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작가라고 해서 하루하루 시트콤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MBC <지붕 뚫고 하이킥>의 순재(이순재)처럼 몸 개그를 하거나 정음(황정음)처럼 실없는 말장난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그 대신 <지붕 뚫고 하이킥>의 ‘새우등’ 이영철 작가는 심야 라디오 방송의 DJ처럼 중후한 저음으로 차분하게 고백했다. “사실 저는, 별 생각이 없는 사람이에요.”

어릴 때도 ‘그냥 생각 없는 애’ 였던 그는 자라서 ‘별 생각 없이’ 철학과에 입학했다. 제대하고 돌아오니 친구들 모두 군대에 끌려가고 여자 동기들은 모두 졸업한 뒤였다. 때마침 IMF까지 겹쳐 우울한 나날, 유일한 낙이던 SBS <순풍 산부인과>를 보다가 아이템 작가를 구한다는 소식에 역시 ‘깊이 생각 안 하고’ 지원했다 합격했다. 당시 천리안 <순풍 산부인과> 시청자 모임에서 만난 여자 친구와는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주례사에도 <순풍 산부인과> 얘기가 들어갔고 그 후 10년 가까이 <뉴 논스톱>부터 <논스톱 5>, <레인보우 로망스>까지 MBC 청춘 시트콤을 썼으니 시트콤 같은 삶은 아니더라도 그의 삶이 시트콤과 뗄레야 뗄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팬 입장에서 처음 만났던 김병욱 감독과는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함께 일하게 됐다.

“시트콤 작가로 오래 가는 사람들을 보면 관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걸 통해 별난 상상을 한 번 더 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힘들 만큼 많은 얘기가 쏟아졌는데, 거기에 ‘더하기 1’을 해서 어떻게 다른 걸 만드느냐가 필요한 거죠.” ‘별 생각 없이 산다’며 스리슬쩍 넘어가려던 모습과 달리 시트콤에 대한 그의 생각은 깊은 만큼 넓다. “이렇게 말하자니 약간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웃음) 그냥 한 번 웃고 마는 것보다 보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면 좋겠어요. 적극적으로 문화생활을 누릴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겐 세상에 더 재밌는 게 많겠지만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TV라는 매체가 점점 중요해지거든요.” 그래서 전작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지루한 일상을 날려버린다!”라는 카피를 직접 쓰기도 했던 이영철 작가가 ‘지루한 일상을 날려버리는 드라마’들을 몇 편 더 소개했다.

SBS <순풍 산부인과>
1998~2000년. 극본 연출 김병욱, 주병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건 진짜 ‘사람 사는 얘기’를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누구나 살다가 실제로 할 만한 실수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이 못난 사람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여주니까. 한번은 영규(박영규)가 장인어른(오지명) 심부름으로 큰돈을 전달하러 가는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물론 결국은 돈을 잃어버리죠. 집에 와서 욕 들어먹고 침대에서 발버둥 치면서 끝나요. (웃음) 어떻게 보면 이런 건 도저히 얘기가 될 수 없는 건데, 잃어버릴 때까지의 과정을 엄청나게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면서 캐릭터에 공감하도록 만드는 게 <순풍>의 힘이었죠.”

SBS <연애시대>
2006년. 극본 박연선, 연출 한지승

“방송이 끝난 뒤에 김병욱 감독님이 정말 재밌다고 추천하셔서 보게 됐는데 정말 좋았어요. <모래시계>가 예전에 그랬던 것과 또 다른 세련됨이 느껴졌어요. 우리도 스토리라인을 만들 때 얘기를 많이 하는데, 만약 남녀가 있다면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죠. 그걸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만드는 사람의 차이인데 <연애시대>가 보여주는 방식은 색달랐어요. 여주인공의 눈물을 보여 줄 때도 우는 걸 직접 보여줄 수도 있고, 떨어지는 눈물을 비출 수도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뒷모습을 보여주고 마주 오는 행인의 입을 통해 ‘저 여자 왜 울어?’라고 물어요. 그런 디테일 하나하나가 좋은 드라마와 그렇지 않은 드라마를 가르는 것 같아요.”

美 <30 Rock> NBC
2006년~

“인간의 치사하고 소심한 면을 재미있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김병욱 감독님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30 Rock>은 그 나라 문화적 특성상 더 독하죠. 둘러가지도 않고, 위선을 떨지도 않고, 사람은 다 세 끼 밥 먹고 싸는 존재라는 걸 너무나 정직하게 얘기해요. 극 중에서 방송사 사장인 알렉 볼드윈이 인기 작가인 티나 페이에게 ‘니가 그 일 언제까지 할 것 같냐’라고 물으면 일에 모든 걸 바친 티나 페이가 ‘한 4, 5년 하지 않을까’ 대답하는데 거기다 대고 ‘내가 보기엔 내년까지다. 다음엔 뭐 할래?’ 라고 받아치는 장면이 있어요. 그 대사도 어느 작가가 썼을 텐데. (웃음) 그래서 더 통쾌하고 재밌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묻어두는 게 더 많은 사람들에겐 특히 더 그렇지 않을까요.”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는 식의 타협은 없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웃음과 눈물이 교차되는 순간들로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세 명의 집필 작가와 세 명의 아이템 작가, 김병욱 감독이 매주 다섯 편, 열 개의 에피소드를 만들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지만 6개월 동안의 긴 여정은 시간이 갈수록 버거워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꼭 이야기하고 싶은 아이템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영철 작가는 당연한 듯 대답했다. “어떻게든 하게 되지 않을까요? 시간이 없어서 하고 싶은 얘기를 못 한다는 식의 타협은 없는 것 같아요. 그림이 그렇게 멋지게 나오지 않더라도, 이야기만 좋다면 하게 되겠죠. 물론 UFO가 날아다니고 서울을 부숴버리는 건 어렵겠지만. (웃음)” 하긴, 벌써 터미네이터 패러디에 ‘신애와 애기똥’ 에피소드에서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낸 이들이다. 앞으로도 몇 달 간,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겠다. 그래서 신이 난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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