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에 미치면 고생한다. 1세대 아이돌이 데뷔한지 15년이 지났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애정을 기반으로 시작된 팬질의 역사는 수집과 구매, 홍보를 넘어 저항과 쉴드, 관리로 진화해 왔다. 2008년, “괜찮아, 누나가 이번 달에 인센티브도 받았어”라며 든든한 고객임을 자처했던 팬은 2010년에도 여전히 고객이자 지원군이다. 시장은 변화하고 신경 쓸 것들은 늘어나고 가끔은 ‘아이들’마저 속을 썩이는 요즘 아이돌의 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평범한 누나 팬, 김수연 씨의 고군분투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테 목숨 걸지 마세요. …는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어쩐지 낯익은 목소리가 김수연(30세. 가명) 씨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으, 으으, 헉…또 꿈이었구나. 잠에서 깨어난 김수연 씨의 눈이 방문을 반쯤 연 채 분노의 기운을 뿜어내는 엄마와 마주쳤다. “그만 자고 일어나서 방 좀 치워! 너 저거, 책상 밑이랑 장롱 옆에 쌓아 놓은 저것들 오늘 정리 안 하면 그냥 싹 다 내다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일요일 AM 11:30
비디오테이프 38개,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16장, 사과박스 세 개 분량의 잡지와 다섯 벌의 팬클럽 단체복이 나왔다. 김수연 씨가 가장 오랫동안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 태평천하의 앨범은 뜯지도 않은 새 CD가 네 장이나 발견되었다. 4년 전 이사할 때 짐을 챙기며 들여다 본 뒤 처음 손대는 물건들에서 먼지가 묻어났다. ‘다시 안 볼 것 같은데 버릴까? 아냐, 이걸 어떻게 녹화했는데.’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태평천하의 방송을 보지 못하는 날이면 전날부터 엄마에게 녹화를 부탁하고 방송 시간이 되면 학교 공중전화에 매달려 확인 전화까지 하던 긴장의 나날이 김수연 씨의 머리를 스쳤다. ‘ 태풍 오빠 번지점프 완전 귀여움’ 정성스레 적힌 라벨에 문득 궁금증이 발동했지만 거실에 있는 VCR은 고장난지 오래,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어지자 버리기가 한층 더 불안해진 김수연 씨는 일단 테이프들을 차곡차곡 줄맞춰 쌓았다. ‘CD도 들을 것 같지는 않지만 버릴까? 아냐, 혹시 나중에 희귀 앨범이 될지도 모르니까 갖고 있자. 어쩌면 중국 팬들한테 팔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멤버 여섯 명 중 네 명이 군 복무중인 태평천하가 과연 언제 중국 활동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김수연 씨는 CD를 박스에 다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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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와 함께 하는 영어 공부, 컴퓨터 자격증 책은 여전히 새것처럼 깨끗했고 팬들이 직접 그리고 코팅해 만들어 팔았던 팬아트 물품과 얼굴 각도만 다르게 해서 비슷한 컷으로 몇 장이나 나온 프로필 사진과 함께 색지 수십 장이 파일북 사이에서 우수수 쏟아졌다. “태평천하의 태풍 오빠 스물한 번째 빛 본 날입니다.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김수연 씨가 고 2 때, 태평천하의 3집 앨범 활동 당시였다. 새벽같이 집을 나가 전봇대와 담벼락, 교실마다 벽보로 도배하고 태평천하의 풍선 색깔 포장지로 싼 사탕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줬다. 태평천하의 데뷔 7백일 기념일에는 단체복을 입고 고수부지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을 했고, 4집 앨범 발표에 맞추어서는 또다시 벽보를 붙였다. 돌이켜 보면 손발이 쪼그라들긴 하지만 그래도 벽보 하단에 “내일 자진 수거하겠습니다. 떼지 마세요” 라는 문구를 넣은 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김수연 씨는 생각했다. 물론 친구와 가족들을 총동원했던 연말 시상식 투표에서 태평천하가 대상을 받지 못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일요일 PM 3 : 00
“하는 김에 옷장 정리도 해라.” 결국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하고 침대 밑으로 박스들을 밀어 넣은 김수연 씨는 쑤시는 삭신을 부여잡고 옷장 서랍을 열었다. 빨강, 노랑, 주황, 하늘색 티셔츠들이 가득했다. 김수연 씨가 대학에 입학할 즈음, 태평천하는 교복 광고 대신 힙합, 스포츠, 캐주얼 브랜드의 의류 광고를 돌아가며 찍기 시작했다. 구매 고객에게만 주는 브로마이드와 카탈로그 때문에 김수연 씨는 4년 내내 힙합 바지에 푸대 자루처럼 커다란 면 티셔츠, 옆으로 매는 스포츠 백 차림으로 다녀야 했다. 키 160 센티미터에 작은 체구의 김수연 씨가 소화하기에는 버거운 스타일이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과자는 태평천하가 광고하는 깁스 스낵이 진리인 것처럼, 옷도 태평천하가 광고하는 중강진을 입는 것이 팬의 본분이었다. 김수연 씨는 잔뜩 쌓여 있는 티셔츠들을 다용도실에 내놓았다. ‘걸레로 쓰지 뭐.’

일요일 PM 11 : 15
“매니저 형이 저를 숙소에 가두고 외출 금지를 시켰어요. 그 후로는 아네모네하고 스케줄도 다 따로 잡아서…몇 년 뒤에 샛별 씨를 방송국에서 마주쳤는데 저를 되게 슬픈 눈으로 보고 가시더라구요” 김수연 씨가 태평천하 이전에 좋아했던 아이맥스의 강혁, 본명 김승필 군은 요즘 을 비롯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종종 얼굴을 비추는 중이었다. 아이돌 시절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여자 연예인과의 연애담이 주된 레파토리였다. ‘흐즈므. 흐즈믈르그. (하지 마. 하지 말라구.)’ 이를 악물고 빨래를 개던 김수연씨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 자리를 빌어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고,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꼭 전하고 싶네요” 강혁의 애절한 부르짖음을 함께 듣고 계시던 엄마가 말씀하셨다. “쟤가 그 때 쓰림팀인가 느림팀인가 찍다가 다쳐서 응급실 실려 갔다고 너 중간고사 전날 울면서 오밤중에 병원 간다고 난리쳤던 걔지?” 김수연 씨는 조용히 리모콘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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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만 사람이 다쳤다는데 걱정되지도 않아?” 울며 소리쳤던 그 날의 기억은 태평천하 사무실 앞에서 다른 팬들과 모여 있다 매니저에게 날라차기 당해 하복 블라우스에 흙발자국 찍혔던 일 만큼이나 잊고 싶은 것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태평천하 멤버교체 및 해체설 때문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평점 2.0 이하를 기록하던 대학 새내기 시절 태평천하의 소속사 건물 앞에서 시위 하다가 카메라에 클로즈업 당해 모든 학부생들 사이에서 유명인이 되었던 데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마스크를 했음에도 TV를 보던 고모까지 알아보고 집으로 전화를 하는 바람에 한동안 김수연 씨는 가정과 사회 양쪽에서 불가촉천민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다시는 이 짓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월요일 AM 9 : 45
정신없이 출근해 아침 업무를 정리하고 잠시 한숨 돌리던 김수연 씨는 인터넷 뱅킹을 클릭했다. 작년 가을 데뷔한 신인 그룹 상투스의 멤버 견훤이 한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하게 되자 팬 사이트에서는 현장에 간식 조공을 보내기로 했다. 김수연 씨 역시 동참했다. 김수연 씨의 ‘본진’ 레전드의 새 앨범이 발매되었을 때 언론사에 보낸 CD 조공, 김수연 씨가 좋아하는 멤버 광명의 생일 선물 조공 등 이 달에는 유독 돈 들어갈 곳이 많았지만 대리 승진 기념이라 생각하며 김수연 씨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체’ 버튼을 눌렀다.

월요일 PM 2 : 20
택배로 티켓이 도착했다. 광명이 출연하는 뮤지컬의 티켓이었다. 예매 시작 4분 만에 모든 티켓이 매진되었지만 인터넷 속도가 빠른 회사에서 밤 9시까지 대기 중이던 김수연 씨는 두 장이나 예매하는 데 성공했다. 잊고 있었던 카드 값의 무게가 조금 늘어나긴 했지만 은행 앞에서 밤새 기다리다 은행 언니의 빠른 손놀림에 예매 여부를 걸어야 했던 옛날에 비하면 세상 좋아진 셈이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는 거야.’ 김수연 씨는 회사에 충성을 다짐하며 달력에 공연 날짜를 표시했다.

월요일 PM 7 : 30
야근 중 휴식 시간을 틈타 김수연 씨는 연예 뉴스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루머로 돌던 상투스의 또 다른 멤버 단군과 인기 걸 그룹 멤버의 가상 연애 프로그램 출연 소식이 톱으로 올라와 있었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일단 ‘베플’에 추천을 눌렀다. 단군을 향한 악플에는 차근차근 ‘신고’를 누른 뒤 김수연 씨는 냉정 침착하게 리플을 달았다. “아이돌끼리 연애하는 컨셉 이제 지겹다. 시청률도 안 나올 듯.” 도대체 상투스의 소속사는 마음에 들게 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맨얼굴이 더 나은 애들에게 스모키 화장을 시키고, 꽃미남 멤버에게 근육을 기르게 하더니 20세기에나 유행하던 색색깔 헤어 피스를 장착했다. 모처럼 찍은 광고는 유치하고 무대 의상은 아바타들이나 입을 법한 디자인에, 예능이라고 잡은 게 하필 걸 그룹이랑 같이 하는 거라니! 애써 평정을 찾으려 노력하며 각종 연예 정보가 올라오는 게시판으로 눈을 돌린 김수연 씨는 다시 한 번 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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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개념돌 레전드 광명, 팬들한테 욕하는 동영상. avi’ 며칠째 지겹게도 올라오는 게시물이었다. 몇 주 전 압구정에서 친구를 만나고 나오던 광명이 자신에게 몰려들어 카메라를 들이대는 팬들을 향해 “찍지 마, 찍지 마 OO!”라고 외치는 장면, 주위가 시끄러워 마지막 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광명이 팬에게 욕설을 했다는 의혹과 함께 기사가 쏟아졌다. “입모양도 그렇고, 내가 듣기엔 욕이 아니라 ‘찍지 마 이거’ 라고 하는 것 같다” “ 저도 그렇게 들림. ‘찍지 마 이거’ 2222222222” “이거 올린 사람 OMG 팬인 듯. 계속 똑같은 내용 올리면서 안티 짓 하네요” “제삼자 입장에서 보기엔 팬들이 먼저 위험하게 달려든 게 잘못인 것 같네요. 물론 욕한 건 잘못이지만 확실한 것도 아니니까 섣불리 비난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과거 태평천하의 멤버 평화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냈을 때 경찰서 홈페이지가 마비될 만큼 항의 글을 도배했다가 팬클럽 전체가 여론의 역풍을 맞았던 경험은 세월이 흐르면서 보다 지능적인 ‘쉴드’로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남동생과 부모님의 ID로 번갈아 접속해 여론을 형성한 뒤에도 김수연 씨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입한 레전드의 20대 이상 비공개 팬 사이트에 접속한 김수연 씨는 익명게시판에서 ‘기자들에게 메일 보낼 내용’ 이라는 제목의 글을 클릭했다. 레전드의 라이벌 그룹 OMG의 멤버가 한 예능 프로그램 촬영 도중 길에 껌을 뱉는 영상이 캡쳐와 함께 확대되어 있었다. ‘공중도덕을 껌으로 아는 무개념 아이돌’ 언론에 던질 새로운 떡밥이었다. 전의를 불태우며 메일 창을 연 김수연 씨는 떨리는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신고합니ㄷ…]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일러스트. 루나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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