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까운 분은 빨리 떠나가는지
어릴 적 동화책을 읽다보면 어린 마음에도 납득이 안 되는 인물들이 있었어요. 신데렐라의 아버지나 콩쥐의 아버지, 헨젤과 그레텔의 아버지 같은 한심한 남자 어른들 말이에요. 얼마나 보는 눈이 없으면 그렇게 못돼 먹은 여자를 사랑할 수가 있는 건지, 그토록 천박하고 욕심 사나운 여자에게 왜 금쪽같은 자식을 맡기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러나 지난번 구대성(김갑수) 사장님께 펼치는 송강숙(이미숙) 여사의 ‘자전거 뒷바퀴 차기’ 같은 화려한 기술들을 목격하고 나니 그제야 비로소 요부의 유혹에 홀랑 넘어가는 남자의 심정을 알 듯도 하더군요. 딸 하나 키우며 지내온 외로운 세월, 인적 없는 시골 밤길에 미모의 여인네가 몸 바쳐 들이대는데 어느 누군들 안 넘어가고 버틸 수 있겠습니까. 자애롭고 현명하신 구대성 어르신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 거죠.
참으로 대단하신 어르신입니다
왜 아까운 분은 빨리 떠나가는지
그럼에도 어르신을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게 “사랑해서가 아니라 뜯어 먹을 게 있어 산다”는 송 여사의 속내를 알게 된 후에도, 은조(문근영)에게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내가 네 엄마를 더 사랑하기에 괜찮다”고 하셨죠. 단단히 빗장이 걸려있던 은조의 마음이 그 말씀으로 무장해제 되었구요. 은조가 엄마에게 “효선이 아버지에게 못할 짓 하면 내가 엄마 대신 지옥 갈 거야”라고 경고까지 했다는 거 모르셨죠?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가뜩이나 건강도 나빠지신 마당에 의지가지없는 효선(서우)이의 앞날을 걱정하신다면 화근덩어리 송 여사를 그리 방치하셔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싶더라구요.
하지만 제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구대성 어르신은 동화책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아버지들 같은 분이 결코 아니셨어요. 급작스레 세상과 이별하셨지만 이미 딸 효선이를 위한 장치 여럿을 든든하게 갖춰놓으셨더군요. 어르신께 죽는 날까지 갚아도 모자랄 빚이 있다고 여기는 은조는 필경 효선이를 위해, 대성도가를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칠 겁니다. 강퍅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사랑이란 게, 가족이란 게 무엇인지 알게 해준 어르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꼭 빼어 닮은, “다 알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효선이를 위해서라면 몸이 부서진다 한들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그뿐인가요. 매일 삼천 배씩 절하는 마음으로 두 자매를 보살펴주겠다는 기훈(천정명)이도 있죠. 아저씨처럼, 아저씨 대신 죽을 때까지 효선이를 돌봐주겠다 다짐을 했으니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래서 은조를 마음에서 몰아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우는 기훈이를 보며 저도 따라 울었습니다. “저는 아빠한테 칭찬 받고 싶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라며 창자가 끊어질 듯 울던 은조도 안쓰러웠지만 은조를 끝내 포기해야만 하는 기훈이가 저는 왜 그리 딱한지요.
대성도가의 아이들을 지켜봐주세요
왜 아까운 분은 빨리 떠나가는지
기훈이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어르신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괜찮아”라는 한 마디를 평생 못 잊지 싶어요. 기훈이가 대성도가를 망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걸 알게 되셨음에도 기훈이를 믿기에 괜찮다며 안심시키시고 눈을 감으시는 걸 보며 ‘참된 어른으로 살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버렸던 자식을 다시 불러들이는가 하면 자식들 간에 이간질까지 서슴지 않는 기훈이 아버지 같은 못난 어른으로 살 것인지 구대성 어르신 같은 참 어른으로 살 것인지, 그건 각자 마음먹기 나름이겠죠. 어쨌거나 분명한 건 아까운 분일수록 빨리 세상을 떠나신다는 겁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장 달려가 조언을 구하고 싶은 어르신의 부재가 생판 남인 저조차도 이리 서운한데 대성도가의 아이들은 얼마나 허전할까요. 대성도가라는 이름 아래 모인 그 아이들이 어르신의 뜻을 잇고자 힘을 합할지, 아니면 애증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질지 아직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자란 아이들이 경거망동할리는 없다고 믿어요. 혹여 그네들의 마음이 흔들릴라치면 지금처럼 가끔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