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되면 어디서든 연말 결산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2010년은 유난히 그 의미가 크다. 지난 시간을 정리하는 것이 연말이라면, 올해의 연말은 모든 것들이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사건들이 벌어지기도 하고, TV에서는 그 시대를 반영한 어떤 변화들이 눈에 띄고 있다. SBS 이 초반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고, 조만간 KBS 의 스핀오프격인 블록버스터급 드라마 SBS 이 방영 예정이다. 에서는 2주에 걸쳐 2010년을 정리하면서 지금 시작되고 있는 TV와 엔터테인먼트에 대해서도 함께 다룰 예정이다. 물론, 그런 정리나 진단보다 훨씬 중요할 의 연말정리와 기자들과 TV 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작품과 인물들도 있다.연평도에 북한의 폭탄이 떨어졌다. 정치권은 책임소재를 따지느라 바쁘다. MBC 취재진은 연평도에서 술을 마셨고, “노래는 안 불렀다”고 변명했다. 안상수 의원은 보온병을 포탄이라고 말했다. 그사이 연평도 주민들은 찜질방에서 잔다. “국가가 지켜주지 않는 국민들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SBS 의 서혜림(고현정)이 외쳤다. 극중 천안함 사건을 연상시키는 잠수함 사고에 대한 언급이었다.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은 다시 드라마를 예언으로 만든다. 이젠 정치권의 결정이 서혜림의 인생을 바꾼 것이 드라마처럼만 보이지 않는다. 정치가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는 드라마도 그러하다.
SBS 의 재벌 3세 김주원(현빈)은 길라임(하지원)에게 ‘계급’과 ‘차별’에 대해 말한다. 재벌 3세와 평범한 여성의 몸이 바뀌는 판타지에서도 현실의 그림자를 지워낼 수 없다. 곽정환 감독은 KBS 와 KBS 에서 권력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평범한 백성도 노비로 전락하고, 재벌은 진이(이나영)같은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는다. 왕부터 노비까지 나라의 모든 구성원들이 등장한 가 올해의 화제작이었던 건 그 자체로 시대와 드라마의 변화다. MBC , KBS 과 처럼 한 개인, 또는 한 가문의 미덕만으로 시청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 MBC 처럼 선한 개인이 성공하는 사극에서도 천민의 비밀결사라는 그 시대의 사회적 배경을 삽입한다.
사극과 시대극, 트렌디 드라마까지 달라졌다 KBS 은 시대와 드라마의 화법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성균관에는 멋진 선배, 존경스런 스승, 두근거리는 로맨스가 있었다. 동시에 노론과 소론, 빈부의 갈등이 있었다. 성균관 밖에는 가난 때문에 무엇이든 해야 하는 또 다른 청춘들이 있다. 공부에도, 사랑에도 세상과 정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격’을 위해 쓰레기 버리는 것도 자제하자는 일이 벌어지는 시대에 와 은 궁궐부터 저자거리의 이야기를 모두 다루면서 사극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달라진 시대는 달라진 사극을 요구했고, 달라진 사극은 달라진 서사를 보여줬다.
사극이 시대의 지형을 횡으로 펼쳐 보이는 사이 시대극은 시대를 종으로 연구한다. SBS 는 탐욕에 눈이 먼 군인이 한 가정을 파괴시키며 시작했고, MBC 은 그 군인과 손 잡은 재벌의 현대사다. KBS 의 김탁구(윤시윤)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당하게 가로막던 사람들을 이겨낸다. 세 작품 모두 지난 시대가 권력의 폭력이 존재하던 시대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김탁구(윤시윤)는 이 시대를 견뎌내고 팔봉빵집으로 돌아가 작지만 힘차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빵을 만든다. 의 이강모(이범수)는 그 시절에서 살아남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결국 그 시절을 끊어내며 선한 기업가가 된다. 반면 MBC 의 대서양 그룹은 ‘친 서민 이미지’로 위장했을 뿐 탐욕은 여전하고, 자식 세대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남은 희망은 가난하지만 선하게 살아온 윤정숙(김희정)같은 사람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뿐이다.
세 작품 중 어느 것이 시대에 대한 예언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답이 무엇이든 과거로부터 시작된 이 시대의 룰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MBC 에서 셰프 최현욱(이선균)은 끊임없이 고함을 치며 요리사들을 경쟁에 몰아넣는다. 작은 주방에서도 더 나은 일자리와 더 높은 급여를 위해 끝없는 경쟁이 이어지고, 조직원들은 요리법 하나에도 파를 나눠 사내 정치를 한다. 최현욱이 주방보조인 서유경(공효진)을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도 그의 리더십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세운 원칙과 인사에 대한 공정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경쟁이 곧 선이 된 시대, 유학 없이는 성공한 요리사가 되기 힘든 시대. 는 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트렌디 드라마의 틀을 보여줬다.
기존의 틀을 벗어난 드라마의 등장 더 이상 ‘실장님’과 사귄다는 것만으로 신데렐라가 되고, 모두가 행복한 로맨스를 보여줄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SBS 에서 마혜리(김소연)는 검사 조직에 힘겹게 적응하고, MBC 에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숨기고 사는 가장의 비애가 등장한다. SBS 는 1등이 아니면 버틸 수 없는 국가대표의 힘겨움이 나온다. 마혜리가, 또는 의 김연우(김소연)가 사랑을 시작하는 계기는 모두 직장 일로 힘든 자신에게 힘과 위안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서부터다. KBS 의 아이들마저도 수학 문제를 풀면서 서로의 감정을 나눈다. 직장이 또 하나의 집처럼 되어버린 20~30대 직장인들에게 MBC , KBS 처럼 남녀 주인공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처럼 그리기만한 드라마는 환영받기 어려웠다. KBS 는 기존 트렌디 드라마의 틀 안에 독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기업을 이끌어가려는 딸의 이야기를 넣었다. MBC 과 SBS 같은 일일 드라마에서도 청춘 남녀의 사랑과 재벌의 경영권 다툼과 대기업의 검찰 로비가 등장한다. 사극부터 일일 드라마까지, 여러 장르의 작품들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 보다 복합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MBC 과 SBS 는 변화한 시대에 대한 가장 극적인 예다. 김병욱 감독은 주인집 아들과 가사 도우미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계급의 문제를 다뤘다. 김수현 작가는 자신이 그리던 남성 가장 중심의 가족 대신 모계사회에 가까운 대가족의 이야기 안에 이혼, 동성애 등의 문제를 다룬다. 두 사람도 이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김병욱 감독은 “시간을 멈춰”버렸고, 김수현 작가는 드라마에서도, 자신의 트위터에서도 끝없이 토론했다. 답은 없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시청자는 이미 에서 경제력 상위 1%가 99%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그리고 tvN 와 MBC 같은 케이블 드라마는 꾸준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새로운 유형의 드라마를 정착 시켜나가고 있다.
새로운 시대 앞의 갈림길에서 그래서 지금 드라마는 새로운 시대 앞의 갈림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 시청자들에게 시대의 변화가 피부에 와 닿으면서 드라마도 더 분명하게 시대의 흐름을 드러낼 수 있게 됐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는 기존의 장르적 관습에서 벗어난 작품을 만들 틈을 만들었다. 사극부터 일일 드라마까지, 신진 연출자부터 노장 작가까지 모두 시대를 끌어안고, 작품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폭을 넓힌다. 이 변화가 단지 시대의 흐름만 반영하는데서 그칠지, 드라마의 질적 향상에 이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이 변화를 긍정적으로 이끌 탄탄한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우연이겠지만, 단막극이 사라지는 순간 ‘막장 드라마’의 영향력이 절정에 이르렀었다. KBS와 MBC에서 한시적으로나마 부활한 단막극은 이 시대의 드라마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폭탄은 떨어졌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의 인생은 달라졌다. 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드라마는 스스로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
글. 강명석 two@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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