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서 윤계상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오롯이 눈빛과 표정과 몸으로 이야기하는 그를 보면서, 그의 눈이 삼백안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눈 아래쪽 흰자가 더 많이 보이는 이 눈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관상학은 고집이 세고 승부욕이 있고, 반골 기질을 가졌다고 말한다. 적어도 배우 윤계상은 그런 것 같다. 한편, 인터뷰이로 만난 34살 남자 윤계상은 MBC 의 윤필주처럼 친절하고 사려 깊게 웃는다. 어떤 질문에도 주저함이 없고 솔직하게 말하는 태도, 기술에 앞서 스스로를 내던져야 진짜 연기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8년의 시간까지 배우 윤계상은 홈런을 맞을지언정 미트 한 가운데로 직구를 던지는 남자다. 윤계상은 배우가 된 뒤 평탄하지 않았던 시간을 거쳤고 지금 과 를 통해 의미 있는 전환점을 맞았다. 하지만 쉽게 들뜨거나 환호를 만끽하기보다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잣대를 거두지 않는 이 고집 센 남자가 윤필주처럼 상냥한 목소리와 풍산처럼 단호한 표정으로 던진 직구 같은 이야기를 여기 옮긴다.는 재미있는 지점과 이상한 지점이 분명해서 평이 갈릴 것 같은 영화다. 분명한 점은 평범한 영화는 아니라는 건데, 스스로는 어떤 영화인 것 같나.
윤계상: 기존의 영화랑은 차별화가 된다. 웃음 코드의 포인트가 좀 색다른 거 같다. 보통 영화에서 예상되는 웃음 코드나 웃기려고 하는 신이 있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은 신들이 웃기게 보이는 게 매력인 것 같다. “키스야? 인공호흡이야?” 같이 너무 뻔해서 생략하는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대사로 해버리니까 웃기는 거지. 당연해서 생략할만한 뻔한 상황을 대놓고 이야기하고, 그 와중에 배우들은 또 굉장히 진지한데 그걸 유치하지 않게 잘 버무린 것 같다. 그리고 기존의 남북 문제를 다룬 영화나 히어로 영화의 편견을 깨는 게 재미있다. 마냥 한 쪽 편을 들거나, 멋있고 영웅적인 모습만 보여주는 게 아니니까.
“결국 감독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스타일”
그렇게 유머러스한 상황에서 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했어야 했다. 한 마디의 대사도 없지만 엄청나게 집중해야 하는 연기였다.
윤계상: 풍산이 갖고 있는 부분은 표정과 행동이 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 하나 다 계산하고, 그걸 감독님이랑 계속 상의했다. 대사라는 무기가 없으니까 눈빛과 몸, 액션에 대한 디테일을 진짜 많이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윤계상: 눈빛의 정도지. 이렇게 이야기하면 가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풍산처럼 눈에 힘을 줬다가 푼다, 일동 웃음) 간단하게 얘기하면 더 째려보거나 더 확 내보이거나 눈빛의 흔들림이거나 그런 걸 다 계산한 거다. 이게 말로는 쉬운 것 같은데, 진짜로 표현하는 건 어렵다. 이런 디테일을 잡지 못했으면 후반부에 풍산의 행동에 대한 설득력이 모두 무너졌을 거다. 그걸 계속 잡아 낸 전재홍 감독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고 본다.
의 시나리오는 어떤 점에 끌렸나.
윤계상: 배우들은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연기를 할 때 설렌다. 어떤 조건이냐, 어떤 제작여건이냐 하는 것도 관심이 있지만 그런 시나리오가 들어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용기가 되고 힘이 된다. 그런데 가 그랬던 것 같다. 연기변신을 해야 되는 타이밍이었고,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어떻다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한 발자국 더 갈 수 있지 않나 싶었다. 노 개런티니 뭐니 그런 건 상관없었다. 결국 이 작품은 분명히 나한테 큰 힘, 재산이 될 거라고 믿었다.
풍산이 한마디라도 말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의 정체성이 드러나니 그러지 말라는 감독의 디렉션을 결국 따랐다고 들었다. 어떤 장면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나.
윤계상: 나는 되게 단순하게 다가갔다. 이 작품은 남북 간의 관계도 포함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내가 책임질 부분은 인옥이(김규리)와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감정이 잘 표현될까 불안했다. 둘의 사랑이라는 감정이 너무 갑작스럽게 이루어지고, 풍산이 영화 후반부에서 인옥을 위해 하는 행동들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한 번은 표현을 해야 되지 않나 싶었다. 인옥이라는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그게 표현이 될 것 같은데 감독님은 이 영화는 결코 멜로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극구 말리셨다. 그래서 따랐는데 그게 맞았던 것 같다. 특히 나는 아직 연기에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항상 의심한다. 한편으로는 배우이기 때문에 항상 더 가고 싶어 한다. 우는 장면이면 끝까지, 막 울다가 기절할 정도로 가고 싶고, 감정을 분출하고 싶어 하니까. 그걸 조율해주는 게 바로 감독의 역할인데, 그걸 잘 해주신 것 같다.
기본적으로 감독에 대한 신뢰가 큰 편인 것 같다. 배우로서 자기를 먼저 믿는 배우들도 있는데. 연기를 시작한 영화 에서 변영주 감독과 작업한 게 영향을 준 것 같다. 독하게 밀어붙이고 그 과정에서 진짜 감정을 끌어내는 분이셨다고 들었다.
윤계상: 맞다. 교육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부터 어떤 말을 먼저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자라는지 정해지는 것처럼. 나도 연기를 처음에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감독님을 믿는다. 사실 연기를 하다 보면 연출에 욕심이 생긴다. 내 연기의 연출을 내가 하니까. 점점 영화 전체를 보는 눈도 생기고. 특히 나는, 신인 배우들에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주인공으로 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주인공을 두, 세 번 하다 보면 연출 욕심이 나는데 그 때 그걸 드러내고 영화 전체를 좌지우지 하려고 흔드는 순간에 망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풍산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기 때문에 결코 객관적일 수 없거든. 그게 영화에 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참고 있다. 어떤 작품인지, 감독님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두 다르지만 결국 감독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스타일이다.
“진짜가 아니면 표현을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풍산은 배우의 해석이 필요한 캐릭터이지 않나. 많은 게 설명되지 않고, 이야기한 것처럼 보여줄 수 있는 무기가 없으니까. 기본적으로 ‘유령 같은 인물’로 설정이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계상이 만들어낸 풍산은 눈빛만으로도 분명히 ‘살아 있는’ 존재로 느껴졌다.
윤계상: 유령 같은 존재라는 의미는, 영화 전체에서 풍산이 갖고 있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 사람이 발도 안 움직이고 떠다니면 귀신이지. (웃음) 영화에서 필요한 풍산의 이미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라는 부분이 형상화되는 동시에 분명히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 영화는 망하겠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한편, 누군가를 보호하는 영웅적인 면이 있는데 그 행위의 목적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보여 져야 했다. 어떤 사람인 것 같나?
그게 궁금했다.
윤계상: 그게 맞는 거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게 풍산의 이미지인 거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갖고 있어야만 이 영화가 쭉 갈 수 있다. 불사신처럼 휴전선을 넘나든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실적이지 않지 않나. 이산가족의 아픔을 눈앞에서 보지만 결코 의식하지 않고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냥 기계적으로 전달할 뿐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풍산이 사랑을 하고 복수를 하고, 그렇게 유령 같은 아이가 점점 사람이 되어가는 거다.
그래도 캐릭터를 받아들였을 때 얘는 몇 살일까, 과거는 뭐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윤계상: 당연히 추적에 들어가지. (웃음) 계속 어떤 사람일까, 몇 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는 걸 다 따지고 싶다. 그런 디테일이 캐릭터를 형상화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니까. 나도 감독님한테 물었는데 “존재 조차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시작이 되어야 관객들도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셔서 나도 단순하게 가자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의식하고, 답을 내리면 내가 흔들리는 지점이 있을 거고 그게 분명 어색하게 보일 것 같았다.
엄청나게 추운 날씨에, 상당히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을 했다. 그렇게 연기를 한 스스로에 대해서 굳이 평가를 내린다면.
윤계상: 그 여건에선 최고였다. 진짜. (웃음) 25회 차를 거의 매일 밤을 새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 했으니까. 하지만 또 그렇게 뽑아내신 게 그건 감독님의 역량이고 같이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 스태프들이 모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지. 솔직히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지만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지 않나. 편집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디테일하게 모든 것을 보고 다 만드신 거니까 내가 잘해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리 고문을 받아도 말을 하지 않던 풍산이 인옥이 죽을 위험에 처하자 정말 짐승같이 울부짖지 않나. 그 순간은 어떤 기분이었나.
윤계상: 고민을 진짜 많이 했다. 대사라고 할 순 없지만 처음 소리를 내는 부분인데 굉장히 날 것같이, 칼 같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어떤 소리를 내야 할 지 제일 궁금했던 것 같다. 규리 씨도 궁금했는지 “오빠, 어떻게 하실 거예요?”라고 물어서 “기다려 봐요. 내가 좀 몰입이 되면…” 이라고 하고. (웃음) 결국 진짜 생짜로 했다. 그 후로 목이 쉬어서 일주일 동안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였는데, 풍산의 사랑은 그게 다가 아닌가 싶었다. 거기서 시작이 되고 모든 것의 발단이 되는. 참아왔던 모든 것들을 내보여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또 하라고 하면 절대로 못 한다. 그건 진짜 몰입이거든. 그런 장면이 영화마다 한 부분씩 있는 것 같다. 의 엔딩신도 그랬고, 의 칼로 찌르는 신도 그랬고. 연출이 불가능한 부분인데 그냥 나를 믿고 몰입하면 비스무리하게는 나오지 않나 싶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영화를 보는 그 순간에 몰입을 해도 시간이 지나고 다른 영화를 보면서 흐려지고 옅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순간을 직접 체험한 배우는 그게 몸에 남아 있다가 순간순간 맥락 없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윤계상: 그럼. 그건 진짜니까. 그건 연기가 아니니까. 물론 부분적으로 디테일하게 스킬을 갖고 연기를 하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절대 연출이 안 되는, 진짜가 아니면 표현을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 장면들은 기억에 남지. 그 장면들을 볼 때마다 희열을 느낀 적도 있고, 한편 너무 진짜니까 창피한 적도 있다.
“체면이 날 먹여 살리는 건 아니니까” 뭔가 벌거벗겨진 느낌일 것 같다.
윤계상: 그렇지. 그게 다니까. 완전히 최고조니까.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이 휴전선을 장대로 넘는 부분이다. 에 대한 여러 평 중 ‘윤계상 연기의 장대높이뛰기’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그 표현이 굉장히 적확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지금까지의 과거, 커리어를 어느 순간에 확 뛰어넘는 느낌이었다.
윤계상: 너무 극찬인데? 그 정도는 아니다. 정말 윤필주를 잘했나? 왜 이렇게 다들 호의적이지? (웃음)
주인공으로 연기를 시작해서 신인 배우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말도 했지만, 그게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아이돌이 연기를 하는데 워낙 보편적이고 그런 동료도 많지만 당시에는 앞서서 끌어주는 사람도,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도, 방향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을 것 같다. 그걸 혼자 힘으로 헤쳐 오면서 힘든 시간이 많았을 텐데, 그런 것들을 이 사람이 이 순간에 뛰어 넘는구나 싶었다.
윤계상: 어휴, 고맙다. (웃음) 어떤 부분에서는 편견과 싸우는 것이었는데, 지난 시간은 정말 외로운 싸움이었다. 어떻게 해도, 어떤 방식으로 해도 되지 않는. 내가 서른네 살이 되고, 이를테면 연륜 같은 것도 좀 생기고, 그런 여러 가지가 겹쳐지면서 된 것이지 장대높이뛰기처럼 실력이 갑자기 뛴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나 연기는 할 수 있다.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카메라만 의식하지 않으면 일반 사람들도 다 연기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얼마나 진정성 있게 다가가느냐 인데 그걸 한 번도 놓치지 않은 것 같다. 주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운이 좋아서 그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솔직히 가 이 정도로 이슈가 될 수 있을지 몰랐는데, 의 윤필주 덕분에 얻은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이건 운인 것 같다. 이 영화를 드라마 찍기 한 4개월 전에 찍었는데 동시에 보이니까 그 시너지 효과가 큰 것 같다. 만 보였으면 가능한 애가 가능한 연기를 했다 정도로 받아들였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왠지 윤필주가 그런 연기를 한 것 같으니까 어이가 없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거지. 맨날 손목 잡아주던 한의사가 머리 짧고 수염 있는 근육남의 얼굴을 보이니까. (웃음)
하지만 운은 언제 올지 모르는 거지 않나. 그 운이 올 때까지 편견과 싸우면서 의지를 놓지 않고 가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윤계상: 정말 외로운 싸움인데, 태생이 고집이 굉장히 세고 지는 걸 싫어한다. 되게 유하게 생겼지만 절대 그렇게 부드럽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미 시작을 했고, 이게 내 거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그런 편견과 싸우는 과정에서 막 헛소리도 하곤 했지만, 몰라서 실수를 했고, 그러면 또 사과를 하고 그렇게 해왔다.
그러기 쉽지 않은데, 사과를 되게 스스럼없이 하더라.
윤계상: 몰라서 한 실수니까. 체면이 날 먹여 살리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나아가면서 부끄럽지 않았던 건 그게 진짜 내 마음이었으니까. 끝까지 들키지 않는 거짓말은 결코 할 수 없다, 사람은. 그럴 바에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솔직하게 다가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같은 저예산 영화를 하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거니까. 그런데 지금은 운이 너무 좋아서 좀.
무서운가?
윤계상: 그렇다. 연기의 달인처럼 포장이 되고 있는 것 자체가 좀 그렇다.
반대로 지금까지 너무 운이 없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윤계상: 아니, 아니다. 나는 진짜, 우리나라에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기하는 게 등수를 매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자기만족이라는 게 있으니까.
인터뷰,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인터뷰. 윤이나(TV평론가)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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