 보여야 하는 게 맞지만 그렇게 입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웃음) 그런 면에서 지우랑 되게 비슷하다. 일단 힐이나 치마는 없고 (웃음) 가장 많은 게 티셔츠랑 후드티, 여자 옷보다는 남자 점퍼가 더 많고, 실키한 소재의 드레스보다는 가죽 소재를 더 좋아한다.
지금 계속 여자 주인공인 지우를 평범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연애에 쑥맥이고 일에만 매진한다고 하기엔 순간순간 앙큼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더라. 선문답 같은 말로 남자 마음을 설레게 할 때는 같은 여자가 보기엔 선수 같기도 하다. (웃음)
임수정: 여자들만 느끼는 그런 게 있다. (웃음) 분명 지우에게는 소녀성이 있었다. 과거 인도에서는 순정만화를 보고 남자 주인공에게 설ㄹㅔㅆ던 십대 소녀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용기 낼 줄 아는 여자였는데 현재의 그녀는 엉망이지 않나.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고, 사랑에 대해 용기 없이 주저하게 만들었는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첫사랑의 기억이 혹은 십년 동안의 사회생활이 혹은 한국사회가 여자들에게 바라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것들이 영화 안에서 다 설명되지는 못했지만 로맨틱 코미디 영화니까. 그렇게 하려면 휴먼 드라마로 만들어야지. (웃음)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가 다시 자기 인생과 사랑에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계기들이 생기면서 옛사랑을 대면하고,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지우의 입장에서 보면 는 30대 여자의 성장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지우는 복이 많다. 성장도 하고 사랑도 얻고. (웃음) 안그래도 지우는 인도에서 정말 순정만화에 나올 것 같은 예쁜 첫사랑을 만드는데 왜 스스로 이어나가지 않았을까 의문이 남더라.
임수정: 사실 그 부분을 표현하기가 가장 쉽지 않았다.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사실 그게 가능한 건 한 가지 설명밖에 없는 것 같다. 그녀는 철부지같이 운명론자라는 거다. 내가 찾아가면 그를 찾을 수 있는데 미뤄왔던 거다. 진짜 인연이라면 운명처럼 언젠가 만나겠지 하고. 그러니까 몸만 컸지 마음은 안 큰 거다. (웃음) 운명 같은 사랑을 믿고 첫사랑에 계속 얽매인 감성 자체가 몸만 크고 경력만 늘었고 사회생활을 해서 털털해진 거지 사실은 어린아이 같다. 근데 그런 아이 같던 여자가 진짜 여자로 성장해가는 거 같다. 용기 있게 일도 해내고 사랑도 쟁취하니까.
“서른이 되고 나서 훨씬 여유가 생겼다” 지우랑 비슷한 나이대에 비슷한 고민도 했다고 했는데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시점은 어땠나. 그 시기는 여자에게 중요한 순간이면서도 무엇 하나 불안하지 않은 게 없는 혼란스러운 때인데.
임수정: 진짜 여자에게는 그 시기가 특별한 거 같다. 아홉수 이런 얘기도 있고. (웃음) 분명히 쉽진 않았다. 여자에게 20대와 30대는 다르니까. 그만큼 우울하고 힘들 수 있는 혼란스러운 순간인데 그 시간을 인생을 멀리까지 계획하는 시간으로 가졌다. 그래서 잘 넘길 수 있었던 거 같다. 확실히 심적으로도 그렇고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웠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일과 사랑에 대한 여러 고민을 하게 됐다. 결혼도 해야 하나, 현실적으로 괜찮은 남자를 잡아야 하나부터 이 일을 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가 진짜 이일을 이렇게 까지 할려고 한 건 아닌데,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게 따로 있지는 않을까 등등.
그렇게 고민으로 가득 찬 시기를 지나 30대가 되었다. 시간적으로 그 차이가 크지는 않지만 서른이 되고 나서 바뀐 것들이 있나.
임수정: 훨씬 여유가 생겼다. 그만큼 경력도 쌓이고 경험도 많아졌고, 사회생활 하는데도 배우로서도 익숙한 게 있는 거 같다. 대중들의 시선과 여배우에 대한 편견, 여배우의 외모에만 집착하게 되는 궁금증 같은 것도 이해가 되고. (웃음) 그 전까지는 내가 중심이었다면 타인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진 거 같고, 일이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예민해질 수 있는 부분에서 여유로워진 거 같다.
확실히 의 제작발표회나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임수정 망언’이라고 까지 기사가 나는 등 연이어 충격발언을 시원하게 터뜨리는 걸 보고 그런 여유를 확실히 느꼈다. (웃음)
임수정: 너무 막 던져서… (웃음) 근데 진짜 그날 기사가 엄청 나왔더라. 웹 페이지수가 어마어마하게 넘어가서… 어휴. 자주 던져야겠단 생각도 했다. (웃음) 좀 더 내 라이프 스타일을 활력 있게 만들어야 던질 게 많을 텐데 너무 조용하게 살다보니까 던질 게 한계가 있는 거다. 좀 더 멋지게 살아서 막 던질 수 있는 임수정이 돼야지. (웃음)
“요즘은 전혜린의 책에 푹 빠져있다” 영화 끝나고 나서는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갖고 싶다. 스포츠 댄스도 배우고, 하고 있는 학문도 더 열심히 하겠다”고 했더라.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나.
임수정: 스포츠 댄스는 이제 선생님을 구했고 (웃음) 관심 갖고 있는 어학공부도 계속 하고 있다. 영어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중학교 때는 팝을 들으면서 가사집 보면서 따라 부르고. 또 다른 관심 있는 분야도 계속 공부하고 있다. 영화에도 잠깐 나오긴 했는데 기타도 계속 배우고 있다. 사실 코드 몇 개 가지고 연습하는 정도긴 한데 그것도 계속 배우고 언젠가는 음악영화에서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출연하고 싶기도 하다. (웃음) 개인생활을 좀 더 풍요롭게 하는 데 시간을 많이 쏟은 거 같다. 또 평소에는 책을 좀 병적으로 보는 스타일이다.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밤을 새서라도 끝까지 본다. 워낙에 이것저것 한꺼번에 보는 스타일인데 요즘에 가장 공감하면서 보고 있는 책은 전혜린의 다. 선물을 받아서 이제서야 읽고 있는데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을 치면서… 어휴, 왜 이제야 이 분을 알게 됐을까 할 정도로 푹 빠져있다.
책 읽는 걸 그렇게 좋아하면 글을 쓰는 것에도 욕심이 날 거 같다.
임수정: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걸 제일 좋아했다. 학창시절에는 유일하게 위로받으면서 친구처럼 지낸 게 글이고, 일기였다. 글 쓰는 것에 관심이 많고 생각하고도 있다. 지금도 계속 공부하고 있고. 나중에 짠하고 나오려고 구체적인 건 아직은 없지만 가장 많이 위로 받기도 하고, 가장 많이 날 표현할 수 있는 게 글인 거 같다. 그래서 아주 나중에는 나이 들어서 글을 쓰고, 인세 받으면서 살면 참 멋있을 텐데. (웃음) 내가 즐거운 상상이라고 이름 붙인 앞으로의 계획에도 포함된 건데, 70-80대까지 어떻게 살아갈지 꿈꾸고, 상상해봤다. 40대에는 이런 모습, 50대에는 이랬으면 좋겠고, 어떤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상상 하지 않나. 70-80대가 되면 자연 속에 있는 작은 오두막 같은 집에서 자식들도 다 독립시키고 남편하고만 있을 거 같다. 어, 남편이 먼저 죽으면 안 되는데. (웃음) 난 조그마한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을 거 같고, 남편은 옆에서 채소밭을 가꿔도 되고 집에서 뭔가 만들어도 되고. 그렇게 둘이서 오붓하게 있는 걸 상상해본다. 그때는 확실히 옆에 누군가 있지 않을까.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그랬기에 영화 에서 아버지에게 잔소리 듣는 노처녀 지우는 이제까지의 임수정과 가장 동떨어졌다. 선배의 고까운 커피 심부름도 참아내고, 실수에 책임도 질 줄 아는 삼십대 초반의 직장 여성. 가끔 애교도 부리고, 옛 추억에 젖는 감성도 있지만 대부분 일하느라 정신없는 보통 여자. 병약한 소녀로만 보이는 그녀의 몸에 삼십대 초반의 평범한 여자를 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실제 가지고 있는 고민이나 감성과 일치하는” 지우는 임수정에게 “오히려 연기하기 어렵지 않았다.” 남자의 첫사랑으로 스케치북에 담겨 있던 광고 속 이미지 대신 서른한 살 여자의 고민이 남은 시간. 첫사랑을 간직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고, 먼 훗날에는 “작은 오두막에서 남편과 함께 글을 쓰는” 꿈을 꾸는 임수정을 만났다.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공감하고, 소통하고 싶다” 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들을 보니까 첫사랑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더라.
임수정: 아무래도 영화가 첫사랑을 소재로 하고,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얘기하다보니까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난 극중의 지우처럼 첫사랑이 기억을 지배할 정도의 추억 같은 게 별로 없다. (웃음)
확실히 남자들보다 여자들은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평균적으로 덜한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첫사랑을 사랑의 원형처럼 간직하는 건 남자들 아닌가. (웃음)
임수정: 그래서 남자 분들도 즐겁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긴 왜 그런 얘기 있지 않나. 현재의 사랑에 더 집중하는 게 여자라고. 남자들이 더 많이 첫사랑이나 옛사랑을 그리워하거나 생각하는 거 같긴 하다. 여자는 현재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지막 사랑이었으면 좋겠단 희망을 안고 연애를 하니까.
사실 뮤지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의 영화 캐스팅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임수정과 지우는 쉽게 연결되지 않더라. 대중들이 생각하는 임수정의 이미지는 의 소녀처럼 첫사랑의 대상에 가까운데 오히려 첫사랑을 찾는 평범한 여자로 나온다는 게 의아했다.
임수정: 아, 그렇구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런 것처럼 사람들이 내게 갖고 있는 이미지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난 나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런 얘기를 들으면 가 남자 분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지 궁금하기도 하다. (웃음)
데뷔한지 10년이 넘었고, 많은 작품을 해왔다. 그 정도로 배우 생활을 하면 대중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무얼 바라는지에 대해 잘 알고 거기에 맞춰서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는 배우들도 많은데, 그런 타입은 아닌가보다.
임수정: 지금까지는 주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주로 해왔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확실히 십 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20대에서 30대로 넘어온 시점에서 좀 달라진 건 있다. 대중들이 내게 원하는 모습, 배우로서 보고 싶어 하는 모습들을 때로는 보여줘야만 한다는 거다. 그게 배우의 책임이고, 의무이고, 몫이 아닌가 한다. 그런 생각은 사실 빨리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 동안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중점적으로 해왔으니까. 이번에 같은 경우는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공감하고, 소통하고 싶었던 게 가장 컸다. 그래서 나도 훨씬 편해졌고. 그동안 해왔던 작품들에는 작가주의 영화들이 많아서 어려운 부분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좀 더 편하게 사람들과 영화를 함께 보면서 나눌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다.
“는 30대 여자의 성장이야기” 요즘 배우들은 작품 외적으로도 대중들과 여러 가지 창구로 생각을 주고받곤 하는데 오로지 작품으로만 소통하려고 하는 건 더 쉽지 않을 것 같다.
임수정: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 대한 이미지적인 말들도 나오는 거 같고… 물론 배우니까 작품만으로 소통할 수 있으면 그것이 최상이고, 최곤데 시대가 점점 달라지면서 배우에게 그것만을 허락하진 않는 거 같다. 물론 나도 다른 소통들을 끊임없이 원하지만 내게 맞는 방법으로 소통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온라인 쪽으로는 잘 안 맞아서 다양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긴 하다. 배우로서 계속 하는 부분이 있겠지만 다른 영역에서도 활동하면서 보여드려하지 하고 혼자만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 아직 구체적으론 아니고 혼자만의 생각이다. 짠하고 꺼내려고 숨기고 있다. (웃음)
에서 지우는 30대 초반의 뮤지컬 무대감독으로 연애보다는 일이 더 중요한 평범한 여자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임수정이라는 배우는 소녀적인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역할에 현실감을 부여하는데 힘들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임수정: 여배우로서의 모습 말고 개인의 모습은 사실 지우랑 닮아있다. 물론 첫사랑을 그렇게 오랫동안 갖고 있지는 않지만. (웃음) 일과 사랑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 사회에서 일하는 30대 초반의 여자로서 갖고 있는 감성이나 고민들이 일치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모습을 투영해서 연기하면 되는 거여서 어렵진 않았다. 물론 관객들에게는 색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거 같다. 아무래도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드린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여배우로서 갖춘 모습으로만 대중들 앞에 섰으니까 내게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 같다. 여배우로서 공식 석상에 나갈 때는 최대한 다 갖춰서 예쁘게 보여야 하는 게 맞지만 그렇게 입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웃음) 그런 면에서 지우랑 되게 비슷하다. 일단 힐이나 치마는 없고 (웃음) 가장 많은 게 티셔츠랑 후드티, 여자 옷보다는 남자 점퍼가 더 많고, 실키한 소재의 드레스보다는 가죽 소재를 더 좋아한다.
지금 계속 여자 주인공인 지우를 평범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연애에 쑥맥이고 일에만 매진한다고 하기엔 순간순간 앙큼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더라. 선문답 같은 말로 남자 마음을 설레게 할 때는 같은 여자가 보기엔 선수 같기도 하다. (웃음)
임수정: 여자들만 느끼는 그런 게 있다. (웃음) 분명 지우에게는 소녀성이 있었다. 과거 인도에서는 순정만화를 보고 남자 주인공에게 설ㄹㅔㅆ던 십대 소녀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용기 낼 줄 아는 여자였는데 현재의 그녀는 엉망이지 않나.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고, 사랑에 대해 용기 없이 주저하게 만들었는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첫사랑의 기억이 혹은 십년 동안의 사회생활이 혹은 한국사회가 여자들에게 바라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것들이 영화 안에서 다 설명되지는 못했지만 로맨틱 코미디 영화니까. 그렇게 하려면 휴먼 드라마로 만들어야지. (웃음)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가 다시 자기 인생과 사랑에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계기들이 생기면서 옛사랑을 대면하고,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지우의 입장에서 보면 는 30대 여자의 성장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지우는 복이 많다. 성장도 하고 사랑도 얻고. (웃음) 안그래도 지우는 인도에서 정말 순정만화에 나올 것 같은 예쁜 첫사랑을 만드는데 왜 스스로 이어나가지 않았을까 의문이 남더라.
임수정: 사실 그 부분을 표현하기가 가장 쉽지 않았다.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사실 그게 가능한 건 한 가지 설명밖에 없는 것 같다. 그녀는 철부지같이 운명론자라는 거다. 내가 찾아가면 그를 찾을 수 있는데 미뤄왔던 거다. 진짜 인연이라면 운명처럼 언젠가 만나겠지 하고. 그러니까 몸만 컸지 마음은 안 큰 거다. (웃음) 운명 같은 사랑을 믿고 첫사랑에 계속 얽매인 감성 자체가 몸만 크고 경력만 늘었고 사회생활을 해서 털털해진 거지 사실은 어린아이 같다. 근데 그런 아이 같던 여자가 진짜 여자로 성장해가는 거 같다. 용기 있게 일도 해내고 사랑도 쟁취하니까.
“서른이 되고 나서 훨씬 여유가 생겼다” 지우랑 비슷한 나이대에 비슷한 고민도 했다고 했는데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시점은 어땠나. 그 시기는 여자에게 중요한 순간이면서도 무엇 하나 불안하지 않은 게 없는 혼란스러운 때인데.
임수정: 진짜 여자에게는 그 시기가 특별한 거 같다. 아홉수 이런 얘기도 있고. (웃음) 분명히 쉽진 않았다. 여자에게 20대와 30대는 다르니까. 그만큼 우울하고 힘들 수 있는 혼란스러운 순간인데 그 시간을 인생을 멀리까지 계획하는 시간으로 가졌다. 그래서 잘 넘길 수 있었던 거 같다. 확실히 심적으로도 그렇고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웠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일과 사랑에 대한 여러 고민을 하게 됐다. 결혼도 해야 하나, 현실적으로 괜찮은 남자를 잡아야 하나부터 이 일을 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가 진짜 이일을 이렇게 까지 할려고 한 건 아닌데,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게 따로 있지는 않을까 등등.
그렇게 고민으로 가득 찬 시기를 지나 30대가 되었다. 시간적으로 그 차이가 크지는 않지만 서른이 되고 나서 바뀐 것들이 있나.
임수정: 훨씬 여유가 생겼다. 그만큼 경력도 쌓이고 경험도 많아졌고, 사회생활 하는데도 배우로서도 익숙한 게 있는 거 같다. 대중들의 시선과 여배우에 대한 편견, 여배우의 외모에만 집착하게 되는 궁금증 같은 것도 이해가 되고. (웃음) 그 전까지는 내가 중심이었다면 타인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진 거 같고, 일이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예민해질 수 있는 부분에서 여유로워진 거 같다.
확실히 의 제작발표회나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임수정 망언’이라고 까지 기사가 나는 등 연이어 충격발언을 시원하게 터뜨리는 걸 보고 그런 여유를 확실히 느꼈다. (웃음)
임수정: 너무 막 던져서… (웃음) 근데 진짜 그날 기사가 엄청 나왔더라. 웹 페이지수가 어마어마하게 넘어가서… 어휴. 자주 던져야겠단 생각도 했다. (웃음) 좀 더 내 라이프 스타일을 활력 있게 만들어야 던질 게 많을 텐데 너무 조용하게 살다보니까 던질 게 한계가 있는 거다. 좀 더 멋지게 살아서 막 던질 수 있는 임수정이 돼야지. (웃음)
“요즘은 전혜린의 책에 푹 빠져있다” 영화 끝나고 나서는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갖고 싶다. 스포츠 댄스도 배우고, 하고 있는 학문도 더 열심히 하겠다”고 했더라.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나.
임수정: 스포츠 댄스는 이제 선생님을 구했고 (웃음) 관심 갖고 있는 어학공부도 계속 하고 있다. 영어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중학교 때는 팝을 들으면서 가사집 보면서 따라 부르고. 또 다른 관심 있는 분야도 계속 공부하고 있다. 영화에도 잠깐 나오긴 했는데 기타도 계속 배우고 있다. 사실 코드 몇 개 가지고 연습하는 정도긴 한데 그것도 계속 배우고 언젠가는 음악영화에서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출연하고 싶기도 하다. (웃음) 개인생활을 좀 더 풍요롭게 하는 데 시간을 많이 쏟은 거 같다. 또 평소에는 책을 좀 병적으로 보는 스타일이다.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밤을 새서라도 끝까지 본다. 워낙에 이것저것 한꺼번에 보는 스타일인데 요즘에 가장 공감하면서 보고 있는 책은 전혜린의 다. 선물을 받아서 이제서야 읽고 있는데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을 치면서… 어휴, 왜 이제야 이 분을 알게 됐을까 할 정도로 푹 빠져있다.
책 읽는 걸 그렇게 좋아하면 글을 쓰는 것에도 욕심이 날 거 같다.
임수정: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걸 제일 좋아했다. 학창시절에는 유일하게 위로받으면서 친구처럼 지낸 게 글이고, 일기였다. 글 쓰는 것에 관심이 많고 생각하고도 있다. 지금도 계속 공부하고 있고. 나중에 짠하고 나오려고 구체적인 건 아직은 없지만 가장 많이 위로 받기도 하고, 가장 많이 날 표현할 수 있는 게 글인 거 같다. 그래서 아주 나중에는 나이 들어서 글을 쓰고, 인세 받으면서 살면 참 멋있을 텐데. (웃음) 내가 즐거운 상상이라고 이름 붙인 앞으로의 계획에도 포함된 건데, 70-80대까지 어떻게 살아갈지 꿈꾸고, 상상해봤다. 40대에는 이런 모습, 50대에는 이랬으면 좋겠고, 어떤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상상 하지 않나. 70-80대가 되면 자연 속에 있는 작은 오두막 같은 집에서 자식들도 다 독립시키고 남편하고만 있을 거 같다. 어, 남편이 먼저 죽으면 안 되는데. (웃음) 난 조그마한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을 거 같고, 남편은 옆에서 채소밭을 가꿔도 되고 집에서 뭔가 만들어도 되고. 그렇게 둘이서 오붓하게 있는 걸 상상해본다. 그때는 확실히 옆에 누군가 있지 않을까.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