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피난을 떠나던 시골 마을의 주민들이 어떤 피난민도 전선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은 미군들에 의해 노근리 쌍굴 다리 아래에서 떼죽음을 당한다. 이 문장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작은 연못>은 현대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들처럼 사실을 그대로 찍어내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김민기의 노래 ‘작은 연못’에서 제목을 따온 이 영화는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과 같은 산골짜기 대문바위골에 닥친 비극을,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가며 보여주는 어느 찰나의 표정으로, 목소리로, 손짓으로 드러낸다. 영화 속 사람들의 사연은 픽션이지만, 진실이기도 하다. <작은 연못>은 2001년 AP통신에 의해 알려진 노근리 사건을 적극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한 영화인들의 참여로 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뒤 6년 만에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PIFF) 갈라프레젠테이션으로 첫 상영될 수 있었다. <작은 연못>은 “대문바위골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던 이상우 감독의 말처럼, 10월 12일 첫 상영 전에 감독을 포함해 20명이 넘는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밟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다음은 공동 제작자 이우정과 장성호, 연극연출가 출신의 감독 이상우, 배우 문성근, 김뢰하, 신명철, 김승욱, 민복기, 이대연까지, 영화 <작은 연못>을 ‘보여주기’ 위해 오래 기다려온 사람들이, 오래 기다려 준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들려주는 지난 6년에 대한 기록이다.

‘노근리 사건’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눈에는 객관적이지 않은 것으로 비추어 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극 속에서 미군의 입장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도 일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객관과 주관, 허구와 픽션 사이에서 개인적인 원칙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나?
이상우
: 우스운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인간이 하는 생각 중에 객관적인 시각은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시대적 정의와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판단이 우선할 필요가 있다. 사실을 대체 왜 ‘보여주느냐’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과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관점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가장 먼저 마을을 떠나는 박광정네 가정, 찍은 후 고인이 되고 무척 가슴이 아팠다”

최고령자는 아니지만 문성근 씨의 경우, 나이에 있어서나 역할이 팀을 이끌어가야 하는 느낌이었는데, 영화가 만들어진 것에 대한 감회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면.
문성근
: <작은 연못>은 사실 쉽지 않은 영화다. 제작은 결정되어있는 상황이었지만, 영화는 산업이기 때문에 꼭 만들어졌으면 하는 영화가 만들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 우리가 힘을 합쳐서 할 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후배들이 자기 작업을 하고 있는 바쁜 상황들 속에서도 각자 자기 일정에 맞게 다녀갔다. 현장에서는 우스갯소리로 계속 현장에 있었던 배우들은 노예라고 불렀고, 송강호처럼 딱 한 번 나오는 배우들은 왕족이라고 불렀다. 그 외에는 연극을 하는 친구들을 서울에서, 촬영을 하던 지역 근처에서 불러 함께 연기했다.

<작은 연못>이 故 박광정의 유작이기도 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작은 연못>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소개해 달라.
이상우
: 워낙 오랫동안 함께 일해 왔던 친구라 돌이켜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후시 녹음할 일이 있어서 녹음을 급하게 하고 바로 그 날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는데, 17~8년 간 같이 연극을 했던 친구의 유작이 우리 작품이 되어 가슴이 아프다.
민복기 : 시람들이 피난을 가는 길에서 가족단위로 이탈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가장 일찍 마을을 떠나는 가족이 박광정네 가정이다. 찍은 뒤, 고인이 되고 나서야 그 장면이 그런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무척 가슴이 아팠다.

영화 현장이 배우들에게 소중했을 것 같은 작품인데, 현장에서 즐거운 일은 없었는지?
김뢰하
: 소풍 나온 듯 한 기분으로 굉장히 즐겁게 작업을 했다. 다른 배우들과 냇가에서 고기 잡으며 매운탕 만들어 먹고, 또 시간이 되면 촬영하러 가고. 이 영화 덕분에, 이 나라 참 좋은 데 많구나, 물고기 맛있구나 하는 걸 처음 느껴봤달까.
이상우 : 재미있게도 김뢰하가 촬영 도중에 결혼했다. 하루 촬영을 쉬고 모두 결혼식장에 갔다가, 다시 신부를 데리고 촬영장으로 돌아가 촬영장 근처에 여관을 잡아줬는데, 그렇게 첫날밤을 보낸 바로 다음 날부터 부부가 함께 영화에 출연 하게 했다. (웃음)
문성근 : 사실 동인제 공동체라는 성격이 강하다. 극단 모두가 가족이나 마찬가지고, 그런 힘이 이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줬던 것 같다.

배우들은 수많은 연극연출가, 영화감독과 작업을 해왔을텐데, 연극 연출의 거장이기는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다르기 때문에 배우들은 차이를 느꼈을 법도 하다.
문성근
: 시나리오 작업을 여러 번 하셨다고 들었다. 만약 평범한 영화감독이라면 몇몇 한 두 가족 중심으로 해서 극화를 하고자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상우 감독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이 사건을 담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50명을 주인공으로 삼으면 어떨지를 생각해본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20여년 연극을 하면서 만나온 배우들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나갔을 것이다. 하루 이틀 작업을 하면서 ‘아, 이건 시(詩)구나. 음악이 있는 시구나’라고 생각했다.
김승욱 : 가장 좋았던 점은 어린 친구들의 인내심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어린 출연자들에게 ‘할아버지 감독님’이라고 부르게 하고 손을 잡고 다니던 그 모습이다.

“‘작은 연못’ 가사를 보면 이 영화에 대한 이해가 될 것 같다”

영화 제목 <작은 연못>도 그렇고 김민기 노래가 영화를 채우고 있는데, 김민기의 노래들을 영화에 꼭 쓰였으면 했던 이유는?
이상우
: 김민기와 잘 아는 사이인데 이 영화의 정조가 김민기와 딱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게 해달라고 했더니 자신이 직접 부르지 않겠다는 조건 하에 허락을 해주었다. 처음 해보는 이야기 인데 어차피 초짜인데 욕심내지 말고 김민기 음악을 가지고 뮤직비디오를 만든다는 기분으로 그린다면, 마을의 정경과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살아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연못’ 가사를 보다보면 이 영화에 대한 이해가 될 것 같아서.

만들어지고 나서도 개봉을 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화제가 되었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
이상우
: 만들고 나서 오래 기다린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후반작업이 완전히 끝난 것은 사실 올해 여름이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 3년이 되었을 뿐이다.
장성호 : 후반 작업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제작비가 없었기 때문에 오래 걸린 것도 있고, 스태프들이나 배우들에게 도움을 받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서로 예의를 지키고 배려를 하느라 오래 걸린 점도 있다.(웃음)

이상우 감독은 연극 작업만 하다가 영화 연출을 맡게 되면서 연출 면에서 어떤 차이를 느꼈는가?
이상우
: 못할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해 왔다. 동료 영화감독에게 조언도 많이 구했다. 또 하나의 고민은 ‘왜 하필이면 영화여야만 하는가’라는 것이었는데, 그런 질문에 대해 답해가는 과정이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촬영하는 도중에는 ‘잘 모르니까 거짓말을 하지 말자’, ‘카메라 가지고 거짓말 하지 말자’, ‘(스태프들에게)내가 뭘 하고 싶은지 밝히고 하자’라는 식의 원칙이 있었다. 연극과 영화라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어서 배운 것이 많았다는 생각이다. 영화 찍는 도중에는 잘 몰라서 용감했다는 생각도 들고.

영화를 오랫동안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영화를 통해 영향을 끼치고 싶었던 부분이 있지는 않았는지?
이상우
: 연극을 30년 동안 해오면서 한 번도 의도를 가지고 해 본 적이 없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자세가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게 나만의 방식이다. 영화는 연극보다 ‘보여주고, 보는’ 식으로 한 방향으로 전해지는 매체이기 때문에,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보여주는 것으로 끝내고 남은 부분의 판단은 관객에게 맞춰야 한다. 소위 예술이라는 장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제안을 하거나 문제제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글. 부산=윤이나 (TV평론가)
사진. 부산=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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