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과의 인터뷰는 늘 반전 드라마입니다. 이지적이고 과묵한 역할만 하던 배우가 알고 보니 이보다 더 활달할 수 없는 동물적인 유머감각의 쾌남이었다든지, 영화에서는 회칼을 휘두르며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올 듯 강렬하던 배우가 사실 날아가는 파리에도 깜짝 놀라는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지금 제 눈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보며 <10억>의 광기어린 장PD나 <작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황종구, <세븐 데이즈>의 껄렁껄렁한 형사 성열의 유전자를 추출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눈을 감고 들으면 더욱 좋을 중저음의 목소리는 녹음기 볼륨을 최대로 올려야 할 만큼 작고, 허세나 과장은 약에 쓰려고 해도 찾아보기 힘든 담백한 사람. 6월 24일 개봉하는 <맨발의 꿈>은 그런 남자가 나오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글은 정직한 ‘맨발’로 묵묵히 한길을 걸어온 배우 박희순의 ‘꿈’을 들어보는 2시간의 기록입니다.
100: 좀 마르신 것 같은데요? UN도 다녀오시고, <맨발의 꿈> 홍보하고 시사회 다니시느라 바쁘신가 봐요.
박희순: 아니에요. 저는 늘 이 정도인데 실재로 만나면 대부분 생각보다 말랐다고, 몸도 작다고 하시더라고요.
100: 아마도 영화 안에서 역할이나 배우의 느낌이 워낙 세고 큰 배우라서 인 것 같아요. 사실은 이렇게 착하게 생긴 얼굴인데 말이죠. (웃음)
박희순: 그러니까요!

“아역배우들에 비하면 방목 수준으로 촬영했다”



100: 처음 <맨발의 꿈>이라는 영화에 대해 들었을 때, 뭔가 선입견이 생겼던 게 사실이었어요. 축구 이야기라니 뭔가 월드컵 특수를 노린 영화가 아닐까 하는. 또 오지의 아이들과 그들을 세계무대에 서게 만드는 이국의 감독 이야기라니 뭔가 너무 순한 어린이 영화는 아닐까, 하는 오해 말이죠.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의외로 코믹한 부분도 많고 대중적인 재미도 꽤 쏠쏠한 작품이더라고요. 잔머리 쓰지 않고 한 눈 팔지 않고 우직하게 돌파해 나가는 느낌이랄까.
박희순: 시사 보신 분들은 다 재밌게 보시고, 감동 받아 우시고들 하는데 제가 워낙 안 유명한 배우다 보니 공중파나 유력신문에서는 별로 주목을 안 하시더라고요. (웃음)
100: 왜 그러세요. 그 많은 소녀팬들은 어쩌라고. (웃음)
박희순: 그동안 해왔던 작품들, 특히 대중적인 성공을 이룬 작품들에서 좀 세거나 강한 역할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이번엔 좀 사람 냄새나는, 착한 영화를 해보고 싶었어요.

100: <남극일기>에서 <10억>에 이어 <맨발의 꿈>까지, 필모그래피만 보면 외지촬영을 꽤 즐기는 배우인 줄 알겠어요.
박희순: 아, 전혀 안 그래요. 여행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인데! 어쨌든 자극적인 영화보다는 온 가족이 같이 볼 수 있는, 그러면서도 재밌는 영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그런 중에 <맨발의 꿈>을 만나게 된 거죠.
100: 게다가 이 시나리오에서 어딘가 흥행의 냄새를 맡으신 게로군요.
박희순: 잘만 만들면 괜찮을 거다, 라는 생각은 확실히 들었죠.

100: 하지만 김태균 감독님은 필모그라피를 봤을 때 딱 방향이 잡히는 감독은 아니잖아요. 완성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박봉곤 가출사건>에서 <화산고>로 <늑대의 유혹>에서 <크로싱>으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면에서요. 사실 배우들이 작품을 결정할 때 시나리오에 대한 확신도 필요하지만 결국 감독에 대한 믿음이 가장 큰 부분일 텐데 <맨발의 꿈>이 과연 어떤 날개에 실릴 작품인지 걱정되는 부분도 조금은 있었을 것도 같구요.
박희순: 과연 이 분의 정체가 뭘까, 그런 마음은 있었죠. (웃음) 하지만 일단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장점이 분명히 있다고 봤기 때문에 저로서는 더 믿음이 갔던 것 같아요. 다만 <크로싱> 쪽으로는 안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나, <크로싱>처럼 되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은 있었지만.(웃음).

100: 그런데 동티모르, 아이들, 유소년 축구단 같은 요소들이 다큐멘터리적인 터치로 흘러갈 가능성이 다분해 보이기는 해요.
박희순: 예 그렇죠. 추측 건데 시작할 때는 감독님이 이 영화 역시 <크로싱>처럼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의견 조율이 필요했어요. 감독님은 실제 주인공인 김신환 감독님의 캐릭터를 내가 그대로 옮겨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엄격하고 감정표현이 크지 않은. 그런데 저는 좀 생각이 달랐죠. 결국 감독님 숙소에 찾아가서, 이 영화가 충분히 진심을 담은 감동과 상업성을 동시에 가진 시나리오라고 봤다, 물론 실제 인물의 스타일이 있겠지만 나는 이 캐릭터를 약간 사기꾼 같기도 하고 좀 더 가벼운 톤으로 갔으면 좋겠다, 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죠. 감독님은 바로, 알겠다 당신하고 싶은 대로 하라, 고 하시더라고요.

100: 이후에 별다른 지적은 없으셨구요?
박희순: 지적은 커녕 이렇다 저렇다 조언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도통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고!
100: 기대 이상으로 잘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웃음)
박희순: 그게 아니라 저한테 신경 쓸 틈이 없었어요. 아역 배우들이 영화를 처음 찍어보는 상태였잖아요. 사실 이 친구들은 캐스팅 자체도 너무 힘들었고 연출부들이 촬영 들어가기 전에 엄청 고생을 했었다고 하더라고요. 몇 달에 걸쳐 계속 오디션을 해야 했고 결국 아이들에게 연기를 가르쳤다기 보다는 카메라 앞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될 만큼 연기를 놀이처럼 느끼도록 만들어야했으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거죠. 그러니 저는 감히… 그냥 알아서 해야지….

100: 연기 선생님까지 병행 하셔야했겠어요.
박희순: 그런 건 아니고, 이 친구들이랑 빨리 친해져야 하니까, 장난 많이 치고 그랬죠, 뭐. 그런데 영화에 대한 지식이나 개념이 있는 아이들이 아니니까, 아이들 위주로 촬영이 진행될 수밖에 없잖아요. 아이들이 따로 따로 50번을 나눠 찍으면 나는 그 50번을 전부 같이 뛰어야 하니까 와, 정말 힘든 거예요. 그러다가 어떤 녀석은 찍다가 막 화장실로 도망가고. 그래도 찍어야 되니까. 거의 다 찍으면 거의 100번 쯤? 그런데 대충할 순 없는 거예요.
100: 그런데 그 걸 두 달 반 만에 다 촬영하셨다고요?
박희순: 그러니까 감독님이 절 신경 쓸 틈이 없는 거예요. 그 친구들에 비하면 나는 아예 방목 수준이었죠. (웃음)

“아이들과 교감을 통해 오히려 배워가는 느낌의 영화”



100: 국내에서 찍는 영화와 달리 말하자면 몇 달간 거의 감금상태에 가깝게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요. 현실과 영화를 오가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지금의 일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영화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이란 게 훨씬 배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박희순: 이 영화를 찍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에요. 망원 카메라로 멀리서 찍기 때문에 사실 매번 찍으면서도 도대체 뭘 찍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많았어요. 오직 감독님과 카메라 감독님만 아는 거예요. 운동장에서 정말 땀 뻘뻘 흘리면서 몇 번을 뛰어다녀도 제가 한 번도 카메라에 안 잡히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100: 어쩌면 실제로 아이들과 비슷한 상황이 된 거네요.
박희순: 정신없이 뛰다가 모니터 화면 보면 거의 안 잡혔더라고. 이게 되는 건지, 어떤 게 찍힌 건지도 모르겠고.
100: 영화를 보면 머리색이 부분 부분 노란데 처음엔 캐릭터 때문에 염색을 하셨나 했는데, 동티모르 해가 머리가 탈색될 정도로 뜨거웠다고 들었어요.
박희순: 여기가 노래지기 시작하면 조금 있으면 저쪽이 노래지고 그래서 연결이 다 튈 수 밖에 없어요. 어휴- 기미가 완전 가득 끼었어요. 초반에는 현지인하고 좀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태양 아래 무방비 상태로 있었는데 결국엔 매니저가 양산을 들고 오더라구요.

100: 나름 `스포츠` 영화이고 설정 상 축구선수 출신으로 되어 있는데 풍문에 의하면 연기와는 달리 축구에는 그렇게 큰 소질이 없으시다는. (웃음)
박희순: 촬영 들어가기 전에 한 두어 달 연습을 하고 가긴 했는데 그게 참… 인조잔디에선 좀 했는데. (웃음) 그 흙바닥에서 하다 보니 어렵더라고요. 게다가 영화는 거의 다큐 수준으로 찍었으니까.
100: 실제로 축구하는 장면이 나오진 않는 거죠?
박희순: 찍긴 다 찍었는데 영화에는 다 편집되었더라고요.

100: 캐릭터는 좀 바뀌었지만 실재 모델이 된 김신환 감독에게서 따온 부분도 있으실 것 같아요.
박희순: 경기할 때나 연습할 때 아이들에게 지시하는 모습은, 감독하는 모습을 보면서 메모를 했죠. 또 한국어랑 그 쪽 말이랑 섞어서 하는 거 있잖아요. 그런 것도 김신환 감독님 스타일이고.
100: 사실 전반부에서는 그 괴상한 말의 향연에 완전히 뒤집어지게 웃었거든요. 동티모르어, 인도네시아어, 영어, 한국어가 같이 뒤섞이는 기묘한 광경이라니. (웃음)
박희순: 실제 김신환 감독님이 인도네시아에 살다가 이쪽으로 오셔서 인도네시아 말이 한국말에 자연스럽게 섞인 거죠.

100: 한국영화를 자막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박희순: 처음에 한국어로 된 시나리오만 주셨어요. 그런데 사투리 연기를 하더라도 어감, 억양이 조금만 이상하면 바보가 되는 건데 도저히 그 상태로는 못하겠더라고요. 대충은 알아들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애드리브라는 것도 즉석에서 한두 마디 나오는 게 아니니까, 결국 인도네시아 대본을 얻어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한국에서 인도네시아 말을 좀 배웠어요.

100: 말씀대로 그런 식의 언어사용이 가능하려면 단순히 대본을 외워서 되는 게 아니라 체화되어야 가능 할 것 같은데요. 언어를 빠르게 배우시나봐요.
박희순: 빠른 편은 아닌데, 인도네시아 말이 좀 많이 재밌더라고요. 입에 착착 붙기도 하고 아마 그래서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100: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았던 건 결국 오지 아이들을 세계무대에서 강팀으로 만든 다른 국적의 감독을 영웅화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아이들과 함께 조금이라도 삶의 의미를 찾는 어른의 성장담 이어서였던 것 같아요.
박희순: 아, 그런 진솔한 마음이 모든 관객들한테 전달되면 좋겠어요. 흥행성적을 떠나 이왕이면 진짜 많은 관객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감동을 작위적으로 짜내는 거짓말이 아니라, 이 아이들과 교감을 통해 오히려 배워가는 느낌의 영화였으니까요.

100: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전문배우도 아니고 완벽한 세팅 속에 이뤄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없지 않았을 것 같아요. 말하자면 극 중 김원광이 아니라 실제 배우 박희순 역시 그 오지에 떨어져서 아이들과 함께 촬영하면서 주인공 못지않은 심정의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박희순: 아이들이 영화에 젖어드는 걸 보면서, 나 역시 이곳 생활에 젖어들고 다 말하기 힘들 정도로 찡했던 순간이 되게 많았어요. 물론 아직 아이들이다 보니까 이 중에는 까부는 애도 있고, 말 그대로 악동도 있고, 여린 애도 있고 사랑스러운 애도 있죠. 애들이 가면 갈수록 점점 배우가 되서 자기 얼굴 잡힐 땐 잘 알고 열심히 하는데, 나 잡을 때는 뒤에서 장난치고 떠들고 킥킥킥 웃기도 하고요. 근데 그 작은 여자아이 조세핀은 뒤통수가 잡히는 순간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감정을 어찌나 진지하게 잡아주는지 너무 고마울 정도였어요. 어린이와 어른을 떠나서 배우 사이의 교감 같은 거랄까.

100: 아, 그 어린것이!
박희순: 네, 감동이었죠.
100: 오히려 말이 크게 안 통하니까 눈빛이나 몸으로 느껴지는 교감이 있었을 것 같아요.
박희순: 별말 안 해요, 매번 통역 불러서 할 수도 없고. 그런데 점점 말이 필요 없어지더라고요.

100: 물론 같은 작품을 하면 정이 들게 마련이지만, 프로 대 프로 배우들끼리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이 아이들과는, 촬영이 끝났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고 헤어진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정도 많이 들었을 것 같고.
박희순: 동티모르 촬영 끝나고 히로시마 촬영 때 전부 다 한국에 왔었는데. 작별인사 할 때 대성통곡을 하면서 우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특히 쟤들은 안 울거다, 했던 애들이 엉엉 우니까. 이 악동들이! 깜짝 놀랐어요.

“지금은 연극보다 영화에 우선을 두어야 할 시기”



100: 사실 10년 전만 생각하더라도 배우 박희순의 존재를 일반관객들이 알기는 힘들었던 게 사실이에요. 저 역시 영화기자를 하면서도 장준환 감독의 단편영화 <2001 이매진>에서 본 독특한 배우라는 이미지 정도만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지난 5, 6년 사이에 영화계에서 박희순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은 확실해 진 느낌이에요.
박희순: 극단 `목화`에서 12년 동안 연극을 하면서 난 이거 밖에 할 게 없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무대에 서는 게 그만큼 좋았으니까요. 그 때 만큼은 영화는 내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조심스러웠고. 그러다가 연극무대를 떠나서 진지하게 몇 년 간 오로지 영화만 했고 이제는 여기에 기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엔 연극배우는 늘 목숨 걸고 연기한다 하지만 영화 쪽 사람들은 그러지 않을 거다,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까 안 그렇더라고요.

100: 연극무대에서 영화로 떠난, 그리고 성공한 배우들이 많잖아요. 그런 배우들을 보면서 혹 약간 변절 같은 느낌을 갖거나 그렇진 않으셨어요?
박희순: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영화작업이라는 것이 과연 재미있을까, 예술로서 혼을 쏟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은 있었죠. 하지만 영화라는 것이 하면 할수록 그런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지고 있어요.

100: 흔히 연극배우 `출신` 이라는 수식이 고생한 과거, 혹은 연기력을 증명 할 수 있는 타이틀로만 이해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의 배우 박희순에게는 극단 `목화`는 과거형이잖아요.
박희순: 일 년에 영화 한 편, 연극 한 편 이렇게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데 일단 지금은 영화를 우선에 두고 있는 시기예요. 제가 시기를 조정할 만큼 영향력 있는 배우도 아니고, 그냥 하고 싶은 마음에 스케줄을 잡았다가는 양쪽에 다 미안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사실 연극을 한다면 연습기간도 많아야 되고.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있거든요. 이전에 (송)강호 형 같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저한테 이런 좋은 기회들이 주어진 거고, 영화란 게 30대 후반 40대 이 나이에 가장 활발히 할 수 있는 것 같으니까 이걸 놓치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는 거니까요. 연극엔 이미 12년이라는 시간을 바쳤으니까 지금 내 인생에선 영화를 열심히 해야 될 시기라고 생각해요.

100: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연기다, 라는 생각은 언제부터 하게 되셨나요.
박희순: 배우를 해야겠다, 하는 결심요?
100: 네, 보통은 어떤 계기 같은 게 있으시잖아요.
박희순: 그런 계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도 말도 별로 없고, 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그런 아이었는데 물론 친해지면 좀 다르지만. 어쨌든 이 판에 맞는 끼가 있는지 스스로도 몰랐다는 게 맞을 거예요.

100: 배우들을 인터뷰 하다보면 의외로 많은 분들이 그렇더라고요. 보통 생각하기에 배우들은 어릴 적부터 주체하지 못할 끼가 철철 넘쳐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박희순: 그저 많은 사람들 앞에 나와서 아, 내가 연기란 걸 걸 하고 있구나 느꼈던 건 아마도 대학 가서였던 것 같아요. 그 전에는 그저 학예회 수준이었고.

100: 어머니가 연극해서 먹고 살겠냐고 걱정하지는 않으셨어요?
박희순: 의외로 별 말씀 없으시더라고요.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어릴 때는 오히려 동생이 끼가 많았고 저는 정말 의외의 선택이었죠.
100: 본격적으로 연극이란 걸 하시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셨어요?
박희순: 예, 확실히 연극을 하면서 많이 적극적이 된 것 같아요. 2년 동안 총 여덟 작품 했으니까 쉬지 않고 한 거죠. 게다가 과대표도 하고… 인간이 바뀌어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바뀔 수가 없어요.

100: 뭔가 심경에 큰 변화가 있으셨던가요?
박희순: 없던 리더십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니고 오히려 묵묵히 뒤치다꺼리 잘 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어서였겠죠. 복학생 형들이 보기에도 얘는 말 잘들을 것 같으니까. (웃음) 그래서 일 잘하는 과대표였지, 리더십이 좋아서 대표를 했다거나 이런 건 아니었어요.
100: 극단 목화 시절에도 포스터 붙이는 일부터 스태프 일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일꾼이셨다면서요.
박희순: 머슴 체질이죠. (웃음)

“유독 기다리고 참아야 되는 과제들이 많이 주어지는 운명”



100: 이야기를 듣다보면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쭉 달려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매순간 열심히 살지만 삶이 흐르는 방향대로 크게 거스르지 않고 가는 사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희순: 예, 저는 그래요. 하지만 동티모르까지 가서도 뒤치다꺼리 할 줄은 몰랐죠. 주연이라고 해서 드디어 뭐가 되려나보다 했는데 결국 머슴이 되더군요, (웃음)
100: 게다가 한국말 되는 머슴!
박희순: 그러게요. (웃음)

100: 그런데 숫기 없는 소년이었고 현장에서 머슴처럼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이라는 건 내부적으로 아는 사람이나 알지, 일반적으로 배우 박희순을 생각하면 강렬한 이미지가 많잖아요. 스크린에서는 줄 곧 센 모습을 보여왔기도 하구요. 혹시 머슴 몸속에 그런 분노와 카리스마를 누르고 사시는 건 아니세요? 그나마 연기할 때라도 나와서 한풀이하고 있달까?
박희순: 아마도요. 원래 화를 잘 안내려고 하고 스타일인데 사람이 화나는 일이 왜 없겠어요. 그런데 그걸 참으니까 가슴이 아파요. 스트레스도 받는 것 같고.
100: 아하,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고 하늘이 배우가 되는 팔자를 주셨나봐요.
박희순: 연기 속에서라도 좀 지랄을 해라? 어쩌면요. (웃음)

100: 아직도 <2001 이매진>에서 존 레논으로 분하셨던 충격적인 헤어스타일이 잊혀지지 않네요. (웃음) 처음 시나리오 받았을 때 도대체 이게 무슨 영환가, 하지는 않으셨어요?
박희순: 일단 시나리오는 되게 재미있었어요. 한 일주일 촬영 했는데 짧은 시간 안에 해야 되니까 스트레스가 많았죠. 장준환 감독이 연출하고 봉준호 감독이 촬영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최고의 스태프로 찍은 영화였어요.

100: 그렇게 영화에 대한 맛보기를 본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일이 술술 풀려오지만은 않았잖아요, 오랫동안 답답했던 시기도 있었고. 연극에서 꽤 대접 받을 수 있는 배우인데 영화판에서는 그 가치를 몰라봐주고 비슷한 캐릭터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스스로 걱정도 있었을 텐데. 괜히 연극 그만두고 이 판으로 온 건 아닌가 고민하시진 않았나요?
박희순: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그런데 여기서 내가 약해져 버리면 계속 이쪽으로 밖에 안 풀릴 거 같아서 좀 기다렸죠. 한참동안은 들어오는 시나리오가 전부 다 악역에 조폭만 있었으니까요.

100: 그런데 실재로 만나면 어딜 봐도 거친 역할을 할 얼굴로는 안보이거든요. 너무 순박하게 생겼다면 모를까.
박희순: 처음 영화부터 어둠의 세계에서 시작을 하니까. (웃음) 계속 그렇게 풀렸던 것 같아요.

100: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만은 박희순 씨에게는 유독 참아야하는 상황이 많이 왔던 것 같긴 해요.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세븐 데이즈>만 해도 사실 개봉까지가 한 편의 드라마였잖아요. 촬영하던 배우가 바뀌고 영화 제목이 바뀌고 재촬영하고, 우여곡절이 정말 많았던 걸로 아는데 기다림의 시간이 장난이 아니었을 것 같아요.
박희순: 예, 그래도 이 작품이 나의 새로운 면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다 생각했으니까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또 중단이 되고 몇 번 이런 저런 상황들이 바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렸어요. 기다렸더니, 6개월 지나고 1년 다되어서 어쨌든 개봉하고 관객분들이 많이 좋아해주셨잖아요. 그러고 보면 문득 또 기다린 게, 잘한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그래요. 유독 나한테는 기다리고 참아야 되는 과제들이 많이 주어지는 운명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걸 참아낸 게 그나마 내가 지금 정도 자리 잡을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 같고요.

100: 기다림이나 인내가 미덕이었던 시절이 분명 있었지만, 지금은 자칫 미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시대잖아요. 오히려 약간은 이기적이고 영리하게 구는 것이 똑똑한 처세로 인정받는 세상이랄까. 그런 점에서 박희순 씨는 옛날 사람이군요.
박희순: 내가 조급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이미 이 길을 잘 닦아낸 선배들 덕인 것 같아요. 사실 뭔가가 싫으면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 있는데 말이에요. 고집도 꽤 있고 자존심도 세고.

“영화 안 할 때는 딱히 하는 일이 없어요”



100: 그래서인지 연극하던 박희순이 드라마에 그것도 꽤 독특한 장르의 KBS <얼렁뚱땅 흥신소>에 출연을 하신다고 했었을 때 또 한 번 놀랐던 것 같아요.
박희순: 사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고사했었는데 주변에 많은 분들이 정말 강력하게 추천하셔서 한다고는 했는데 걱정은 많았죠.

100: 시청률은 바닥을 쳤어도 그 드라마로 배우 박희순은 확실히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게 된 건 사실이거든요. <세븐 데이즈> 흥행도 같은 시기기도 했고. 여고생 팬들로 미니홈피가 북적였다는 소문이… (웃음)
박희순: 연극할 때도 대학로에서는 지나가다가 관객들이 알아보고, 안녕하세요, 이러면 깜짝 놀라요. 용기를 내서 온 건데. 너무 뻘쭘해 하니까, 그 정도에도 경기를 일으키던 사람었어요. 그런데 드라마는 그 빠르고 수많은 피드백이 놀라운 수준이더라고요.
100: 점점 익숙해지시나요, 유명인으로서의 삶이?
박희순: 아직도 그렇게 잘 알아보시진 않아요. (웃음)

100: 사람이란 게 대중적으로 알려졌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선택에 있어 스스로의 의지도 있지만, 남들이 이걸 바라지 않을까, 하는 고려도 하게 되잖아요.
박희순: 당연히 되죠. 근데 그걸 다 맞추려고 신경 쓰고 하다보면 못살아요. 제가 목마른 게 더 급한 거고, 그러니까 정말 새로운 걸 찾게 되죠. 모험이지만 도전해보고 싶은 거. 결국 제가 추구하고 싶은 걸 결국 관객들도 좋아할 것 같구요. 물론 새로운 걸 하고 싶어도 그게 대중들과의 만남이 잘 성사되지 않으면 그 이후 작품을 선택 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지니까 상업적인 성공의 중요성도 알게 된 것 같아요. 내가 상업영화인으로서 위치가 확고하지 않으면 작품선택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100: 포털사이트에 `박희순` 치면 연관검색어로 `박희순 결혼` 뜨는 거 아세요? 그만큼 많은 여성분들이 박희순 씨가 결혼을 했는지 궁금히 여기고 `품절남`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아요. (웃음)
박희순: 제가 성격이 원래 여자분들에게 먼저 말 잘 걸고, 감정 잘 표현하고, 그러지가 못해서 그래요.

100: 배우들에게 결혼을 한다거나 아이를 가진다거나 하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상황의 변화가 연기하는 데 있어서 차이를 가져올까요?
박희순: 주변을 봐도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래도 내년엔 여자친구를 만들겠다! 라고 생각은 하고 있어요. (웃음)
100: 그 말은 기사에 꼭 써드릴게요. 많은 여성분들이 아셔야 할 것 같으니까. (웃음) 다음 작품인 <혈투>도 이미 촬영이 끝난 걸로 아는데 지금 같은 시기엔 뭐하세요?
박희순: 딱히 하는 일이 없어요.

100: 취미도 전혀 없으세요?
박희순: 음악 듣고 영화 보는 걸 취미라 하면 안 되잖아요, 그건 직업인데. 그냥 뭔가 크게 가리는 것 없이 다 좋아해요.
100: 그렇게 부담 없는 성격이니까 주변 사람들은 편할 것 같아요.
박희순: 그러니까 자꾸 오지를 데려가는 거야!

100: 의외로 본인은 몸도 마음도 힘들 텐데, 천상 머슴이시네요. 그나저나 그럼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건 뭐예요?
박희순: 연기죠. 하하하하하.
100: 이런 결론이라니. 지루하기도 해라. (웃음)
박희순: 낯도 가리고, 진짜 편한 사람 아니면 말도 잘 못하는 성격인데, 연기만 시작하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지, 라고 느낄 정도로 신이라서 하게 되고, 너무 힘든 촬영을 해도 힘든 줄 모르는 걸 보면 이게 제일 재밌다는 것 외에는 표현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배우를 하고 있는 것 같고. 그나저나 이것보다 재밌는 게, 정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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