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자극하는 인물들을 연기했었죠.” KBS 23회 ‘어서 말을 해!’에 출연하는 배수빈은 자신이 최근 몇 년 동안 맡은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건, 그의 말이 과거형이라는 거다. 이번 ‘어서 말을 해!’에서 그는 일하는 거 귀찮아하고, 9년 전 헤어진 첫사랑에게 무작정 대시하는 ‘찌질한’ 구청 직원 기영 역할을 맡았다. 얼마 전 종영한 MBC 의 차천수를 비롯해 SBS 의 정조, SBS 의 박준세처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흠결 없는 캐릭터를 연기했던 이 잘생긴 남자 배우는 어떻게 기영이 될 수 있었을까. 또 그것은 배우 배수빈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지난 8일 수원 KBS 드라마센터 세트장에서 막 기영을 연기하고 나온 그에게 직접 들어보았다.

오랜만의 단막극 출연이다.
배수빈 : 대본을 봤는데 너무 재밌었다. 끌리고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아서 읽고 나서 단박에 출연을 결정했다.

“내가 루저 기질이 좀 있다”
KBS <드라마 스페셜>│배수빈 “이제는 단막극에 힘을 보태주고 싶다”
│배수빈 “이제는 단막극에 힘을 보태주고 싶다”" />
사실 대본을 봤을 땐 잘생기고 인기 많은 구병 역할일줄 알았는데 ‘찌질한’ 기영으로 나오더라.
배수빈 : 기영에게 끌렸다. 내가 루저 기질이 좀 있다. (웃음) 눈치는 없지만 뭔가 인간적이고 순박한, 우리들이 쉽게 곁에서 볼 수 있는 타입의 인물이다.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착하다는 거다. 그런 인물이 가까이 있는 영희(김규리)라는 친구와 인연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라 공감이 많이 갈 거다.

아까 촬영 들어가며 ‘나 왜 이렇게 기영이처럼 걷지?’라고 혼잣말 하더라. 사실 멋있는 연기를 많이 했고 실제 얼굴도 잘생긴 배우인 만큼 기영이의 태도를 몸에 배게 하는 게 필요하겠더라.
배수빈 : 내가 집에 늘어져 있을 때를 생각하는 거지. 귀찮고 일하기 싫고 늘어지고 싶을 때 하는 행동을 기억해서 보여주는 거다. 다만 기영이는 그걸 극대화한 캐릭터라 재밌어 보이는 거지. 희한한 게, 머리를 이렇게 꼬불꼬불하게 하니까 계속 그렇게 되는 거 같다. 말투도 어눌해지고, 어리바리해지고. 걸을 때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보폭을 짧게 해서 자신감 없게 걷는다.

이런 역할은 거의 처음 아닌가.
배수빈 : 처음이지. 그런데 재밌다. 카타르시스가 있다.

안 한다는 걸 한다는 재미가 있겠다.
배수빈 : 그런 재미가 크지. 하지만 대본을 볼 때는 그걸 따지기보다는 그냥 재밌어서 한 거다. 내가 채울 여지가 많을 거 같았다.

채운다면 배수빈의 무엇을 투영시켰나.
배수빈 : 나 역시 사는 게 귀찮고, 나가기 싫고, 가끔 분위기 파악 못할 때도 있다. 기영이는 순박한 친구지만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을 거다. 그런 간극을 좁혀가며 나와 기영이를 하나로 만드는 거지.

지금은 간극이 많이 좁혀진 것 같나.
배수빈 : 첫 촬영하고 났더니 얘가 갑자기 쑥 들어오더라. 체육대회에서 배드민턴을 되게 못 치는 장면이었는데 그거 촬영하고 나서 ‘아, 얘는 이런 얘구나’ 싶더라. 그 다음부터는 연기하기도 편하고. 기영이에 맞춰 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상황도 재밌게 느껴지고.

“뭔가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KBS <드라마 스페셜>│배수빈 “이제는 단막극에 힘을 보태주고 싶다”
│배수빈 “이제는 단막극에 힘을 보태주고 싶다”" /> 이런 마이너하면서도 재밌는 캐릭터는 확실히 단막극에서 볼 수 있는 것 같다.
배수빈 : 그렇지. 단막극이라는 게 일종의 TV 영화 아닌가. 영화의 경우 분명 상대적으로 더 많은 금액과 시간을 투자하는데 단막극은 좀 더 짧은 시간 안에 기승전결이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TV가 가진 장점을 영화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사실 단막극을 굉장히 좋아했다. 보는 것도, 하는 것도. 내가 데뷔한 것도 MBC 이었고.

말한 것처럼 배수빈이라는 배우의 첫 인상을 ‘소림사에는 형님이 산다’로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등용문을 거쳐 현재 많은 지명도를 얻었고, 이번 ‘어서 말을 해!’는 배수빈, 김규리가 출연하는 작품으로서 눈길을 끈다.
배수빈 : 신인 때 단막극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면 이제는 단막극에 힘을 보태주고 싶은 생각이 있지. 그래서 이란 이름으로 부활했을 때 너무 반가웠던 거고. 사실 단막극이 어떻게 보면 이윤이 많이 날 수 없는 작업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한류, 한류 하며 드라마를 전 세계에 수출하는데 단막극이 없으면 그 한류를 만들 작가들을 등용할 문이 없다. 기존 작가들도 잘 쓰지만 그분들만으로는 다양성에 추구하기도 어렵고 어느 시점에선 한계에 부딪힌다. 계속해서 색다른 느낌을 가진 새로운 작가들의 가능성을 키워주는 자양분 같은 거라 본다. 단막극은.

사실 이렇게 경제 논리로만 따져도 단막극이 필요하다.
배수빈 : 그럼. 다 지금 활동하는 작가들이 신인 극본 공모를 발판 삼아 올라오신 건데. 기본적으로 창작자는 자기 걸 하고 싶은 욕심들이 있지 않나. 기성작가의 보조 작가나 이런 사람들이 가진 창작 욕구가 이런 걸 통해 채워져야 한다고 본다. 여러 면에서 단막극은 꼭 있어야 하는 장르다. 내가 아무리 톱스타가 되어도 좋은 시나리오가 있다면 단막극은 계속 하고 싶다.

또 단막극이기에 좀 더 쉽게 선택할 수 있지 않나. 를 막 끝내고 바로 이번 작품을 하는데, 단막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 같다.
배수빈 : 못했지, 단막극이 아니었으면. 그리고 12월부터 연극 들어가는 것도 있고.

심지어 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역할이었는데.
배수빈 : 육체적으로만 힘든 역할이었지. (웃음)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면, 정신적으로는 한 작품만 하다보니 다른 장르의 연기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이번 건 재밌게 같이 웃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게 된 거다. 1년 동안 몸에 박힌 패턴을 털어내는 의미에서도 내겐 좋은 작업이었다.

연극 들어가는 것까지 생각하면 정말 쉬지 않는다.
배수빈 : 내가 이렇게 쉬지 않고 일하는 이유가 있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최근 몇 해 동안 일을 쉬지 않고 했는데 무엇을 하던 배우지 않는 게 없는 거 같다. 몸이 연기를 못할 정도가 되지 않는 한, 정신적으로 연기를 원하지 않게 되는 한 일을 계속할 거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하려고 한다. 그게 나로서도 좋은 일이다. 배우로서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장점이 있고.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도전할 수 있는 장르나 캐릭터를 계속 해보고 싶다. 내가 안주하지 않을 기폭제가 되니까.

계획을 짜기보단 눈앞의 것들을 하나하나 열심히 하는 것 같다.
배수빈 : 계획은 없다. 계획을 세운다고 그것대로 가는 것도 아니고. 뭔가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만나는 작품들이 다양해질 수 있고. 나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무계획이다. 앞으로도 내가 봐도 재밌고 시청자분들도 공감할 내용이 있으면 가리지 않고 할 거다.

글. 위근우 eight@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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