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종횡무진 다양한 이야기를 해온 그에게도 일관된 장기가 발휘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할 때다. 남자도 우아할 수 있음을 보여준 <달콤한 인생>의 선우는 그 자체로 수컷들의 로망이다. 그러나 진창에서 뒹굴 때조차 잃지 않았던 도도함에 거리에서 혼자 어묵을 먹는 굽은 어깨를 배치해둔 감독은 잘빠진 수트나 에스프레소로 간단히 압축해버릴 수 없는 남자를 만들었다. 그래서 순간순간 감정에 흔들리는 선우의 불안함은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치장된 허상이 아닌 ‘사람’을 그려내는데 모일 수 있었다. 그렇게 남자들을 세심하게 주조하는 솜씨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도 명민하게 도드라졌다. 명실상부 그 해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던 좋은 놈 도원, 처음부터 끝까지 아찔하게 악질이었던 나쁜 놈 창이, 가는 걸음 하는 말마다 웃음이 뚝뚝 흘러넘친 이상한 놈 태구까지, 거대한 스펙터클 안에서 쉽게 길을 잃을 수 있었던 캐릭터들은 살 냄새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김지운 감독은 손쉽게 마초로 재단되거나 의리로 질척거리지 않는 남자들을 제시했다. 그런 그가 남자들의 목소리를 추천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음은 자신이 만든 영화들의 삽입곡은 모두 직접 고르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CD부터 플레이하는 김지운 감독이 중독된 넘버들이다. 밤을 꼬박 새우며 기억에서 퍼 올린 이들의 음성은 그가 만든 영화들의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떨리게 할 것이다.
“스매싱 펌킨스의 대표작은
마치 신 세계를 여는 듯한 현악기의 도입부로 등장한 버브는 오아시스, 블러, 라디오 헤드 등과 함께 1990년대 영국 록의 상징이 됐다. 대표곡인 ‘Bitter Sweet Symphony’ 외에도 ‘Sonnet’, ‘Drugs Don`t Work’를 꼽은 김지운 감독은 보컬 리처드 에쉬크로포트의 목소리를 요즘 가수 중에 최고로 친다. “아무런 사심 없이 난 노래만 하고 싶다고 외치는 것 같은 그의 목소리는 곡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추구하는 데에만 골몰한 느낌이에요. 기름기도 없고 겉멋도 없으며 부족함도 없죠.” 그리고 리처드 에쉬크로프트처럼 노래하는 여가수 더피 역시 김지운 감독이 추천하는 보컬리스트. “이들의 깨끗한 정직성이 진중하고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의미파악 불능의 희망어로 부른 ‘Staralf’를 듣고 있으면 이런 소리가 천상의 목소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규어 로스는 음악이 단지 청각이 아닌 모든 감각을 일깨우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밴드다. ‘지구상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목소리의 소유자 보컬 욘시’가 부르는 노래는 누군가에게는 그들의 고향인 아이슬란드의 차가운 심해를, 누군가에게는 끝없는 우주를 유영한 끝에 만난 신의 광채를 살갗으로 듣는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리스트에 넣을 음악이 너무 많아 한참을 고민한 김지운 감독이 선택한 마지막 주인공은 탐 웨이츠다. 그래미상을 수상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커피와 담배>, <숏컷>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배우이기도 한 그는 김지운 감독에 따르면 ‘지상의 맨 밑바닥의 목소리’를 가졌다. 노래 부르는 사람의 인생사가 그대로 그려질 듯한 목소리로 자신의 노랫말 속으로 사람을 깊숙하게 잠기도록 하는 이 시대의 얼마 남지 않은 음유시인. “쳇 베이커도, 쥬케로도, 갱스부르그도 이런 목소리를 가졌어요. 하지만 ‘Hope I Don`t Fall In Love With You’ 같은 노래를 듣고 있을 때, 그가 두드리는 피아노 위에 타들어가는 담배 한 개비와 위스키 한 잔이 그려지는 목소리는 탐 웨이츠 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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