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이란 간사해서 시간이 지나면 즐거운 기억만 남는다고들 한다. 즐겁고 훈훈했던 순간들 사이로 시시콜콜하지만 어쩐지 그냥 묻고 넘어가기엔 안타까움이 사무치는 순간들도 함께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가 2010 드라마계의 ‘땡큐’에 이어 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새로운 드라마를 만나 봐도 계속 다시 또 다시 돌아서면 생각나는 ‘노땡큐’ 10을 함께 선정했다.KBS 의 김태호 교수(이종혁)가 자신의 전공인 사회학에서 어떤 학문적 성과를 이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의 언변은 톱클래스다. 바람피우다 걸려 놓고선 아내 정임(김지영)에게 일부일처제의 불합리함을 역설하는 김태호 교수님의 진짜 전공은 어쩌면 화술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전문 화술 강사로 나서는 게 더 적성에 맞을지도. (수강기호로는 그토록 애타게 찾던 ‘로즈마리’를 추천한다.) 반면 MBC 의 시간강사 이상현(신성우)은 그럴 말재간조차 없다. 교수 임용을 위해 아내 몰래 빚을 냈다가 고스란히 사기를 당하고 돌아오는 이 무능함의 화신은, 아들이 납치되었다 돌아 온 상황에도 아내와 친하다는 ‘신우 삼촌’이 누군지가 제일 궁금한 찌질한 남자의 완성을 보여줬다. 아, 결혼 생활에 가방끈 긴 거 소용없다더니! 참 이상한 일이다. 시청률 30%대를 돌파하며 장장 7개월 동안 월화 드라마의 강자로 군림한 MBC 에서 정작 동이(한효주)의 존재감은 흐릿하다. 아니, 심지어 후반부가 되면 라는 드라마 자체의 이미지가 흐릿해진다. 방영이 모두 끝난 지금, 의 지배적인 이미지는 그 오묘함이 모나리자의 미소를 방불케 하는 ‘티벳궁녀’ 최나경이다. 사실 드라마 자체의 존재감이 미미하기로는 보다는 KBS 가 한 수 위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해서 제작된 는 먹으라고 준 옥수수를 가지고 하모니카를 부는 포로를 연기한 엑스트라 한 명의 존재감을 이기지 못 한다. 정말이지 미미하고도 미친 존재감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집이 무너졌다며 쳐들어 왔다. 얹혀사는 주제에 주인 집 아들 백승조에게 ‘너랑 동거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내가 더 곤란’하다고 엄포를 놓고, 개인 과외를 해주면 과거 사진 폭로 사태는 피할 수 있을 거라고 협박을 일삼았다. 이상한 탈바가지를 쓰고 백승조의 괄약근을 공격하고, 수능 시험 날 아침 백승조에게 졸음을 유발하는 감기약을 제공한 데 이어 대입 면접 길까지 가로막은 전력의 이 세입자는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민폐로 백승조의 우아한 인생을 철저히 초토화시켰다. 심지어 ‘인생의 무덤’이라는 결혼에까지 백승조를 끌어들여 평생을 자신과 함께 보내게 만든 그녀, MBC 의 오하늬는 가히 지옥에서 올라온 세입자라 할 수 있겠다. 본디 식도락의 세계란 것이 그렇다. 맛을 위해서라면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전국을 유람하게 만들거나 거위의 목에 억지로 깔때기를 끼워 강제로 사료를 먹이는 잔혹한 일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 식도락이다. 그러나 역시 올해 최고의 식도락가는 SBS 의 백성민 대통령(이순재)이다. 백성민 대통령은 자신의 복직을 요구하는 하도야(권상우) 검사에게 “죽은 네 아버지의 곰탕 맛을 재현해내면 복직시켜” 주겠다는 복직조건을 제시했다.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모으기도 바쁜 도야에게 갑자기 ‘곰탕왕 하도야’가 되라는 부당한 제안을 태연히 던지는 그는 이미 단순한 식도락가의 경지를 넘어섰다. 입에 맞는 곰탕 한 그릇을 위해 권력 남용도 불사하는 백성민 대통령은 ‘맛의 협객’, 즉 식객이라 불러 마땅하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돼지고기를 먹을 때마다 매번 “국산 돼지고기는 기름기도 적어서 살찔 염려도 없”다는 말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SBS 의 인물들은 고기를 먹을 때만 이러는 게 아니라, 보험 상품에 대한 상세 설명과 함께 “난 2개나 들었다”는 자랑까지 일삼고 급기야 옷가게 점원마저 “이 카드 예쁘죠? 혜택도 많고”라는 무의미한 대화를 시도한다. 하긴, KBS 는 우리 쌀로 빚은 막걸리의 소중함과 그 제조과정을 집요하리만치 반복해서 보여 주고, SBS 는 야채 음료의 위대함을 역설한다. 심지어 KBS 의 주인공들은 매번 타고 다니는 차가 바뀌는데 공교롭게 번번이 같은 제조사의 차다. 뭐, 다 기분 탓일 거다. SBS 는 신달래(강민경)가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프랑스에 있어야 할 시상식장이 어쩐지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처럼 보이는 건 다소 찜찜하지만, 인간의 종적 한계를 넘어선 혼신의 익룡 연기는 그녀의 수상 자격에 대한 의혹마저 잠재운다. 물론 이는 달래의 헌신적인 어머니 조복희(이미숙) 여사로부터 물려받은 끼일 것이다. 딸의 성공을 위해 직접 케이블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막춤을 출 때 펑키한 느낌의 헤어스타일과 속눈썹을 길게 강조한 아이라인으로 이효리의 Chitty Look을 완벽하게 소화한 조복희 여사는, BGM의 박자로는 가둘 수 없는 자유로운 춤사위와 환희에 찬 사자후로 달래의 각성과 시청자들의 공황상태를 동시에 이끌어 냈다. 과연 여왕의 자격을 지닌 모녀다. 저는 MBC 의 상고재 세입자 전진호(이민호)입니다. 저를 게이로 오인하고 있는 집주인 박개인(손예진) 씨의 만행을 고발하려 합니다. 일단, 세입자의 사생활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노크도 없이 제 방문을 열어젖히거나 통화내용을 엿듣는 건 기본입니다. 하루는 제가 샤워를 마치고 막 타월을 두르려는 찰나 샤워실문을 벌컥 열더군요. “미안하다. 하지만 렌즈도 안 끼고 안경도 안 써서 앞이 정말 잘 안 보인다”면서 문을 쾅 닫더니, 친구 영선(조은지) 씨와 제 알몸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지 뭡니까. 무엇보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아우팅 문제입니다. 술 취해 모르는 사람들한테까지 “이 남자 게이라구요!”라고 떠벌리고 다닙니다. 이건 엄연히 언어폭력입니다. 도대체 주인님의 개념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아아아!!!! 게다가, 이 주인이! 자꾸 신경 쓰이는 저는!! 뭡니까아아아!!! 물론 KBS 의 백현(유승호)이 누구와 붙여놔도 멜로가 가능한 마성의 남자라는 건 인정한다 치자. 그렇다고 해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풀잎(고아성)과 능숙한 ‘밀당’을 주고받으며 솔로들의 가슴을 찢어서는 안 되는 거다. 안산의 모 고등학교는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남녀 학생간의 ‘윤리 거리’를 50cm로 정해놓았다는데, 키스 직전까지 가놓고선 천하대에 갈 생각을 하다니 염치도 좋다. 그러나 ‘이것듀리 벌써부터 염장질’ 계의 최고봉은 역시 KBS 의 정규(이민호) 도령과 연이(김유정) 커플이다. ‘난 네가 괴물이라도 좋다’는 정규의 절절한 애정 고백은 “그럼 난 괴물만도 못 하다는 거냐”는 솔로들의 ‘열폭’을 불러일으켰으며 심지어 고 2와 초 5의 뽀뽀 신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동방예의지국의 도를 흐려놓기까지 하였으니, 지금 이 거룩한 분노가 결코 부러움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정말이다. MBC 의 태영(이태곤)과 지민(조윤희)는 한 때 세상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 지민의 어머니 윤희(윤여정)란 사실을 알게 된 태영은 지민을 처절하게 배신하고, 지민은 복수를 위해 태영의 장인 문정호(박상원)와 결혼을 결심한다. 과거의 연인은 이제 서로를 노리는 장모와 사위가 되어 서로의 등 뒤에 칼을 꽂을 궁리에 골똘하다.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복수를 다짐하고, 급기야 절벽에서 떠밀리는 그 모든 상황을 코 평수의 변화만으로 표현해내는 조윤희와, 그 어떤 상황에도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냉혹한 복수자 이태곤은 시청자들에게 가면 없이도 가면극을 보는 것 같은 놀라운 경험을 선사했다. 이런 포커페이스, 스티븐 시걸 이후 처음이다. 드라마에 유난히 밴드 열풍이 불었던 올해, 그래서 헬로루키 부문 역시 어느 한 팀을 고르기 힘들 만큼 쟁쟁한 후보들로 가득했다. 폭발적인 무대 매너와 신들린 가창력을 자랑하는 MBC 의 천재 뮤지션 하민재(김범)가 이끄는 퍼플비와, 기타 한 대만 가지고 스트로크와 아르페지오를 동시에 연주하면서 마이크도 없이 에코 효과를 구현해내는 KBS 의 강무결이 이끄는 완전무결밴드는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모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역시 제천국제영화제에서 깜짝 공연을 펼치고 그도 모자라 2010 골든디스크 락 부문 후보에까지 오른 SBS 의 컴백 마돈나 밴드를 이길 수는 없었다.
글. 이가온 thirteen@
글. 이승한 fourte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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