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배우’라는 호칭을 받는 배우는 종종 있지만, 한번 부여받은 그 칭호를 계속 유지해가는 사람은 흔치 않다. 생애 잠깐 천재성을 보여주고 사라지는 많은 배우 사이에서 그 호칭을 계속 지켜가려면 재능이 녹슬지 않도록 꾸준히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용기와 명민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덕목을 지닌 살아남은 자들의 리스트에 류덕환이 있다. 그는 데뷔 이래 지금까지 또래 배우들이 쉽사리 도전하지 못 하는 캐릭터들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빌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모그래피에 대한 칭찬을 건네는 이에게 “키가 크거나 빼어나게 잘 생기지 않아서 트렌디한 작품을 못 했을 뿐”이라고 웃으며 말할 줄 아는 겸양도 갖췄다. 지닌 재능에 대해 좀처럼 과신하는 일이 없는 이 젊은 장인의 다음 행보가 어떨지 궁금해졌다. 지난 7일 탄현 스튜디오에서 OCN 를 촬영하고 있는 류덕환을 만났다. 밤샘 촬영에 피곤할 법도 한데, 사진 기자에게 “오히려 이 분이 더 배우 같아요”라며 농담조의 덕담을 하는 그는 극 중 쾌활하면서도 진지한 괴짜 의사 진우의 모습 그대로였다.촬영현장을 보니 대사 때문에 NG가 적지 않게 나더라. 혹시 따로 공부하는 부분은 있나?
류덕환: 그러지 않아도 의학용어 때문에 너무 어렵다. 미치겠다. (웃음) 따로 더 공부하는 건 없다. 작품 외적인 부분까지 공부하게 되면 거기에 갇혀 버릴 것 같아서.
“다층적인 면모를 가진 작품에 끌린다” 어떤 이유에서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로 새 작품을 택하게 되었나?
류덕환: 처음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때에는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라서 겁을 낸 것도 있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망설임 없이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만큼 끌렸던 작품이다. 희귀병을 다룬다는 소재적인 부분도 좋긴 했지만, 그뿐만 아니라 시나리오에 표현되어 있는 사람 사이의 정과 휴머니즘에 매료되었다. 그런 다층적인 면모를 가진 작품에 끌리는 것 같다.
이제까지 맡았던 배역들에 비해서도 는 혼자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크다. 천재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니까 부담이 클 법도 한데?
류덕환: 어떻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비중을 생각해보면 그건 영화 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짊어져야 하는 비중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다. 오히려 영화 현장에만 있다가 드라마 현장으로 오면서 느끼는 부담은 있다. 드라마 현장의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크다. 현장이 돌아가는 속도도 다르니까, 그 안에서 내가 배역과 100% 싱크로율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게 부담이 될 때가 있다.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장르적인 부분에서 < CSI 과학 수사대 >나, 같은 ‘미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류덕환: 참고는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드라마들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고 있었고,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겠구나 하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마저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혼돈이 올 것 같았다. 내가 정해 놓은 드라마와 한진우라는 캐릭터의 틀이 있는데 자칫 다른 작품을 참고하면서 그 틀이 깨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어찌 보면 자신감인데,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재범 작가님과 이야기가 참 잘 되었다. 서로 이야기한 부분들이 잘 맞아 있는 상태에서 추가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작가님은 참고하셨겠지만, 거기서 나까지 참고를 해 버리면 두 가지 다른 생각이 생기는 거니까,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를 준비하며 참고했던 작품은 없나?
류덕환: 기존 다른 작품에 나왔던 의사 캐릭터를 모방하거나 참고하진 않았고, 다만 예전에 봤던 작품 중에 인상 깊게 남았던 작품들은 있다. 처음에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일본 드라마 생각을 했고, 내가 그려낸 한진우라는 캐릭터가 에서 기무라 타쿠야가 맡았던 인물과 가장 흡사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조금은 있었다. 원래 천재가 아닌 데 사고로 인해 천재가 된 괴짜 뇌 전문가라는 설정도 좋았고. 주인공인데 항상 멋있고 진지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망가져야 할 때는 확실하게 망가져 주고 싸가지 없을 때는 확실하게 싸가지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쾌활한 캐릭터라는 점도 진우와 비슷하다.
“디테일은 내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 캐릭터를 빚어내는 데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어떤 면인가?
류덕환: 대사보다는 내 스스로가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행동들,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관찰한 행동들을 살리는 것에 더 중점을 뒀던 것 같다. 주어진 대사나 의학용어 자체를 내 마음대로 함부로 고칠 수는 없지만,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상의해서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추가한 요소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류덕환: 이를테면 아몬드를 계속 먹는 것. 진우가 앓고 있는 희귀병에는 아몬드가 좋다고 하니까 평소에도 꾸준히 섭취한다. 또 진우라는 캐릭터가 쾌활한 면과 진지한 면을 다 가진 캐릭터라서, 몸 개그라거나 익살스러운 대사를 소화해야 된다. 그런 진우의 말이나 행동이 자칫 잘못 하면 정신착란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게끔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도록 고민한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멀리 있는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했다”는 대사가 있다면 나 역시도 그 행동을 따라 하면서 대사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나만의 디테일을 만들어 가는 거다.
촬영 현장을 잠시 보니 본인 분량이 아닐 때도 진우 특유의 손버릇 같은 걸 멈추지 않더라.
류덕환: 디테일이라는 게 단순히 내가 이런 걸 추가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촬영현장에서 나올 수 없으니까. 주어진 대사를 하면서 그 대사를 치기 위한 움직임을 취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선택했던 디테일들이 다 사라지게 된다. 까먹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디테일들을 계속 살리려면 평소에 계속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반복을 통해서 캐릭터를 나의 타당성 안에서 계속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필모그라피를 보면 동년배 배우들에 비해 도전적인 배역을 많이 맡아 왔다. 이번 작품도 그런 선택의 연장인가?
류덕환: 사실 내 나이 대 배우라면 트렌디한 작품들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나이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얼굴이 그렇게 잘 생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웃음) 그런 역할들보단 스스로의 장점을 조금 더 소화할 수 있는 것들 위주로 선택하게 된다.
아쉬움은 없나?
류덕환: 나로서는 작품마다 좋은 배우들과 좋은 연출자들을 만나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좋을 뿐이다. (웃음)
글. 이승한 fourte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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