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우 작가는 말수가 많지 않은 사람이다. 대전에서 태어나 자랐고 대학에 입학할 때가 되어서야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는 그는 ‘충청도 사람’에 대한 속설을 보여주듯 느릿하게 입을 열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박진우 작가와 단 10분 만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알 수 있다. 이 선하게 웃음 짓는 곰 같은 체구의 중년 남자가 세상 어떤 것에든 뚜렷한 주관과 할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군가 묻기 전에는 나서지 않더라도 가슴 속에 오래 지니고 있다 꺼내놓는 말은 가볍지 않은 법이다. 2007년 여름, 한국 드라마에 묵직하면서도 예리한 자취를 남긴 KBS <한성별곡-正>(<한성별곡>)이 바로 그런 작품이었다. “원래는 왕이 일찍 죽고 난 다음의 이야기를 다룬 수사물로 단막극을 기획했다가 <드라마 시티> ‘그들의 진실’을 함께 했던 곽정환 감독과 8부작을 만들기로 하면서 캐릭터들의 정치색이 강해졌지요. 그 당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19세기 조선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신인 감독과 신인 작가가 머리를 싸매고 몸으로 부딪혀 어렵게 탄생시킨 <한성별곡>은 기존의 <조선왕조 5백년> 스타일의 사극을 넘어 보는 이들을 향해 왕권과 정치, 힘의 논리, 계급간의 갈등, 역사의 흐름 안에서 개인의 욕망과 이상 등 다양한 지점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옳은 거니까 믿고 따라오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런 것들이 있다는 걸 쭉 펼쳐놓고 보여주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려고 했지요.”

88학번인 박진우 작가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동년배들 대부분이 그랬듯 학생 때는 데모를 했고 졸업 후에는 “입사 시험 없고 학점 보지 않는 직장을 찾던 중” 보험 회사에 들어가 영업 관리직으로 7년을 일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의 삶을 바꾼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나라를 뒤흔들었던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였다. “저거다, 한 번 해보자. 하고 싶은 일을 해 보는 것과 안 하는 건 차이가 크다고 생각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지요.” 아이가 세 살이었지만 과 동기로 만나 결혼한 아내는 그를 믿고 지지해 주었다. 2005년 KBS 공모전에 당선되며 데뷔했고 몇 편의 단막극을 쓴 뒤 <한성별곡>을, 정진옥 작가와 함께 <바람의 나라>를 썼다. 그 사이 마흔 하나가 된 이 ‘대한민국 중년’은 오래 기다린 만큼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美 <하우스> FOX
2004년~

“공모전을 준비하던 시절, 부인은 회사 가고 애는 어린이집 가서 집에 혼자 있을 때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되는 걸 보기 시작했어요. 기존의 의학 드라마와 다른 접근 방식도 재미있었지만 닥터 하우스라는 캐릭터가 너무 멋져서, 나도 언젠가 저런 인물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하우스는 상대방이 싫어할 만한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하는데 사실 그게 맞는 얘기고 상대에게 필요한 거니까 의사로서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그가 세 명의 팀원을 이끌면서 치료법을 찾아 나가는 과정도 굉장히 훌륭했어요. 그런데 영화 <식코>를 보고 미국 의료보험 제도의 실체를 안 뒤로는 이 작품도 그 전처럼 즐겁게만 볼 수는 없게 됐지요.”

美 <보스턴 리걸> ABC
2004년~

“<보스턴 리걸>은 ‘크레인, 폴&슈미트’라는 법률 사무소가 배경으로 이들이 수임하는 각종 사건들을 법정에서 다루는 방식을 그린 드라마에요. 캐릭터가 굉장히 재미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법률 드라마에서는 케이스 자체가 작품의 톤을 결정하기 때문에 정말 다양하고 흥미로운 사건, 때로는 말도 안 될 것 같은 사건을 소재로 삼기도 해요. <보스턴 리걸>은 특히 법 뒤에 숨어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을 법정으로 끌고 와 신랄하게 비판할 때 진가를 느낄 수 있는데 광우병에 대한 논쟁을 그린 에피소드가 정말 훌륭했지요. 제가 법률 드라마를 쓰게 된다면 이렇게 법이 갖는 이중성에 대해 제대로 다뤄 보고 싶어요. 그건 결국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지 못하다는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거든요.”

<시티홀> SBS
2009년 극본 김은숙, 연출 신우철

“어차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중요한 건 어떻게 하느냐 인데, 똑같은 얘기를 해도 누구는 한 명에게 보여주고 누구는 백 명에게 보여줬다면 백 명에게 보여준 게 옳은 거라고 생각해요. <시티홀>은 우리가 <한성별곡>에서 하고자 했던 얘기를 신랄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러면서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 준 작품이었어요. 곽정환 감독도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 다 했다’면서 반성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정말 반성 많이 했지요. 심각한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구나. (웃음) 그래서 다시 <한성별곡>을 쓴다면 좀 더 쉽게, 적당히 호흡을 조절해서 보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지 않으면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평소 잘 보지 않았던 여러 가지에 대해 한번쯤 관심을 갖게 만들고 싶어요. 정치든 역사든, 혹은 우리가 흔히 선망하는 어떤 대상의 이면이든. 그 모든 것이 우리 각자의 삶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드라마를 통해 무엇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박진우 작가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작가 자신이 만들어낸 판타지 월드로 들어가 버리기보다는 ‘진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끝까지 고민해야 한다고 믿는 그가 앞으로 ‘잘 팔리는’ 작가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라도 백신이 필요한 때가 오는 법이다. 주사약이 그랬듯, 드라마도 그럴 것이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