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싱어와 김지운은 닮았다. 두 감독은 매번 전혀 다른 외향의 작품들을 만들면서도 영화에 자신만의 인장을 꾹 눌러낸다. 획기적인 반전이 뒤통수를 가격하는 이야기, 미스터리 스릴러, 슈퍼 히어로물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종횡 무진하는 브라이언 싱어. <유주얼 서스펙트>, <엑스맨>, <슈퍼맨 리턴즈> 등 그의 영화들은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다 다르지만 “모두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진심이 담겨있어, 브라이언 싱어라는 신뢰받는 브랜드를 구축했다. 김지운 또한 <조용한 가족>, <반칙왕>,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 <놈놈놈>까지 공포와 코미디, 느와르와 웨스턴 무비 등 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들에겐 장르로 창작 활동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도, 두려움도 없다.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PIFF)가 아니었다면 나란히 <엑소시스트>를 최고의 영화로 꼽고, 서로에 대해 꼭 닮은 평가를 내리는 브라이언 싱어와 김지운을 한자리에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전날 과음을 했지만 사회를 맡은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질문에 이보다 더 성실할 수 없는 답변을 내놓은 두 감독의 오픈토크 현장이다.PIFF는 매일이 여러 가지 사건으로 활기 넘치지만 토요일 밤이 가장 뜨겁다. 두 감독은 토요일 밤을 어떻게 보냈나?
김지운: 어제는 뜨거운 밤은 아니었고, 갈 곳이 없어서 차갑게 방에서 일찍 잤다. (웃음) 보통 PIFF가 영화의 바다, 술의 바다라고 말을 많이 하는 만큼 브라이언 싱어와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물론 영어 실력 때문에 많은 얘기는 못했다. (웃음) 그런데 브라이언 싱어는 정말 끊임없이 보드카를 마시더라.
브라이언 싱어: 보드카를 많이 마시긴 했는데 김지운 감독도 만만치 않았다.
김지운: 난 보드카처럼 보이는 생수를 마신 거다. (웃음)
“한국 영화계는 감독에게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는 듯”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기억이 엇갈리고 있다. (웃음) 두 사람이 서로의 영화를 대단히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다.
브라이언 싱어: 사실 김지운 감독의 가장 놀라운 점은 매 작품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굳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굳이 고르자면 <달콤한 인생>이다. 그래도 워낙 존경하는 감독이라 하나만 꼽기가 힘들다.
김지운: 데뷔작이자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던 <퍼블릭 액세스>만 빼고 브라이언 싱어의 전 영화를 다 본 거 같다. 놀라운 건 모든 영화가 매번 장르와 사이즈를 바꿔가면서도 항상 좋은 성과를 거둔다는 것이다. 브라이언 싱어는 손대는 것 마다 성공하는 미다스의 손이 아닐까? 많은 분들이 그를 <유주얼 서스펙트>부터 알게 됐을 것이다. 보통 반전이 놀라운 영화들은 다시 안 보게 되는데, <유주얼 서스펙트>는 다시 봤을 때 브라이언 싱어의 진가가 나오는 것 같다. 경천동지할 만한 반전을 향해 캐릭터를 사용하고, 배우에게 특정한 디렉션을 내려 구현된 완벽할 만큼 천재적인 연출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엑스맨>도 처음 제작 소식을 접했을 땐 가이 리치처럼 자기 스타일을 스타일리하게 발전시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너무나 무겁고 진지한 주제라서 굉장히 놀랐다. 그건 마치 마이클 베이가 오백만 불짜리 유색인종의 인권 영화를 만들거나 쿠엔틴 타란티노가 <사운드 오브 뮤직>을 리메이크하겠다는 것과 같은 정도로 강렬하고 신선한 진짜 반전이었다. 자신의 스타일을 잃지 않으면서도, <엑스맨>을 단순하고 멍청한 블록버스터가 아닌 소수자의 딜레마에 대한 묘사가 탁월한 영화로 만들었다. 끊임없이 그는 소수자가 단단한 기존의 세계와 충돌하고 화해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브라이언 싱어는 단순히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묵직한 주제를 가진 천재적인 감독이 아닌가 한다.
현재 할리우드 영화 시나리오를 막 탈고한 걸로 알고 있는데, 준비하면서 할리우드 사람들을 많이 접촉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영화인들과 어떻게 다르던가?
김지운: 할리우드는 다음 스텝으로 가는 걸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건 시스템의 차이도 있고, 내가 현지 영화계를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기질은 다 비슷한 것 같다. 좋은 영화를 좋아하고, 될 만한 영화에 투자하려고 하고.
지난 봄 <작전명 발키리> 내한 때도 한국 영화인들을 적극적으로 만났고, 이번에 PIFF에서도 그렇다. 직접 만나본 한국 영화인들과 함께 일하는 할리우드 사람들과의 차이점이 궁금하다.
브라이언 싱어: 가장 큰 차이는 한국은 최종 편집본에 대해 감독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주는 것이다. 한국 영화계에서는 감독이나 영화를 직접 만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는 것 같다. 할리우드 영화는 워낙 방대한 예산이 투여돼서 감독에게만 모든 걸 맡기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다. 그래서 감독이 단순히 영화만 잘 만든다고 끝이 아니라, 스튜디오에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신뢰를 얻기 위한 추가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김지운 감독이 예측불가능하다고 말했는데, 나도 예측하기가 힘들다. 사공이 너무 많다보니 배가 어디로 갈 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 된 거지.
“일상과 다르게 촬영장에선 강한 사람이 된 것 같다”
두 감독 다 기본적으로 장르영화의 테두리 안에서 작업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르영화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나, 장르영화를 할 때 감독으로서의 이점이 있나?
브라이언 싱어: SF나 판타지 장르가 좋은 이유는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냥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매일 뉴스에 나오니까 재미가 없는데, SF로 변장을 시키면 사람들이 기존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면 <엑스맨>은 사회구조,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다루면서도 초능력 같은 인간 세상에서 가능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화면으로 실현하는 것과 관객들을 속이는 게 재밌다. 관객들은 <엑스맨>을 화려한 액션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당신의 이야기와 나의 메세지가 담겨 있다.
김지운: 어떤 장르를 정했다는 사실은 곧 주제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느와르를 선택했다면 파멸을, 호러를 선택했다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SF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사랑에 대한 영화는 무언가 상실했을 때의 두려움과 환희를 말한다는 식으로. 장르 자체에 주제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또 장르영화에는 만드는 사람이 클리셰를 새롭게 재편할 수 있는 쾌감도 있다. 좋은 영화에는 신선한 클리셰들이 나온다. 서부영화에서 바람이 지나가고 롱코트 자락이 펄럭이는 것처럼 매번 봐도 좋은 장면들이 있지 않나. 그런 클리셰들을 사용하면서도, 새롭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영화 만들기의 즐거움이 있다. 장르 자체에 내가 말하고 싶은 주제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나 대사를 통해 전달하는 것 보다는 장르 고유의 양식을 통해 주제를 표현한다. <달콤한 인생>도 느와르라는 장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명과 암, 상승과 추락, 어둠의 미장센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많은 감독들이 현장에서는 슈퍼맨처럼 보이지만 일상에서는 그렇지 않다. 심지어는 게을러 보이기까지 한 경우가 많은데 (웃음), 감독과 일상인으로서의 자신은 많이 다른가?
김지운: 별 차이 없는 것 같다. (웃음) 일상에서는 인자하다가 현장에선 제임스 카메론이나 마이클 베이처럼 폭군 스타일로 변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가끔 현장에서 내가 더 강하다는 생각은 있다. 일상에서는 조금만 추워도 옷을 껴입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에 무척 힘들어 하는데 현장에서는 그런 것들을 뛰어넘는 것 같다. 어떤 어려운 경우가 닥쳐도 상처 안 받고, 꿋꿋이 영화를 완성해가는 초인적인 느낌이랄까. 그건 책임감 때문일 수도 있고 배우, 스태프, 관객, 제작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브라이언 싱어: 원래 일상에서도 현장에서처럼 통제력에 대한 강박이 있다. 마이클 베이나 제임스 카메론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독재적이지 않나 싶다. (웃음) 김지운 감독이 말했듯 그런 통제 의지는 책임감에서 오는 것 같다. 그래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런 걸 버리려고 하는데, 사실 어려운 게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는 일상과 현장의 구분이 없어진다. 그때는 잠자러 갈 때도 일을 끌어안고 가기 때문에 두 세계를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엑스맨 3>를 만들지 않고, <슈퍼맨 리턴즈>를 만든 것을 아쉬워한다.
브라이언 싱어: 우선 <엑스맨 3>를 만들지 못해서 죄송하다. (웃음) 나도 하고 싶었지만 <슈퍼맨> 시리즈를 꼭 해보고 싶었다. <엑스맨> 같은 경우는 1, 2 시리즈를 합친 상영시간이 4시간 뿐이지만 만드는 데는 6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어차피 인생은 한 번인데 최대한 다양한 걸 하고 싶어서 를 택했다. 하지만 현재 <엑스맨> 시리즈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휴 잭맨을 비롯한 출연진들도 굉장히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꼭 해보고 싶다.
“<디파티트> 같은 경우가 진정한 리메이크 아닐까”
짐지운 감독의 <장화홍련>이 할리우드에서 <안나와 알렉스>로 리메이크되었지만 사실 그 영화가 원작에 비하면 사람들을 만족시킬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최근 한국의 영화들이 할리우드에서 많이 리메이크 되고 있지만 이 작품들이 원작과 다르게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왜 그럴까?
김지운: 왜 저한테 굳이 그런 걸 물으시는지… (웃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장화홍련>을 예로 든다면, 이 영화의 주제는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어떤 오브제나 공간에 의해서 환기되는 것이었다. 그런 요소들이 할리우드 시스템이나 서양의 사고 체계에서는 이해불가, 수용불가한 부분이 있긴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중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에서 완성도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오묘한 지점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다 보니까 오히려 오류를 범하게 된 것 같다. 살면서 느끼는 강렬한 느낌을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 차갑게 식어버리고, 감흥이 안 나는 것처럼. 마틴 스콜세지가 <무간도>를 <디파티트>라는 새로운 영화로 재탄생 시킨 경우가 진정한 리메이크가 아닌가 싶다.
흔히들 감독이나 배우가 해외를 방문하면 그 나라의 음식들이 얼마나 좋고 맛있는지 얘기한다. 그런데 그런 말은 식상하니까 각자 상대방의 나라에서 싫거나 힘든 음식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김지운: 양곱창 빼고는 음식을 안 가리는 편인데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 햄버거, 그것도 슈퍼 사이즈 햄버거다. 자꾸 흐르고 묻고 옷에 떨어지고. (웃음) 햄버거는 20대 이후로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다.
브라이언 싱어: 이런 질문은 너무 불공평하다. 여기서 미국 사람은 나 한 명인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서 그런 걸 묻다니. (웃음) 한국엔 무서운 음식이 많다. 부산에 와서 어제 해삼을 먹었는데 정말 이상했다.
김지운: 오늘은 한 번 개불을 먹여봐야겠다. (웃음)
글. 부산=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부산=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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