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오성│인생을 새롭게 생각하는 순간마다 함께 한 영화들
유오성│인생을 새롭게 생각하는 순간마다 함께 한 영화들
유오성은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얼굴을 지녔다. 스스로 “배우하기에 무리가 있는 틀”이라고 밝힌 외모는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들과 만나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한국영화의 흥행사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에서 유오성은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고 뛰거나 친구를 위협할 때조차도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과 존재감이 빚어내는 아우라는 조목조목한 대사보다도 준석의 심정을 그대로 전달한다. 움푹 팬 볼은 생존에 지친 자의 회한을,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담고 있는 두 눈은 생의 의지를 포장하지 않고 드러낸다. 그래서 유오성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필부보다는 역사 속의 사명감을 띤 인물()이거나 매 순간 역경과 싸우는 비극적인 사연()의 주인공이었다. 그에게서 평범한 가장의 무게나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남자의 약한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이후 우리에게 선보인 의 동우나 의 장수는 전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그러나 유오성은 담담하게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택하는 작품이나 현장에 임하는 자세가 예전처럼 날서있지 않더라구요. 점점 더 가족들의 이야기, 가장의 심정에 끌려요. 그리고 내 자신조차도 부족한 걸 아니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최선을 다하는 것에 무게를 두게 되구요. 나이 든다는 게 다른 게 아니라 타협을 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며 일하는 거요.” 유오성은 더 이상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의 이미지에 메여 있지 않다. 그는 인기나 유명세의 정점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오랫동안 대중의 관심에서 떠나있기도 했다. “정말 많은 일들을 겪고 나서” 마흔이 넘은 배우 유오성이 얻은 깨달음은 ‘감사’다. “배우가 연기를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연기 좀 한다는 건방진 생각이 자라죠. 하지만 그 단계도 넘고 나면 정말 겸손해져요. 나이가 들어서도 내 연기를 검증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다는 것 자체가 감사해요. 그래서 늘 배우라는 일을 직업적으로 객관화시키고 조심하게 되죠.”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진 않는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나이 때에 할 수 있는 만큼의 경험을 하고, 그것으로부터 느낀 바를 축적해 자신의 그릇을 넓혀간다. 그저 연기하는 기계가 아니라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경험치를 잘 갈무리해온 유오성은 그 그릇을 넓혀갈 뿐 아니라 더 단단하게 빚고 있다. 그리고 그의 도요는 “어릴 때는 감수성을 자극해주고, 좀 커서는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영화들”이 곁에 있어 튼튼하다. 다음은 그가 인생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 순간마다 함께 한 영화들이다.
유오성│인생을 새롭게 생각하는 순간마다 함께 한 영화들
유오성│인생을 새롭게 생각하는 순간마다 함께 한 영화들
1. (La Strada)
1954년 | 페데리코 펠리니
“강원도 영월에서 15살 때 형들이랑 서울로 전학 왔어요. 그 때 TV 에서 처음 본 영화가 이에요. 까까머리 애가 이 영화의 철학적 주제를 알았겠어요? 그런데도 잠파노와 젤소미나를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죠. 영화적으로 연기를 잘했네 못했네를 떠나서 두 인물이 사랑을 하면서도 헤어지는 게 인생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죠. 둘이서 길 위에서 막 싸우고 헤어지는 장면은 아직도 생각나요. 어릴 때 TV를 보면 다 예쁜 사람인데 안소니 퀸을 처음 보곤 ‘저 사람은 어떻게 배우가 됐을까’ 이런 생각도 하고. (웃음)”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그 길 위에서 잠파노(안소니 퀸)와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 또한 만나고 헤어졌다. 약해지지 않기 위해 짐승 같은 모습으로 위악을 부리는 잠파노와 백치에 가깝게 순수한 젤소미나. 둘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지만 잠파노는 그녀를 떠나보내고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유오성│인생을 새롭게 생각하는 순간마다 함께 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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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0년 | 강대진
“ 속 아버지는 늘 뒤에서 자식이 잘 되길 바라고 물심양면으로 돕지만 전면에 나서진 않아요. 그런 모습에서 저희 아버지가 생각나서 펑펑 울었죠. 아버지는 한 번도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놓은 적도 없으시고, 힘들다고 하신 적도 없거든요. 그 아버지를 연기하신 김승호 선생님은 어린 나이에도 저 사람은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원래 저런 사람일 거야, 옆에서 그냥 그 사람을 찍은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대단하셨죠. 60년대 배우들을 보면 존재감이 그 정도로 엄청나요. 제가 연기에 있어서 교만했구나 반성하게 되죠.”

자식 농사 잘 지어 훌륭하게 키워내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자 인생의 전부였던 그 시절 아버지가 여기 있다. 연탄아궁이를 고쳐주면서 집안을 건사하는 박서방(김승호)은 평소에는 큰 소리 한 번 안내고 담배만 뻐끔 뻐끔 피운다. 그러나 자식에게 문제가 생겼을 땐 어디라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린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매한 한국 고전영화 DVD 타이틀에서 볼 수 있다.
유오성│인생을 새롭게 생각하는 순간마다 함께 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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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axi Driver)
1976년 | 마틴 스콜세지
“신방과를 지망했다가 막연히 비슷하겠지 하고 들어간 게 연극영화과예요. (웃음) 그래서 처음에 펠리니가 어떻고 가 어떻고 애들이 얘기하는 분위기를 못 따라가겠는 거예요. 뭐 연기는 당연히 해본 적도 없구요. 그런 와중에 다들 좋다고 해서 본 영화가 예요. 선배들은 끄덕이면서 보는데 전 졸려 죽겠고. (웃음) 그런데도 기억하는 이유는 한 장면 때문이죠. 로버트 드니로가 빈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헤드샷을 하는데, 영화를 보면서 배우가 멋있다고 생각한 최초의 순간이었죠.”

택시 운전을 하는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주변의 모든 것을 욕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의 분노나 증오에는 명확한 대상도 없으며 그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의 포주를 처리한 것도 선의를 위한 것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트래비스만큼 당시 미국을 대표할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
유오성│인생을 새롭게 생각하는 순간마다 함께 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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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Le Grand Bleu)
1988년 | 뤽 베송
“어렸을 때부터 경쟁구도에 있는 두 남자가 서로에게 도전하고, 질투도 하고 인정도 하면서 살아가요.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지칠 줄 모르고 가는 그들의 모습이 인생살이가 아닐까요? 거기다 공정한 경쟁 속에서 서로 견제하면서 성장하는 두 남자가 참 멋있죠. 서로 공통된 가치를 투구하는 사람들의 경쟁, 옳은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경쟁하는 게 부러웠어요. 내가 있는 연극판은 너무 힘든데 어떤 애는 TV 나와서 유명해진 거 같고, 학교 다니면서 나도 나름 잘했는데 내 삶은 왜 이렇게 힘든지 고민하는 시기여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노을로 물든 황금빛 바다, 해저를 부유하는 듯한 음악. 는 어머니의 양수에 잠기듯 보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두 남자의 잠수 대결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경쟁을 하는 둘의 모습은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순수하다.
유오성│인생을 새롭게 생각하는 순간마다 함께 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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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illion Dollar Baby)
2004년 |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를 보고나서 자막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있다가 나와서 낮술로 폭음을 했죠.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준 것 같아요. 평생을 외롭게 살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유일하게 애정을 가졌던 힐러리 스웽크를 죽여야 하는 인생의 크기를 감당 못하겠더라구요. 더군다나 그걸 담담하게 거리를 두면서 찍고 연기를 한 감독, 배우라니… 전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되묻게 만들더라구요.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가장으로서 세상을 떠날 땐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시점에 만난 제대로 만난 영화였죠.”

매기(힐러리 스웽크)를 제 손으로 떠나보내고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쓴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있는 프랭키의 뒷모습은 많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인물의 심정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영화는 시종일관 어떠한 감정도 강요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강한 힘을 가진다. 77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휩쓸었다.
“ 첫 촬영 때 울컥하더라구요. 다시 상업영화를 찍는 게 6년만인데, 내가 참 많은 길을 갔다왔구나란 생각이 들어서요. 더구나 가족, 가장에 대한 이야기니까 영석의 심정을 너무 잘 알겠고. 관객들이 볼 때는 많이 웃지만 보고나서는 낮술 한 잔 하거나 가족들에게 전화 한 통 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해요.” 의 영석은 무능력한 가장이다. 백수에다 유일한 관심은 동네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에만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관객이 우습게만 보던 영석이 아버지로서 숨겨둔 진심을 발견하는 순간, 영화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흐른다. 그리고 그런 영석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배우로서 굴곡을 겪었고, 아버지로서 고민해온 유오성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불혹이란 나이가 흔들림이 없는 게 아니라 유혹이 많아서 불혹인 거 같아요. 저도 배우로서 하고픈 작품만 하겠다고 고집하면 가족들이 생계를 꾸릴 수 없거든요. 그러다보면 비굴해질 때도 있는 거고, 애들은 자꾸 커 가는데 내가 이때까지 지켜온 가치들은 자꾸 흔들리고. 그래서 흔들리지 말라고 불혹인 거 같아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모든 것을 이룬 자가 아니라 흔들리는 것을 경계하면서 불혹을 지나고 있는 유오성의 지천명은 어떨까? 하늘의 명을 알았다기보다 터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의 연기는 어떤 깊이를 가질 지 더욱 궁금해진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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