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테마가 없어요. 영화 보는 데 있어선 잡식가죠. 고전영화도 좋아하지만 현대 영화, 독립 영화, 아방가르드까지 무작위로 보고 무작위로 느낍니다.” 12년 경력의 배우이자 촉망받는 감독인 유지태는 소문난 영화광이다. 로버트 할트만의 지적이고 냉소적인 조크를 좋아하는 한편 팀 버튼의 기괴하고 장난스러운 상상력 또한 숭배해마지 않는 유지태의 취향은 한 가지로 수렴되지 않는 그의 필모그래피와도 닮았다. 지독한 성장통을 겪는 스무 살로 등장했던 껑충한 청년(<바이준>)은 그 여린 눈빛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유소를 습격하는 페인트(<주유소 습격사건>)로 하이킥을 날렸다. 뒤이은 그의 대표작들도 공포와 멜로, 대중영화와 작가주의 영화를 바쁘게 오갔다. 유지태는 무선 통신기를 사이에 두고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는 순정파였다가도(<동감>) 난도질이 난무하는 <가위>에서 날선 눈빛을 쏘아대곤 했다. 또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통해 한국영화계에서 자신만의 이름값을 가진 감독들의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영화적 리얼리티와 메이킹”을 배운 유지태는 이제 배우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솔직히 어렸을 때는 제 꼴을 무시한 영화를 했어요. 하지만 이제 30대에 들어섰으니까 제가 잘 할 수 있는 걸 해보려구요. 배우 유지태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남의 영화를 보듯이 절 냉정하게 평가하게 되더라구요. 유지태라는 배우를 생각하면서 그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게 뭘까 궁리하다보니 멜로 영화라는 답이 나왔어요. 목소리도 그렇고 살이 안 쪘을 때 몸에서 나오는 야리야리함도 그렇고. 이런 것들이 멜로와 어울리는 거 같아요.”

배우로서 자신이 가진 점들을 얘기할 때 유지태는 철저히 타자가 된다. 마치 그를 캐스팅하려는 감독처럼 한 발 떨어져 자신의 장단점을 평가한다. 그렇게 자신을 냉정하게 관찰할 수 있는 눈은 감독으로서 여러 편의 단편들을 연출하며 더 깊어졌다. <자전거 소년>,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등이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사실을 제쳐두더라도 그가 만드는 영화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감독 유지태는 “영화 만드는 것 자체를 숭고하다고 여기고 거기에 인생 모든 걸 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관객으로서 유지태의 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중함이 더해져 지루해지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은 중독된 자의 특권일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건 마약과 같아요. 배우는 소통이 잘 됐을 때 쾌감을 느끼는데 감독은 그냥 영화를 완성시킨 것 자체로 다 쏟아낸 느낌이거든요. 비교가 안 되는 쾌감이에요.” 그래서 유지태는 지치지 않고 연기를 하고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본다. 다음은 그렇게 그가 사랑하고 때로는 질투하며 닮고 싶은 감독들의 영화들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 영화들 안에서 유지태라는 감독이자 배우인 영화광이 만들어갈 영화의 원형을 만나게 될 것이다.




1. <환상의 빛> (Maborosi)
1995년 | 고레에다 히로카즈

“처음엔 허우샤오시엔을 따라하는 습작이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에게 헌정하는 의미였기도 했구요. 그런데 영화를 보다가 감독의 디테일에 깜짝 놀랐죠. 중간 중간 벌떡 일어나서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로. 여주인공이 걸레질을 하는 사소한 모습까지도 달랐어요. 또 아사노 타다노부의 짧고 굵은 명연기도 인상적이었죠. 특히 죽기 전의 표정이 정말 좋았죠. 왜 저렇게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저 사람 배우 맞아? 이러다가 죽기 직전의 얼굴인 걸 파악하고 나선 저 배우는 정말 뛰어나단 걸 느꼈죠.”

누구보다 잘 알고 가깝다 믿었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평화로운 결혼 생활을 하던 유미코(에스미 마키코)는 전남편의 자살로 고향을 떠나고 재혼 후 돌아온 그곳에서 죽은 남편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발견한다. 삶과 죽음으로 이뤄진 일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감독의 깊은 눈이 인상적이다.



2. <크리스마스 악몽> (Tim Burton`s The Nightmare Before Christmas)
1993년 | 헨리 셀릭

“팀 버튼이 만든 영화들은 그의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이죠. 그중에서도 팀 버튼의 기초적인 발상에 가장 가까웠던 게 애니메이션이 아닌가 싶어요. 특히 <크리스마스 악몽>은 저의 어린 시절과 비슷해서 기억에 남아요. 감독이 어릴 적,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에 혼자 공포영화 보던 기억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저도 크리스마스에 혼자 심심하게 지냈거든요. 처음 복지에 관심을 가진 계기도 12월 25일에 심심한 아이들과 만나서 재밌게 놀고 싶었단 것이었죠. (웃음) 그래서 눈 감고 전화번호부에서 찍은 곳에 가기 시작하면서 매년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보내고 있어요.”

디즈니와 팀 버튼이 만나 탄생한 괴작 <크리스마스 악몽>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새 장을 열며 기술적으로도 진일보한 영화다. 그러나 그 어떤 의의도 잭(데니 엘프만)의 등장에 비할 순 없다. 앙상한 뼈만 남은 해골 잭이 벌이는 크리스마스 대소동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기발하다. 최근에 3D로 새롭게 버전업되기도 했다.



3. <글로리아> (Gloria)
1980년 | 존 카사베츠

“존 카사베츠 감독의 대표작이죠. 이 감독도 배우 출신인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영화를 만들면 평단과 흥행을 동시에 만족시키겠다는 엄청난 발언이었죠.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됐구요. 카사베츠는 원맨밴드처럼 촬영도, 편집도 모든 걸 다 핸들링하며 영화를 찍죠. 재밌는 건 평단 반응을 개의치 않았다는 거예요. 보통은 좋은 쪽으로 이끌려하는데 기자시사를 하고나서 기자들이 좋았다고 말하는 장면은 추가 편집에서 바꾸기도 하고. (웃음) 그런 괴짜 같은 면이 다른 감독들에게 존경받는 새로운 양식이 됐구요. 저도 그런 괴짜감독이 되고 싶단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글로리아(제나 로우랜즈)는 강하다. 백주대낮 대로에서 총질을 할 수도 있고, 마피아들을 협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6살짜리 필(존 애덤스)에게는 그저 멋지고 좋은 여자다. 가족이 마피아에게 몰살당한 후 혼자 남게 된 필과 도망치게 된 글로리아. 난 남자라고 외치는 꼬마와 두려울 게 없던 여자는 서로에게 가족이자 친구고 엄마이자 아빠, 연인이 된다.



4. <엑스맨> (X-Men)
2000년 | 브라이언 싱어

“브라이언 싱어는 천재 감독인 거 같아요. <엑스맨>은 뻔한 제도권 영화가 될 수 있었는데 그의 손에 의해 완벽하게 각색됐어요. 코믹북을 재발견하게 한 영화이기도 하구요. 소모되지 않고 자기 색깔을 상업적으로 변신시키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 그는 그게 가능한 감독이죠. <엑스맨> 시리즈 중에선 첫 번째 영화를 제일 재밌게 봤어요. 고리타분한 영화만 좋아할 거 같지만 저 그렇지 않아요. (웃음)”

초능력을 가진 돌연변이 히어로. 이들의 능력을 시각화하고 통쾌한 액션 신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엑스맨>의 영화적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나 영민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슈퍼 히어로물에 미국의 뿌리 깊은 사회적 병폐를 담아냈다. 인종차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획일성 등 우리 사회에도 유효한 문제들은 감독에 의해 결코 가볍지 않게 다뤄졌다.



5. <매그놀리아> (Magnolia)
1999년 | 폴 토머스 앤더슨

“전 어렸을 때 내 색깔은 엉뚱함이라고 단언한 적이 있었어요. ‘영화는 엉뚱해야 돼’라고 말하고 다니기도 했는데, 그게 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을 사모하면서부터예요. (웃음) 특히 <매그놀리아>는 영화가 어쩜 이렇게 엉뚱할 수가 있죠? 하늘에서 두꺼비 비가 내리다니… 그런 상상력과 엉뚱함이 절 많이 자극했어요. 제 영화 <장님을 무슨 꿈을 꾸는가>에도 그런 엉뚱함을 도입할 정도로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어느 하나 뛰어난 연기를 보이지 않는 이가 없다. 톰 크루즈, 줄리언 무어,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등 매 장면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배우들의 향연은 복잡하게 얽힌 이들의 관계나 황당한 전개도 수긍하게 만들어버린다.




“왜 <비밀애>를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1인 2역 때문이라고 답하겠어요. 전 배우가 노출을 하고 머리를 깎는 게 뭐가 문제냐고 되묻고 싶어요. 물론 <비밀애>가 노출영화로 포장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선택한 기준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어요. 아마 한국영화에서 이런 1인 2역 영화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요?” 최근 계속된 멜로영화의 선택에 배우로서 지루한 행보가 아니냐는 질문에 유지태는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쏟아낸다. 그리고 그 당당함은 멜로로서 다소 헐거운 이음새를 가진 영화 안에서도 남다른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유지태가 연기해낸 쌍둥이의 갈등으로 충분히 설득력을 가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감독 유지태의 행보에도 유효했다.

“첫 장편영화는 무조건 성장 드라마여야 한다는 생각을 20대부터 품었어요. 제가 겪었던 성장의 느낌을 영화로 풀어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준비 중인 영화도 소년이 청년이 되어가고, 불법체류자 여성이 수동적인 인물에서 능동적인 인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로드 무비예요.” 유지태는 자신과 영화가 연결된 지점에 있어서는 한 순간도 의심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은 오만 혹은 자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고, 그걸 위해 똑바로 걸어가는 자가 찍어내는 보폭의 확신이었다. 앞으로도 유지태의 긴 다리만큼이나 그가 그린 발자국은 깊고도 넓다는 측량은 쉬이 도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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