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되거나 영원히 끝나지 않거나. 김창완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너무 짧거나 혹은 너무 길 수 밖에 없습니다. ‘감독 무대로 오다’의 두 번째 무대, 허진호 감독의 연극 에서 노인 영진 역으로 출연 중인 김창완은 현재 김창완 밴드의 왕성한 활동과 더불어 SBS 파워FM 진행, 드라마, 영화, MBC 음악프로그램 까지 그 누구보다 다양한 꿈을 동시에 꾸는 중입니다. 그런 그를 ‘인터뷰 100’이 잠시 흔들어 깨웠습니다. 눈을 비비고 지금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는 이 사람은 쉰여섯이 되도록 젊게 사는 노인이 아니라, 지난 56년간 한 번도 늙어 본 적이 없는 천진한 아이입니다.

100: 매일 아침 라디오에, 끊임없는 공연에 드라마 출연에 저녁때는 이렇게 연극까지. 게다가 틈틈이 술도 마셔야 하고! (웃음) 거의 쉬는 시간이 없이 살고 계신 것 같아요. 마치 하루하루가 아까워 죽겠다는 사람처럼.
김창완: 허허허허, 그렇진 않아요. 물론 하루를 계획표 짠 것처럼 생활하지 않으면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다 소화해 내기가 힘들어서 그런 거지. 그래도 열차 시간표처럼 착착 하면 다 견딜만한 스케줄이에요. 그러니까 하지. 라디오니 공연이니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다 다른 일처럼 보이겠지만 그냥 나에게는 일상인 거죠. 이 연극만 해도 벌써 넉 달 열흘, 익숙한 일이 되고 나니까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최근 감기에 걸려서 좀 고생을 하긴 했지만. (웃음)

“사실 매일 눈 뜨면 새로운 여행”

100: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뮤지션들에게 이런 성실한 삶이란 얼핏 안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죠. 그런데 선생님의 삶은 그와는 반대예요. 라디오만 해도 꽤 오랫동안 진행하셨고.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뭘까요?
김창완: 그러게, 라디오도 이제 얼마 후면 10년이 된다고 하더라고. 원동력이라… 그저 일상을 즐기고 일상의 소중함을 아는 거 아닐까요? 그게 내 생활의 근간이기도 하고. 사실 다른 건 거의 안 하고 살아요, 자전거 타러 가는 것 정도? 그 흔한 여행도 거의 없고, 딱히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고.

100: 매일 매일을 여행으로 생각하시며 사는 거로군요. (웃음)
김창완: 허허, 사실 매일 눈 뜨면 새로운 여행인데, 그 일상이 새롭고 즐겁지 않으면 세상에 뭐가 새로울 수 있겠어요. 장소가 바뀌어서 새롭겠어요, 사람이 바뀌어서 새롭겠어요.

100: 연극 은 박민규의 짧은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이 소설이 연극화 되는 과정을 거의 함께 하셨다고 들었어요. 직접 쓴 대사도 있고.
김창완: 1장에 있는 다이얼로그는 좀 썼죠. 프롤로그처럼 만들자고 아이디어도 냈고. 은 얼핏 양로원에서 만난 두 노인의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잊어간다는 것, 잊혀진다는 것, 나로부터 나도 멀어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100: 연극 2장의 시작에서 기저귀를 찬 채 바지를 내린 뒷모습으로 등장하셨을 때 관객들이 꽤 놀라더라고요. 카메라 앞도 아니고 바로 관객들이 지켜보고 있는 무대라니, 망설여지진 않으셨어요?
김창완: 전혀요, 누드면 어때요? 중요한 건 엉덩이를 보이는 것도 기저귀를 차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저를 가장 북받치게 만든 장면은 스스로를 소개하려다가 갑자기 자기를 잃어버리고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이었어요. 이 연극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신일 수도 있고, 그거에 비하면 기저귀 차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닌 거죠.

100: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에 따라서 정신적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육신의 노화 앞에서는 우리 모두 참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요. 나이 드는 것이 서글프진 않으세요.
김창완: 몸이고 마음이고, 늙음 그 자체가 서글픈 게 아니고, 늙은 몸을 늙은 마음이, 혹은 늙은 마음이 늙은 몸을 감당할 수 있느냐가 어려운 일 같아요. 그걸 얼만큼 감당 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하물며 죽음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의 노화도 못 견디는 사람도 있는 거죠. 저도 자전거도 열심히 타고 운동도 하고, 젊게 살려고 기를 쓰는 사람 중에 하난데, 얼마 전에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어요.

“돌이켜보면 그저 먹고 산 거예요, 일하고 벌고 그저 먹고 산거예요”
김창완│“전 아직도 세상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몰라요”
김창완│“전 아직도 세상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몰라요”
100: 어떤 질문요?
김창완: 만약 너에게 천 년의 삶이 주어진다면 뭐 할래? 그런데 그 질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아직도 답을 못 찾았고. 요즘은 그 질문에 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천 년의 목숨 앞에 나는 이걸 하고 싶소, 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요. 어쩌면 우리는 위대한 일에 대한 소명의식을 못 가지고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저 자기 영달을 위해 살거나, 기껏 남을 위해, 자식을 위해 부모를 위해 같은 변명 밖에 못하는 건 아닌가, 실재로 우리가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런 반성을.

100: 배철수 씨가 한 인터뷰에서 “김창완 씨는 일을 놀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부럽다. 나와는 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라는 말을 했는데, 지금 하고 계신 일은 일일까요, 놀이일까요.
김창완: 글쎄요…. 심장이 그토록 애절하게 뛰고 있는 이 순간, 자기 심장의 박동을 일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요. 생명은 일하고도 관계없을 수도 있어요. (사이) 아니 생명은 일하고 관계가 없죠.

100: 그렇다면 지금 하고 계시는 이 일련의 것들은 일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김창완: 글쎄, 뭐라고 할까. 그저 내 삶이죠. 에 제가 참 좋아하는 대사가 있어요. “돌이켜보면 그저 먹고 산 거예요. 일하고 벌고 그저 먹고 산거예요.” 그 대사가 참 좋아요. 그저 먹고, 그리고 사는 거죠.

100: 77년 산울림이 처음 세상에 나온 이후 대한민국은 어쩌면 가장 야만적인 시대를 거쳐 왔어야 했는데 지금 산울림의 노래를 들으면 오히려 현재의 어떤 음악보다 낭만적이라고 느끼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김창완: 음… 듣는 이들이 그렇게 느낀다면 그건 아마도 추억에 중력이 작용해서가 아닐까요? 원래는 무게가 없어야 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게 다 질량을 가지게 되어서인 것 같아요. 30년 전, 산울림을 들었을 때 무게 없이 그저 진취적으로 들리던 그 노래들이 지금은 자기 삶 속에서 채화되어 더 낭만적으로 들리게 되는 작용이 아닐까요. 이건 그저 내 나름대로의 추측이나 생각이긴 해요. 만든 사람으로서는 사실 그 노래를 왜 만들었는지, 어떤 상태로 만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부지기수예요. 영감이 떠올라서 만들어진 건 그리 많지 않아요. 작의를 가지고 만든 곡들은 치졸한 곡들이 많구요. 알려지고 사랑 받았던 곡들은 밑도 끝도 없이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핸드폰 메인 화면에 쓰여진 말은 ‘에피큐리언 라이프’”
김창완│“전 아직도 세상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몰라요”
김창완│“전 아직도 세상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몰라요”
100: 함께 산울림을 이끌었던 막내 동생 창익 씨를 불의의 사고로 잃고 만든 EP 앨범 < The happiest >는 삶의 태도 혹은 생에 대한 회환 같은 것이 담겨있다면 작년 하반기에 나온 정규앨범 < BUS >는 그 모든 심상들이 굉장히 구체적이고 일상적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가장 행복한’과 ‘버스’ 사이, 그 구체성의 차이만큼이나.
김창완: < The happiest > 발표할 당시 만 해도 아직 동생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죠. 아예 ‘이번 앨범은 분노의 자식입니다’ 라는 말도 했었으니까요. < BUS > 앨범을 낼 때 즈음은 그래도 상당히 안정을 찾은 거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도 했고. 하지만 원래는 더 큰 발자국을 더 떼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두 앨범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 BUS >가 나오자마자 김창완 밴드 멤버들이 모두 얼른 새 앨범 내고 싶다, 고 일성을 토했었죠. 이제는 서두르지 않고 슬슬 작업을 시작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100: < BUS >의 수록곡인 ’29-1’은 여름 혹은 청년의 연애처럼 씩씩하고 건강한 기운이, ‘너를 업던 기억’은 막 연애를 시작한 봄 같은 풋풋함이 서려있어요. 김창완에게 사랑은 지나간 회상이 아니고 현재 진행형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만큼.
김창완: 오늘 라디오 오프닝이 뭐였냐면요. (눈을 감고)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 그 사람과 처음 극장 갔었던 기억, 그 사람과 갔던 바닷가의 기억, 떡볶이 집의 기억, 그 사람과의 슬펐던 또 기뻤던 기억, 이렇게 그 사람과의 기억으로만 만나는 사랑이 얼마나 과거입니까. 어제 밤늦게까지 본 이란 영화의 마지막은 과거라는 커튼을 뜯어내며 두 사람이 달려 나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라는 추억의 커튼을 뜯어내버리고 봄으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였어요.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건 사실 아무것도 없어요. 법정스님이 실천하고 보여준 것 자체가 매일 매일 똑바로 살아라, 아니었어요? 제 핸드폰 메인 화면에 쓰여진 말이 ‘에피큐리언 라이프(쾌락주의자의 삶)’ 예요. 사랑도 삶도 어제 이야기, 지난 간 걸 추억할 게 뭐가 있어요.

100: ‘결혼하자’의 마지막 부분에 “나 결혼 할 거야, 결혼 할거라구!”라고 소리 지르는 부분은 십대 녀석이 세상에 던지는 막무가내 외침 같아서 귀엽기도 하고 속이 시원하던걸요.
김창완: 그랬어요? 허허허. 원래 계획에는 없던 부분이었는데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에요. 녹음을 다 끝냈는데, 뭔가 아직 안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그래서 갑자기 튀어나왔는데, 재밌어. 재밌어졌어.

100: 작년에 출간한 환상소설집 는 스토리텔러의 입장이라기보다는 마치 이야기의 궤적을 쫓아가는 신나는 탐험가 같은 느낌이었어요.
김창완: 그렇게 읽어주었다니 고마워요. 그런 읽기가 가장 원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아까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거울 속의 나도 과거라고 생각하고, 추억의 접근이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전지적인 작가 시점으로 쓰여지는 글쓰기가 싫어요. 뭐가 나올지 모르는 거니까. 하루키의 책도 읽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기억의 편린으로 볼 수도 있고 행과 행 사이를 뜀박질 하면서 읽을 수도 있는 거죠.

“날 존경한다구요? 에이… 아니에요”
김창완│“전 아직도 세상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몰라요”
김창완│“전 아직도 세상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몰라요”
100: 우리 세대들은 어쩌면 역경을 이겨낸 성공스토리나 루저가 된 몽상가들의 실패담을 주로 접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진짜 살고 싶은 삶의 롤모델이 부재한 느낌. 그래서 개인적으로 김창완이란 사람의 존재가 존경스러운 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쾌락을 쫓고, 현재의 즐거움에 충실한 선배가 이 사회의 궤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잘 살아가고 있다는 안도감과 위안이랄까. 중 영진의 대사처럼 “고마워, 멋지게 늙어줘서” 같은 느낌요.
김창완: 제가요? 에이… 아니에요. 요즘 제가 을 보고 있는데 어휴, 얼마나 대단한 지, 우리의 지혜라는 것이 3천 년 동안 도대체 뭐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존경이라니, 이 오십 넘는 인생이 한 줄도 안돼요. 그저 전 아직도 세상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몰라요. 보세요, 저기 버스가 지나가죠. 이게 얼마나 굉장한 장면이에요. 지금 보고자만 한다면 너무 많아요,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삶을 환희로 차게 하는 것들이. 내가 요즘 만날 외우고 다니는 ‘술타령’이라는 시도 얼마나 기가 막히는데요. ‘날씨야 니가 아무리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먹지’ 하하하하. 그것이 김창완일 수도, 산울림 노래일 수도, 일 수도, 어제 본 오래된 흑백필름 속 일 수도 있는 거죠. 요즘은 공연장까지 지하철을 자주 타고 다니는데 지하철 문에 쓰여 있는 시구들을 넋을 놓고 읽느라 열차가 오는 줄도 모를 때가 많아요.

100: 연극도 이제 마지막 공연만 남기고 계시죠? 바로 미국공연도 있다고 들었고.
김창완: 네, 23일 마지막 공연 끝내면 다음날 바로 미국으로 가요. 일주일간 LA, 시애틀, 시카고 공연이 있거든요. 연극무대는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왜 그런 말하잖아요. 조각하는 게 아니라 돌 속에 그 조각이 있었다고. 연극을 만들고 대사를 외우고 할 때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연극을 완성하고 나니까 이야기는 원래 거기 있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관객은 완벽하다는 걸 느꼈어요. 연극이 한 편이 만들어질 때까지 수천 가지 약속이 있는데 관객들은 하나도 놓치는 게 없어요. 또 암전이 막과 막을 가르는 게 아니라 암흑이 이어준다는 것도 알았고, 침묵 속에 우리의 상상력이 얼마나 활개 치는지도 알았어요.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무엇보다 같이 공연하는 배우들의 살 냄새가 좋아요. 정겹고.

100: 중 어린 영진과 나이든 영진이 마주 하는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혹시 지금의 김창완이 소년 김창완을 어느 시간의 선상에서 마주친다면 뭐라고 할 것 같으세요?
김창완: 너, 참 예쁘다. (웃음)
100: 반대로 소년 김창완은 뭐라고 할까요?
김창완: 늙은 나를 보고? 너 왜 이렇게 늙었니? 하하하하. 아니, 대사처럼 그러겠지, 병신새끼! (웃음) 사실, 틀린 말도 아니고

100: 무슨 뜻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김창완: 자기 꿈을 스스로 안 믿고, 권리도 없이 자기를 학대하고, 병신소리 들어 마땅하죠. 내 청춘을 훨씬 더 잘 보낼 수 있었는데 말이죠. 아니, 훨씬 더 잘 보냈어야 했고. (그때 어린 시절 ‘영진’ 역으로 출연 중인 김기범이 지나가자) 기범아, 만약 어린 김창완이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할 것 같아?
김기범: 병신새끼?
김창완: 허허허허. 거 봐요, 저 녀석이 뭘 제대로 안다니까. 허허허허.

글ㆍ사진. 백은하 one@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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