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도남지나치게 예민하며 자신의 기준에 엄격함을 현대 국어에서는 ‘까칠하다’고 표현한다. 바로 이 까칠함과 도도함을 갖춘 남성을 ‘까도남’이라 이른다. 그러나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기억할 것은 ‘까도남’이 사실은 표면 그대로의 남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너그럽거나 겸손한 성품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이 넘치는 남성, 성격적 결함이 뚜렷하지만 설리번 선생님의 인내를 갖고 열심히 가르쳐 내 사람 만들어 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남성, 예컨대 SBS 의 김주원과 같은 남성이라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까도남’에 해당되는 것이다.
1. 까칠하고 도도한 남성
2. 귀족적인 마스크에 거침없는 기품, 후덜덜한 섹시 미모의 남성
이처럼 개념의 외양만을 습득한 채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는 자칫 편협한 사고를 통해 세상의 진실을 외면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누군가 행방불명이라는 중차대한 원인으로 국민의 기본 의무를 수행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를 ‘까맣게 도덕을 잊은 남자’라 치부하기 전에 행방이 묘연한 그 시절 그의 행적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군인이 되어본 적 없는 누군가가 포탄의 실제 모양을 정확히 모를 때, 우리는 그를 손가락 질 하기 전에 그의 행동에 개입된 타인의 연출을 의심해야 한다. 물론, 타인의 연출이 존재한다는 그 발언 또한 누군가의 연출에 의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화제가 되고 있는 어느 정치인의 고군분투는 어쩌면 단지 연발하고 있는 실수의 점들을 하나의 선분으로 이어가겠다는 무의미한 도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의 발언으로 대중은 사물의 실체가 교란되는 전쟁의 무서움을 간접체험하게 되었으며, 육군 중장과 공군 중위에게도 이러한 현상이 예외 없음을 알게 되었다. 허튼 유머 감각은 주머니에 단단히 감춰두어야 할 작금의 현실에서 대중들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그 정치인의 행보야말로 살아 숨 쉬는 앙가주망에 다름 아니다. 사르트르는 상황을 폭로함으로써 세계의 변혁을 시도하는 것이 작가요, 폭로된 대상에 책임을 지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 했다. 작가주의 정치인의 살신성인으로 드러난 세상의 진실 앞에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까도 까도 도무지 믿을 남자하나 없는’ 정치판을 만든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까도남 결격 사유
* 까칠하고 도도하지만 남자가 아닌 경우
* 도도하게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남자이되, 비굴한 경우
* 도도하게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는 남자이되, 친절한 경우
* 까칠하게 판단하고 도도하게 행동하는 남자이나 매력이 없는 경우
글. 윤희성 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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