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 “각박한 세상엔 살짝 푼 된장국 같은 글을”
노희경 “각박한 세상엔 살짝 푼 된장국 같은 글을”
24일, 서울 교보문고 본사 문화 이벤트홀에서는 KBS 대본집 출간을 기념해 노희경 작가와의 기자간담회가 진행됐다. 이미 지난 해, 노희경 작가의 전작 KBS (이하 )의 대본집이 발간되긴 했지만 이번 대본집 출간의 의의는 좀 더 각별하다. 1998년, 의 등장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자칫 빤할 수 있는 삼각관계를 섬세하고도 절절한 진짜 사랑의 감정으로 표현해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청률은 저조했지만 의 팬들은 PC통신을 통해 국내 최초로 드라마 동호회를 만들었다. 시청률만이 유일한 가치이던 시절, 그것과 별개로 강력한 팬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은 드라마도 예술적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과 함께, 노희경이라는 새로운 거장의 등장을 알렸다. 드라마 종영으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이 책으로 정식 출간되는 것은 이 작품과 노희경 작가에 대한 식지 않는 애정과 관심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대본이란 화면을 위한 작업인데, 그것과 별개로 책이 나오는 게 영광인 한 편 어떤 아쉬움을 줄 수도 있을 거 같다.
노희경 : 그런 생각이 있어서 제안을 받아도 책을 여태 안 냈다. 우리는 드라마의 베이스를 만드는 사람이다. 대본 자체가 작품은 아니지 않나. 이건 화면으로 봐야하는 것이지. 대본집에도 썼지만 읽는 사람이 화면으로 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면 다행이다. 배우들이 돋보인다는 뜻이니까. 그러면서 한 편으로 마음이 편해진 게 있다. 대본집으로 보는 게 별로라면 배우가 잘 한 것이니 그들에게 공이 돌아가면 되고, 좋다고 느끼면 좋은 작품의 베이스라 그렇다고 하면 되고.
“을 쓸 때는 미쳐 있었다”
노희경 “각박한 세상엔 살짝 푼 된장국 같은 글을”
노희경 “각박한 세상엔 살짝 푼 된장국 같은 글을”
벌써 12년이 지났는데 지금 대본을 보니 어떤가.
노희경 : 오늘 몇 장 읽었다. 좀 짠하더라. 사실 은 매 년 한 편 정도는 봤다. 한 3년 동안은 풀로 봤는데 그 이후부터는 1년에 한 편 정도 본다. 이번엔 19부, 이번엔 3부, 이런 식으로. 그런데 되게 묘한 게 그걸 보면 쓰던 당시로 돌아가는 거 같다. ‘저건 유치하네, 저건 너무 울었네. 저긴 대사가 늘어지네’라고 생각하는 건 잠깐이고 그 때 배우들 고생한 것이 생각난다. 내 대본엔 감정 지문이 많은데 배우들은 그런 거 처음 받아봤을 거다. 그래서 배우들이 당황해하던 모습, 작가가 감정을 다 컨트롤하는데 자기들은 그걸 더 컨트롤해야 해서 괴로워하던 모습이 생각나서 짠하다. 또 서른두 살 나로 돌아가서 짠하고. 지금 내 체중이 38㎏인데 그땐 32㎏까지 떨어졌다. 정말 드라마 쓰다 죽지 않나 싶을 정도로 주위에서 그렇게 쓰지 말라고 했었다.

그래도 지금 보니 작가로서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나.
노희경 : 가장 먼저 단점이 보인다. 그때는 너무 개개인 캐릭터에 빠지다보니까 담백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끈적끈적하다. 신 넘어가는 속도라거나 대사 같은 것들이 정제되지 않아서 그런 걸 지금 보면 창피하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좋은 건, 젊은 날 아니면 언제 그렇게 미쳐보겠나 싶은 거고.
그런 자기반성이 작품 활동에 영향을 주나.
노희경 : 항상 지난번에 내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챙긴다. 그걸 나중에 어떻게 극복할지 생각하고. 그래서 작품이 끝나면 새로운 소재가 생각난다. 배우나 스태프들이 ‘이것 재밌었다, 이건 별로였다’고 모니터 해주는 걸 귓등으로 안 듣고 다 모은다. 가령 같은 경우에 젊은 캐릭터들이 신선했다고 하면 그건 살리고, 대신 작품이 정신없고 너무 전문적이라 보는 사람이 따라가기 힘들었다고 하면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다음 작품에서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하다. 를 극복한다는 측면에서.
노희경 : 이번에도 새로 쓰는 게 세 자매와 젊은 엄마와 늙은 할머니의 이야기다. 서울에서 떵떵 거리고 산 것까지는 아니었어도 나름 전문직 여성이었던 사람들이 낙향한 이야기. 사실 나는 나 , 처럼 서민이나 어르신들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에는 그런 게 없었다. 대신 템포도 빠르고 전문적 용어 때문에 시청자가 보기 힘들고. 그런 면에서 새 작품에선 에선 볼 수 없던 노희경의 예전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이번엔 캐릭터가 좋다. 대본 안에 대장장이 문씨 아저씨란 분이 있는데 이 분 장면을 쓸 땐 그냥 ‘문씨 아저씨가 앉아있다’라고만 써도 좋다. 또 나문희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는 할머니의 경우, ‘할머니 밭일 나간다, 상추 뜯는다’라고 생각만 해도 좋다. 어제도 밤 10시 넘어서까지 대본을 썼는데 지금 작품 쓰는 얼굴 아닌 거 같지 않나. 이번 작품은 생기를 준다.

“내 작품에 많다는 마니아들 다 어디 있는 걸까”
노희경 “각박한 세상엔 살짝 푼 된장국 같은 글을”
노희경 “각박한 세상엔 살짝 푼 된장국 같은 글을”
마지막 회에서 “그들도 모두 잊지 못했기 때문에 행복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작가 본인도 자신의 작품들을 잊지 못하는 거 같다.
노희경 :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옛날에 사귀었는데 잊은 사람도 있다. 어떨 땐 이름도 잊는다. 그런데 내가 쓴 작품은 다 기억을 한다. 작품 할 때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고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어서 그런지 잊지 못한다. 그런 게 좋다. 내 시간을 기억해주고 힘들 때 스스로 독려할 수 있는 게.
그렇게 소중한 작품의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을 땐 속상할 거 같다. 물론 마니아들의 찬사가 뒤따르긴 하지만.
노희경 : 그건 속상하지. 장사를 하려고 제품을 만들었는데 제품이 안 나가면 당연히 장인의 입장에서 속이 상하는 거 같다. 다만 그게 오래가진 않는 거 같다. 글을 쓸 때 시청률이 몇 프로 나올지 고민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처럼 이미 결과가 나왔을 때 그걸 가지고 자책하는 시간은 줄어드는 거 같다. 예전에는 서너 달 씩 가기도 했는데 요즘은 빨리 잊는다. 사람들이 너는 참 상처를 안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내 작품에 마니아가 많다는데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 (웃음)

본인은 고민하지만 항상 방송국에서는 노희경 작가의 작품이라는 걸 내세운다. 부담도 되겠다.
노희경 : 그냥 한다. 울며불며 그냥 가는 거지. 작년에 처음으로 18㎞ 정도를 걸어봤는데 울면서도 가고 욕도 하고 여기 왜 왔나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결국 가기로 했으니 가게 된다. 어떻게 시종일관 자신을 믿겠나. 그냥 순간순간 가는 거지. 다만 이건 믿는다. 시청률이 나오든 안 나오든 나는 엔딩은 쓴다. 그건 믿는다. 방송은 끝이 난다. 그 이후는 모르지만, 울고불고 간다.

어쨌든 당신의 작품은 모두 노희경 표 드라마라는 타이틀이 붙는데 과연 노희경 표 드라마란 무엇인가.
노희경 : 모르겠다, 나도. 내가 만든 말이 아니다. 그건 만든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진짜 생각 안 해봤다. 마니아 드라마 쓰겠다는 생각 단 한 번 없이 시청률이 잘 나왔으면 좋겠다고 썼는데 결과가 그렇게 되어서. (웃음) 또 내가 내 걸 명품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 사는 사람이 명품이다 저질품이다 판단하는 거지. 하고 나서 그런 말 하도 들어서 할 땐 아예 이름을 노경희로 바꾸려고 했다. 이랑 비교할까봐. 그런데 국장님이 ‘다 파고들면 또 알아. 네가 감당해야 될 몫인 거지’라고 하셨다. 지금은 별로 상관 안 한다. 나는 계속 새로운 걸 쓰겠다고 쓰는데 계속 똑같다고 하는 거 같기도 하지만 어떨 땐 기분 좋게 들리기도 한다.
“묘비에 드라마 작가라고 써주면 좋겠다”
노희경 “각박한 세상엔 살짝 푼 된장국 같은 글을”
노희경 “각박한 세상엔 살짝 푼 된장국 같은 글을”
그래도 명품 드라마라는 찬사를 자주 듣는 입장에서 소위 막장 드라마를 보면 어떤 느낌인가.
노희경 : 막장이라는 말도 재밌다. 그걸 누가 만들었지? 옛날에는 솔직히 막장 드라마를 안 봤다. 머리가 아파서. 그러다 최근에 그래도 사람들이 보는 이유가 있을 거 같아서 공부삼아 봤는데 재밌더라. 시간이 금방 간다. 이건 이것대로 선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드라마는 내가 봐도 어떨 땐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팬 서비스가 모자라다는 생각도 들고. 다만 세상이 각박할 때 각박한 얘길 하면 더 힘들지 않나. 이럴 땐 좀 순한, 살짝 푼 된장국 같은 글이 나오면 좋지 않을까.

막장 드라마 뿐 아니라 일본 원작에 기댄 작품이 많이 나오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도 궁금하다.
노희경 : 상당히 걱정스럽다. 일본 작가를 비롯한 아시아 작가들과 세미나를 두 세 차례 열었는데 그 작가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게 우리 한국 작가들이다. 왜냐면 원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작가의 7, 80퍼센트가 원작 작가다. 미국 작가 위치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이유가 그거다. 그쪽은 작가가 거의 100퍼센트 원작자다. 그래서 엄청난 파워를 갖고 포지션도 굳건한데 그 다음이 우리나라다. 그에 반해 일본 작가들의 7, 80퍼센트는 만화나 소설 원작을 각색한다. 몇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산업화와 함께 그렇게 된 거다. 그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부하는 게 원작자로서의 위치를 놓치지 말라는 거다. 한류는 있지만 일류는 없는 이유가 바로 그들이 만화 시장에 점령당해서다. 한류 드라마의 베이스는 결국 창작인 건데 그게 없어지는 건 위험하다고 본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일본 만화는 컷이 참 빠르고 재밌다. 상상력도 풍부하고. 그건 장점이지만 그 장점 하나 때문에 창작을 포기하는 건 문제다. 조금 더디 가더라도 후배들이 문학성이나 창작성을 지켰으면 좋겠다. 다들 잘 쓰는 만큼 자기 자신을 믿었으면 좋겠다.

창작자로서의 자의식을 이야기했는데 혹 영상 베이스의 대본집이 아닌 소설집 같은 걸 써볼 생각은 없나.
노희경 : 전혀 생각 없었는데 나이 들어 일거리가 떨어지면 써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작 전공 자체는 산문학인만큼 산문이나 시에 대한 욕구가 있다. 적어도 드라마 쓰는 열정만큼은 가지고 쓰겠지. 하지만 지금은 대본 쓰는 게 더 재밌다. 어르신 배우들이 대사 치는 건 글로서는 맛이 안 난다. 그런 작업의 베이스를 만들어주는 게 스스로 기쁘고 좋다. 혹여 내가 소설 하나를 빵 터뜨려도 묘비에는 드라마 작가라고 써주면 좋겠다.

사진제공. 북로그컴퍼니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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