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 KBS , SBS 등 집단 예능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는 몇몇 톱스타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던 과거의 방송계에 비해 다양한 분야와 폭 넓은 연령대의 연예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무명 배우도, 잊혀진 가수도, 못 뜬 개그맨도 이 기회의 땅에서는 새 출발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든 자리도 난 자리도 쉽게 눈에 띄기 힘든 이 신대륙에서 살아남는 것은 지금 ‘뜨고 싶은’ 연예인들에게 결코 만만하지 않은 과제다. 그래서 화려한 시절 한 번 없이, 심지어 2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다시 연예계의 중심으로 진입하기를 꿈꾸는 아이돌 출신 K군의 고군분투를 통해 이 눈물겨운 ‘인간시장’의 일면을 그려보았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지만 2월의 새벽바람은 찼다. 두 번 멋 냈다간 얼어 죽겠네. 깔깔이가 몹시 그리워진 K군이 코트 깃을 움켜쥐었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양구에서 경계근무를 설 때보다 심해진 마음의 추위 때문이었다. 한 달 전, K군은 제대했다. 내심 조금은 기대했지만 하필 90년대 말을 강타했던 인기 그룹의 멤버 A군이 같은 날 제대하자 모든 기자들은 A군의 부대 앞에 새벽부터 진을 쳤다. 터미널에서 부모님께 전화를 했더니 얼른 와서 가게 좀 보라는 재촉과 함께 어머니의 한 마디가 덧붙여졌다. “우리 양평으로 이사한 거 알지?”
2010 인간시장│운수 좋은 날
2010 인간시장│운수 좋은 날
K군은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데뷔했던 6인조 아이돌 그룹 아이맥스의 멤버였다. ‘나(I)’는 ‘최강이다(MAX)’라는 사장님의 야심찬 작명에도 불구, 남자다운 콘셉트의 1집 ‘전투심’이 망했고, 귀여운 콘셉트의 2집 ‘아싸아싸’도 망했다. 회사가 흔들리고 멤버가 하나 둘 빠져나갔지만 간신히 4집까지 앨범을 냈다. 물론 다 망했다. 결국 그룹이 해체된 뒤에도 K군은 솔로 앨범 준비, 시트콤 단역 도전, 맛집 리포터 등 다양하고 사소한 일로 연예계 수명을 이어가다가 2년 전 현역으로 입대해야 했다. 군악대라도 가고 싶었지만 악보도 볼 줄 모르는 다른 인기 그룹의 멤버 B군이 차지한 뒤였다. 그 결과, 지금 내 눈에 흐르는 건 엄마의 양수…를 되뇌며 걷다 보니 인터넷으로 찾아본 장소에 거의 가까워져 있었다. 불빛을 보고 다가가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모기약과 라이터를 들고 불 쇼를 하는 중이었다. 움찔하며 돌아서자 드럼통을 잘라 만든 난롯가에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처음 왔나?” 라이방 선글라스를 뒷목에 끼운 삼십대 후반의 남자가 물었다. 낯익은 얼굴이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K군이 그렇다고 하자 남자는 금목걸이를 번쩍이며 다가와 ‘예능의 정석’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기괴한 표정과 목소리를 내며 무엇을 뜻하는지 맞춰보라던 남자는 K군의 머뭇거림에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이걸 몰라? 뇌염 걸린 뇌염모기 성대모사잖아. 이건 목 없는 목도리 도마뱀이고!” 그 때 누군가 남자의 옆구리에 낀 낡은 신문 뭉치를 장작으로 써도 되겠냐고 묻자 남자가 버럭 화를 냈다. “이거 나랑 국민배우 L양이랑 결혼설 났던 자료야! 구하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무리한 성형으로 이마와 콧날의 옆선이 같은 높이에 달한 듯한 여자는 자신의 (여고) 졸업 사진으로 추정되는 것을 대형 패널로 만들어 들고 있었다. “아이 씨, 나도 빨리 캐릭터 잡아야 되는데 뭐하지? 구구단 말고 알파벳 못 외우는 콘셉트로 할까? 의외로 귀엽다고 할 것 같지 않냐?” “넌 그냥 한글도 못 외우게 생겼어.” “뭐? 이런 씨베리아 벌판에서 얼어 죽을 년 같으니 십장 개나리를 봤나 시베리아 벌판에서 귤이나 까…야, 나 그냥 이 캐릭터 할까봐. 욕쟁이 소녀!” 아직 고등학생인 듯한 걸 그룹 멤버들이었다. “불 좀 빌려주시겠어요?” 돌아본 K군은 움찔했다. 기골이 장대한 또래의 남자가 핑크색 가발에 세일러복 차림으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한 때 아이돌계의 군기반장으로 불리던 P군이었다. 90도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기실에서 단체로 원산폭격을 시켰던 P군은 담배를 난로 속으로 던진 뒤 몇 걸음 떨어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빠 나 좀 봐~ 내 말 좀 들어봐~ 똥땡으도만 탱각하디는 마요~♬” 어둠 속에서도 귀엽게 부풀린 볼이 눈에 들어오던 순간 멀리서 외침이 들려왔다. “감독님 오셨습니다!”
2010 인간시장│운수 좋은 날
2010 인간시장│운수 좋은 날
면접 장소는 허름했지만 내용은 예리했다. 대기하던 이들을 다섯 명씩 방으로 불러들인 PD는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개인기 있어요? 있으면 해봐요. 괜찮으면 특별무대 시켜주게. 아바타 성대모사 같은 건 어르신들은 몰라요! 올림픽 중계 할 줄 아는 사람 없나? 지금까지 스캔들 누구누구랑 났었지? 아 당연히 실명이지! 삐 처리는 나중에 하고. 연예인이랑 사귀면서 있었던 에피소드 그런 거 말이야. 재밌는 거, 웃긴 거. 아니, 자기가 즐거웠던 걸 말하면 어떡해? 아예 안 웃긴 걸로 가자. 뭐 좀 감동적인 얘기는 없고? 어…회사가 망했어요는 너무 뻔하잖아. 밥 굶은 얘기도 그만 하고. 뭐 지금은 안 굶나? 일단 어머니한테 영상 편지 한번 써 봐요. 아니 지금은 카메라가 없잖아. 그냥 나 보고!” 토크를 하는 동시에 테니스채 통과, 랩으로 얼굴 뚫기 등 가능한 모든 도전에 도전하는 다른 이들에 비해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K군은 급속도로 의기소침해졌지만 PD는 다행히 아이돌 출신이라는 K군의 경력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활동할 때 아네모네, 팔선녀 이런 애들도 같이 나왔잖아. 혹시 그 중에 사귀거나 한 적 없어?” 지상파도 몇 번 타보지 못한 K군의 그룹이 그런 톱스타들과 엮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다른 멤버의 추억이라도 팔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뭐 없으면 어쩔 수 없는데, 그럼 혹시 같은 그룹 멤버와 사귄 적은……없구나?” 실망감이 역력한 PD가 문을 향해 “자, 다음…”을 외치려는 순간 K군이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아! 사실은 제가 아네모네의 샛별 씨하고 좀 만났는데요…” “그래?” PD가 눈을 번뜩였다. “그, 그게…처음에 제가 음료수를 주면서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서 줬더니 연락이 와 가지고, 통화도 하고…주말에 명동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다른 멤버가 그걸 알고 매니저 형한테 일러서 형이 저를 숙소에 가두고 외출 금지를 시켰어요. 그 후로는 아네모네하고 스케줄도 다 따로 잡아서…몇 년 뒤에 샛별 씨를 방송국에서 마주쳤는데 저를 되게 슬픈 눈으로 보고 가시더라구요. 이 자리를 빌어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고,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꼭 전하고 싶네요.” K군에 이어 PD마저 감동한 눈빛이었지만 샛별과는 야외 행사 때 다 같이 음료수를 나누어 먹은 것 외엔 말 한 마디 못해본 사이였다. 지난 한 달 간 선임 아이돌 연애 폭로 전문가 N군이 출연한 토크쇼를 섭렵한 덕분이었다.
2010 인간시장│운수 좋은 날
2010 인간시장│운수 좋은 날
의 출연자 버스 앞에 줄을 서 기다리며 K군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번 방송에서 빵빵 터뜨리고 에 나간 뒤 와 에 출연해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자신의 예능감을 마음껏 발휘하다 보면 언젠가 까지 입성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체력만큼은 자신 있으니 의 고정 멤버가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 그런데 하고 촬영이 겹치면 어떡하지? 케이블도 좀 나가야 하는데. 그래도 일단은 공중파로 인지도를 더 쌓아서 케이블을 잡을까? 하지만 나 정도면 케이블 메인일 텐데 그걸 놓쳐?’ 눈을 지그시 감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K군의 귓가에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죄송하지만 밴쿠버 동계 올림픽 특집 다큐멘터리 편성으로 다음 주 방송이 죽었어요. 미안하지만 다음에 또 봅시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PD의 팔뚝을 붙잡고 K군이 매달렸다. “아 저, 혹시 주말에 대리운전 필요하시면 바로 전화 주세요. 제가 사단장 운전병 출신이거든요.” 사실은 목욕탕 관리와 오바로크 치는 게 일이었다. “주중에도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PD는 K군을 가볍게 뿌리친 뒤 대기 중이던 승용차에 올랐다. 운전석 옆에 서 있던 낯익은 얼굴의 탤런트가 PD를 맞이했다. 점점 멀어져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주저앉은 K군이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스캔들도 터뜨렸는데 왜 출연을 못하니, 왜 출연을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일러스트. 그루브모기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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