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연희 작가│나를 푹 빠져들게 만든 드라마
목연희 작가│나를 푹 빠져들게 만든 드라마
2000년, 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신기한 시트콤이 등장했다. 가족 시트콤과 청춘 시트콤이 주를 이루고 방송에서 ‘성(性)’은 여전히 성역에 속하던 시절, 서른이나 먹은 남자 셋이 모여 다니며 “작업 들어간다~”를 외치고 성전환, 관음증, 혼전 임신, 동성애 등 만만찮은 소재들이 은근슬쩍 펼쳐지는 이 작품은 월요일 심야 시간대 시청률 선두를 달리며 성공했다. MBC 얘기다.

“서른이 되어도 철없고, 그러면서도 이십대더러는 ‘니들이 뭘 알아?’ 하며 무시하는 남자들의 성장기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남자들 얘기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당시 주인공들이 제 또래여서 친구처럼 느끼며 썼던 것 같아요.” 목연희 작가는 당시 송창의 감독과 함께 를 만든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밤 11시에 삼십대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리려면 수위가 어느 정도 올라갈 수밖에 없었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일찌감치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민감한 소재를 불편하지 않게 보여주기 위해 한 아이템으로 한 달 이상 회의를 벌인 적도 있다. “극 중에서 다훈(윤다훈)이가 만나는 여자가 정말 예쁜데 ‘암내’가 나는 거예요. 다뤘다가 욕먹거나 누가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고민도 있었지만 암내가 범죄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어떤 것에서 오는 공감대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아주 심플하게 의정(이의정)이가 ‘어머 언니, 겨드랑이에서 냄새 나. 근데 이거 수술로 나을 수 있대’ 하는 걸로 풀었어요. 괜히 빙빙 돌려 말했다면 더 이상했겠죠.” 커플이 여관에 들어가는 모습조차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어렵던 때라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더 쏟아졌다. 다훈이 치킨 집 아줌마에게 농락당해 하룻밤을 보내는 에피소드는 다음 날 아침 울면서 집에 들어오는 것으로 생략의 묘를 살렸다. 문숙(안문숙)이 면허를 딴 뒤 처음 운전을 하면서 차선 변경을 하지 못해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까지 갔던 사연은 작가 본인의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물론 전 끝까지 가진 않았어요. 고속도로를 타긴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밤 열 시까지 하는 야간 자율학습에서 탈출해 집에 와서 TV 보느라 정신없었고 “모든 코미디 프로그램과 드라마를 다 봐야 하는데 엄마가 못 보게 하니까 이불 속에 숨어서 보다가 ‘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냐. 너처럼 TV 많이 보는 애가 어디 있냐’고 두들겨 맞기도” 했던 추억만큼 웃음도 많은 목연희 작가가 일을 시작한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다. 쇼와 코미디를 거쳐 MBC , SBS , 등을 집필하다 보니 시간은 개편을 따라 빠르게 흘렀다. “봄에 시작한 작품을 쓰다가 어느 날 밖에 나가보니 낙엽이 지고 있었던 적도 있고, 매일 집에서 글만 쓰니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냐’며 경비 아저씨가 확인하러 올라오신 적도 있어요. (웃음)” 일에만 매달리다 건강이 악화돼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에게 “두 달 뒤 종영하면요”라고 대답하기도, 친구나 가족을 만날 수가 없어 어머니로부터 ‘미국 간 딸’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는 그가 계속 일할 수 있었던 힘은 열정 그 자체다. 한 작품이 끝나면 ‘다시는 이렇게 힘든 일 하지 말아야지’ 결심했다가도 몇 달 지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 쓰고 싶은 캐릭터가 떠오른다는 목연희 작가가 자신을 푹 빠져들게 했던 드라마들을 골랐다.
목연희 작가│나를 푹 빠져들게 만든 드라마
목연희 작가│나를 푹 빠져들게 만든 드라마
MBC
1987년. 극본 김수현, 연출 최종수
“, 같은 드라마를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특히 은 하루 건너뛰면 다음 날 수업이 귀에 안 들어올 정도로 좋아했어요. 당시는 누가 쓴 작품인지도 모르고 봤지만 김수현 선생님 특유의 흡인력이 정말 대단했던 것 같아요. 故 남성훈 씨와 차화연 씨 커플도 기억나고, 어머니 역 김용림 선생님의 압도적이고 서슬 퍼런 기운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언젠가 제 작품에 무서운 시어머니 역으로 꼭 모시고 싶을 정도에요. 그리고 주인공 형제 중 동생 역으로 출연하셨던 이덕화 선생님도 정말 좋아해서 나중에 KBS 에 섭외할 때 따라갔어요. 에 대한 자세한 기억들을 다 말씀드렸더니 참 좋아하시더라구요. (웃음)”
목연희 작가│나를 푹 빠져들게 만든 드라마
목연희 작가│나를 푹 빠져들게 만든 드라마
SBS
1998년. 연출 김병욱, 극본 송재정 외
“당시 저도 다른 시트콤 작가로 일하고 있었는데 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다시보기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라 회의하다가도 방송 때가 되면 보러 가겠다고 해서 PD가 삐지고, ‘그럼 당신도 그런 걸 써보란 말야!’하고 구박했을 정도였죠. (웃음) 가끔 회의가 늦게 끝나 못 보게 되면 동생이나 친구더러 부탁해 그 날 누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어 달라고 했을 정도였죠. ‘왜 나는 저렇게 못 쓰지?’ 하며 일의 차원에서 접근했다면 스트레스였겠지만 나중에는 제가 보면서 스토리를 적어놨다가 다시 읽어보고 혼자 좋아할 정도로 그 자체가 즐거웠어요. 그런데 그게 나중에 다른 시트콤을 하면서 인물의 관계를 만들거나 에피소드를 뽑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은 텍스트가 된 것 같아요.”
목연희 작가│나를 푹 빠져들게 만든 드라마
목연희 작가│나를 푹 빠져들게 만든 드라마
SBS
2004년. 연출 최문석, 극본 김기호
“에서 가장 대단한 점은 수정(하지원)의 심리를 너무 잘 그렸다는 거에요. 그 전까지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꼭 한 사람만을 좋아해야 사랑받을 수 있었는데 수정은 이 남자에게 끌리면서 저 남자에게도 끌리는, 그리고 현실적인 조건에도 마음이 움직이는 캐릭터였잖아요. 그 입체적인 감정을 정말 잘 그려냈어요. 물론 그게 소지섭과 조인성이라는, 어느 한 쪽을 고르기 힘든 두 남자로 인해 힘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웃음) 벌써 여러 해가 지난 작품인데 이런 이야기를 이 이상으로 잘 표현해 낸 드라마가 없는 것 같아요.”
목연희 작가│나를 푹 빠져들게 만든 드라마
목연희 작가│나를 푹 빠져들게 만든 드라마
지난 해 목연희 작가는 의 10년 뒤 모습이라 할 수 있는 tvN 를 집필했다. 서른과 달리 마흔이나 먹은 남자들의 여전한 철없음은 만큼의 뜨거운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청순한 이미지의 우희진은 불같은 성미의 유부녀로 성공적인 변신을 거뒀고 정웅인이 연기한 노총각 ‘초식남’ 역시 흥미로운 캐릭터였다. 그리고 요즘 그는 처음으로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 처음 방송 작가를 꿈꾸었을 때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그리고 싶었던” 갈망이 오랜 시간을 거치며 운명적 사랑을 다룬 멜로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호기심이 많아 궁금한 것에는 집요하게 매달리고 기타노 다케시의 작품이 주는 페이소스를 좋아하는 목연희 작가와 멜로드라마에 강하기로 이름난 감독의 만남은 과연 어떤 앙상블을 빚어내게 될까.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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