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판정을 받으신 후에도 “우물을 파다 말고 왔는데, 약도 그대로 쌓여 있는데……”라며 크게 낙담하셨다죠? 그리고는 이미 전신으로 암이 퍼진 급박한 순간임에도 수단으로 돌아가길 극구 고집하셨다고 하던데 그 심정, 백번 천 번 공감이 가고 남습니다. 왜 아니 그러셨겠습니까? 남겨놓고 오신 한 명, 한 명이 모두 자식과 같이 소중한 존재이거늘 어찌 수단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러나 불과 일주일 뒤 열린 톤즈 고등학교 신축 후원금 모금을 위한 작은 음악회에서는 심란한 기색이라곤 없이 편안한 얼굴이셨어요.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들려주신 ‘이태석과 신부들’의 ‘꿈의 대화’는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세시봉 공연 못지않게 감동적이었습니다. 노래도 좋았지만 신부님의 담담한 듯 환한 웃음이 내내 가슴에 남더군요. 진실한 믿음으로 삶을 신뢰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과 맞닥뜨리더라도 흔들림이 없다고 하던데 과연 신부님은 보통 분이 아니셨던 겁니다.
신부님께서 아이들이 울기를 원했을까요? 열여섯 차례나 되는 힘든 항암 치료 중에도 수단 어린이들을 위해 라는 책을 출간하셨나 하면 톤즈의 열악한 실상을 어떻게든 알리고자 백방으로 애를 쓰셨다고 들었어요. 타계하시기 한 달 전엔 손수 악기를 가르치고 이끌던 브라스 밴드의 한국 유학을 주선하기도 하셨다니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톤즈에 쏟아 부으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결국 톤즈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신 채 마흔 여덟이라는 짧은 생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저 역시 수단의 한 외국인 수사님처럼 하느님께 진심으로 묻고 싶더군요. 왜? 왜 하느님은 아까운 분들마다 죄다 일찌감치 데려가시는 걸까요?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 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다.” 이 같은 말씀을 남기신 바 있으니 결코 그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으셨을 게 분명한데 왜 주님께서는 마음 속 약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신 걸까요.
신부님이 떠나신 후 그 애지중지하시던 브라스 밴드의 지원도 끊겨 버렸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보시던 병원은 황량하기만 하더군요. 하기야 어느 누가 신부님처럼 지상에서 가장 빈곤한 이들을 위해 삶을 기꺼이 바칠 결심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더욱 가슴 아픈 일은, 한국에서 취재를 온 제작진이 신부님의 투병 과정과 장례식 운구 행렬이 담긴 동영상을 브라스 밴드 단원들에게 보여주며 아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사실이에요. 긴가민가하며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을 아이들에게 굳이 그처럼 신부님의 부재를 확인시켜 상실감을 안겨줘야만 하는 건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더라고요. 부지불식간에 너무나 많은 걸 잃은 아이들이잖아요. 그런 아이들을 흐느끼게 해놓고는 눈물 흘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수단 사람들에게 눈물을 가르쳐줬다고 하고 있으니 원. 설마 신부님께서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길 바라실 리 있습니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렵니다 저는 측은한 아이들을 울려버린 제작진이 야속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다 못해 ‘아이들의 충격은 생각보다 커보였다’라는 내레이션을 덧붙이는 걸 보며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어요. 어깻죽지가 축 쳐진 채 ‘사랑해’를 연주하고 우리나라 말로 노래를 부르는데 가슴이 미어지더라고요. 아이들이 더 밝게, 더 바르게 크기만을 바라셨던 신부님의 뜻을 이보다 거스를 수 있는 것이냐고요. 하기야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어두운 기색 한번 보이지 않으셨던 신부님께서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걱정하셨다는 신부님 어머님의 회한어린 눈물까지 우리는 봐야만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신부님께서도 언짢으셨지 싶어요. 그런 걸 보면 사람이란 게 참 모질고 이기적이에요.
그나마 다행히도 신부님의 주선으로 한국으로 유학을 온 학생들이 신부님 모교인 인제 의대에서 의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닦아두신 터전을 맡아줄 인재들이 이 나라 이 땅에서 쑥쑥 커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도 신부님 곁에서 듣고 배웠으니 늦은 밤이라 할지라도 환자를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테고, 뿐만 아니라 두 번 문을 두드리게도 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살면서 앞이 꽉 막힌 듯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럴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그 사랑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번져 세상을 바꿔가겠죠? 신부님과 신부님께서 사랑해마지 않았던 제자들처럼 말이에요. 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와 사진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
신부님께서 아이들이 울기를 원했을까요? 열여섯 차례나 되는 힘든 항암 치료 중에도 수단 어린이들을 위해 라는 책을 출간하셨나 하면 톤즈의 열악한 실상을 어떻게든 알리고자 백방으로 애를 쓰셨다고 들었어요. 타계하시기 한 달 전엔 손수 악기를 가르치고 이끌던 브라스 밴드의 한국 유학을 주선하기도 하셨다니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톤즈에 쏟아 부으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결국 톤즈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신 채 마흔 여덟이라는 짧은 생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저 역시 수단의 한 외국인 수사님처럼 하느님께 진심으로 묻고 싶더군요. 왜? 왜 하느님은 아까운 분들마다 죄다 일찌감치 데려가시는 걸까요?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 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다.” 이 같은 말씀을 남기신 바 있으니 결코 그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으셨을 게 분명한데 왜 주님께서는 마음 속 약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신 걸까요.
신부님이 떠나신 후 그 애지중지하시던 브라스 밴드의 지원도 끊겨 버렸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보시던 병원은 황량하기만 하더군요. 하기야 어느 누가 신부님처럼 지상에서 가장 빈곤한 이들을 위해 삶을 기꺼이 바칠 결심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더욱 가슴 아픈 일은, 한국에서 취재를 온 제작진이 신부님의 투병 과정과 장례식 운구 행렬이 담긴 동영상을 브라스 밴드 단원들에게 보여주며 아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사실이에요. 긴가민가하며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을 아이들에게 굳이 그처럼 신부님의 부재를 확인시켜 상실감을 안겨줘야만 하는 건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더라고요. 부지불식간에 너무나 많은 걸 잃은 아이들이잖아요. 그런 아이들을 흐느끼게 해놓고는 눈물 흘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수단 사람들에게 눈물을 가르쳐줬다고 하고 있으니 원. 설마 신부님께서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길 바라실 리 있습니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렵니다 저는 측은한 아이들을 울려버린 제작진이 야속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다 못해 ‘아이들의 충격은 생각보다 커보였다’라는 내레이션을 덧붙이는 걸 보며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어요. 어깻죽지가 축 쳐진 채 ‘사랑해’를 연주하고 우리나라 말로 노래를 부르는데 가슴이 미어지더라고요. 아이들이 더 밝게, 더 바르게 크기만을 바라셨던 신부님의 뜻을 이보다 거스를 수 있는 것이냐고요. 하기야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어두운 기색 한번 보이지 않으셨던 신부님께서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걱정하셨다는 신부님 어머님의 회한어린 눈물까지 우리는 봐야만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신부님께서도 언짢으셨지 싶어요. 그런 걸 보면 사람이란 게 참 모질고 이기적이에요.
그나마 다행히도 신부님의 주선으로 한국으로 유학을 온 학생들이 신부님 모교인 인제 의대에서 의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닦아두신 터전을 맡아줄 인재들이 이 나라 이 땅에서 쑥쑥 커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도 신부님 곁에서 듣고 배웠으니 늦은 밤이라 할지라도 환자를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테고, 뿐만 아니라 두 번 문을 두드리게도 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살면서 앞이 꽉 막힌 듯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럴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그 사랑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번져 세상을 바꿔가겠죠? 신부님과 신부님께서 사랑해마지 않았던 제자들처럼 말이에요. 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와 사진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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