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 KBS , SBS 등 집단 예능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는 몇몇 톱스타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던 과거의 방송계에 비해 다양한 분야와 폭 넓은 연령대의 연예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무명 배우도, 잊혀진 가수도, 못 뜬 개그맨도 이 기회의 땅에서는 새 출발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든 자리도 난 자리도 쉽게 눈에 띄기 힘든 이 신대륙에서 살아남는 것은 지금 ‘뜨고 싶은’ 연예인들에게 결코 만만하지 않은 과제다. 그래서 화려한 시절 한 번 없이, 심지어 2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다시 연예계의 중심으로 진입하기를 꿈꾸는 아이돌 출신 K군의 고군분투를 통해 이 눈물겨운 ‘인간시장’의 일면을 그려보았다.날씨가 많이 풀렸다지만 2월의 새벽바람은 찼다. 두 번 멋 냈다간 얼어 죽겠네. 깔깔이가 몹시 그리워진 K군이 코트 깃을 움켜쥐었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양구에서 경계근무를 설 때보다 심해진 마음의 추위 때문이었다. 한 달 전, K군은 제대했다. 내심 조금은 기대했지만 하필 90년대 말을 강타했던 인기 그룹의 멤버 A군이 같은 날 제대하자 모든 기자들은 A군의 부대 앞에 새벽부터 진을 쳤다. 터미널에서 부모님께 전화를 했더니 얼른 와서 가게 좀 보라는 재촉과 함께 어머니의 한 마디가 덧붙여졌다. “우리 양평으로 이사한 거 알지?”

“처음 왔나?” 라이방 선글라스를 뒷목에 끼운 삼십대 후반의 남자가 물었다. 낯익은 얼굴이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K군이 그렇다고 하자 남자는 금목걸이를 번쩍이며 다가와 ‘예능의 정석’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기괴한 표정과 목소리를 내며 무엇을 뜻하는지 맞춰보라던 남자는 K군의 머뭇거림에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이걸 몰라? 뇌염 걸린 뇌염모기 성대모사잖아. 이건 목 없는 목도리 도마뱀이고!” 그 때 누군가 남자의 옆구리에 낀 낡은 신문 뭉치를 장작으로 써도 되겠냐고 묻자 남자가 버럭 화를 냈다. “이거 나랑 국민배우 L양이랑 결혼설 났던 자료야! 구하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무리한 성형으로 이마와 콧날의 옆선이 같은 높이에 달한 듯한 여자는 자신의 (여고) 졸업 사진으로 추정되는 것을 대형 패널로 만들어 들고 있었다. “아이 씨, 나도 빨리 캐릭터 잡아야 되는데 뭐하지? 구구단 말고 알파벳 못 외우는 콘셉트로 할까? 의외로 귀엽다고 할 것 같지 않냐?” “넌 그냥 한글도 못 외우게 생겼어.” “뭐? 이런 씨베리아 벌판에서 얼어 죽을 년 같으니 십장 개나리를 봤나 시베리아 벌판에서 귤이나 까…야, 나 그냥 이 캐릭터 할까봐. 욕쟁이 소녀!” 아직 고등학생인 듯한 걸 그룹 멤버들이었다. “불 좀 빌려주시겠어요?” 돌아본 K군은 움찔했다. 기골이 장대한 또래의 남자가 핑크색 가발에 세일러복 차림으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한 때 아이돌계의 군기반장으로 불리던 P군이었다. 90도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기실에서 단체로 원산폭격을 시켰던 P군은 담배를 난로 속으로 던진 뒤 몇 걸음 떨어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빠 나 좀 봐~ 내 말 좀 들어봐~ 똥땡으도만 탱각하디는 마요~♬” 어둠 속에서도 귀엽게 부풀린 볼이 눈에 들어오던 순간 멀리서 외침이 들려왔다. “감독님 오셨습니다!”

“아! 사실은 제가 아네모네의 샛별 씨하고 좀 만났는데요…” “그래?” PD가 눈을 번뜩였다. “그, 그게…처음에 제가 음료수를 주면서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서 줬더니 연락이 와 가지고, 통화도 하고…주말에 명동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다른 멤버가 그걸 알고 매니저 형한테 일러서 형이 저를 숙소에 가두고 외출 금지를 시켰어요. 그 후로는 아네모네하고 스케줄도 다 따로 잡아서…몇 년 뒤에 샛별 씨를 방송국에서 마주쳤는데 저를 되게 슬픈 눈으로 보고 가시더라구요. 이 자리를 빌어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고,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꼭 전하고 싶네요.” K군에 이어 PD마저 감동한 눈빛이었지만 샛별과는 야외 행사 때 다 같이 음료수를 나누어 먹은 것 외엔 말 한 마디 못해본 사이였다. 지난 한 달 간 선임 아이돌 연애 폭로 전문가 N군이 출연한 토크쇼를 섭렵한 덕분이었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일러스트. 그루브모기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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