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10년의 내공? 1년의 준비 기간? 하지만 창작의 영역에서 이런 것들은 때때로 무의미하다. 2005년 MBC <추리다큐 별순검>(이하 <별순검>)이 만들어지는 데 주어진 시간은 고작 한 달이었다. “지금 다시 그걸 하라고 하면, 충분한 기획과 준비 과정을 거칠 테니까 결과물이 더 나을 수는 있는데 아마 못 만들 거예요. (웃음)” 김흥동 감독은 그 시절, 다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과정을 거치며 한국 사극의, 장르물의, 시즌제 드라마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별순검>을 탄생시켰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초창기 멤버로 시작해 3년 동안 매주 한 편씩 15~20분짜리 단편 재연물을 찍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지만 ‘드라마’는 처음이었다.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르면 무식한 만큼 용기가 생겨요. 자만심도 어떤 땐 원동력이 되죠. <별순검>을 할 때 만 서른 살이었으니까 해 볼 수 있었던 거예요.” 젊은 혈기와 제작진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파일럿에서 출발한 <별순검>은 정규 편성까지 이르렀다가 지상파를 떠나 MBC 드라마넷에서 시즌 2까지 만들어졌다. 그 사이 회사를 떠나 독립한 김흥동 감독을 비롯해 제작진과 배우들은 바뀌었지만 <별순검>은 여전히 한국형 장르물의 성공적 포맷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른 감독들과 달리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고 자란 김흥동 감독은 제대 후 아르바이트로 방송사 FD를 하다가 방송 일을 시작했다. “어쩐지 PD는 유유자적 편해 보여서”가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4학년 1학기를 마친 뒤 덜컥 MBC 프로덕션 공채에 합격한 뒤에는 적은 인력으로 많은 프로그램을 만드느라 <뽀뽀뽀>, <아름다운 TV 얼굴>, <아주 특별한 아침>, <화제만발 일요일> 등 여러 프로그램을 오가며 ‘실전’에 투입됐다. <서프라이즈>에서 쌓은 현장 경험이 가장 큰 무기였고 2000년 이후의 ‘미드’ 열풍에 앞서 불었던 80년대의 ‘외화’ 열풍 속에 키웠던 상상력이 그의 장르적 취향을 이끌었다. 비록 요즘 대학에서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브이>도, <에어울프>도, ‘체육관 대통령’도 몰라 세대 차이를 느끼긴 하지만 김흥동 감독은 여전히 가장 ‘젊은’ 두뇌를 가진 연출가 중 하나다.

美 <브이> NBC
1984년

“정말 많은 시리즈가 방송됐는데 지금 생각해도 최고는 <브이>였어요. 당시에는 군사정권 하여서 등화관제 훈련을 자주 했는데 <브이>가 끝나고 등화관제에 들어가 온 동네가 깜깜해지면 애들이 다 집 밖으로 나와서 달빛 아래 <브이> 얘기를 했거든요. ‘너 다이애나가 쥐 먹는 거 봤냐?’ 하면서. 물론 <전설의 고향>도 무서웠지만 어릴 때는 정말 외계인의 존재가 겁났고, 당시 초등학생에게는 미디어의 영향력이 엄청 강해서 그게 실제로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사실 외계에서 온 UFO가 항상 지구 상공에 떠 있다는 게 참 판타스틱한 설정이잖아요. 연출이 된 뒤에도 UFO가 나오는 걸 너무 찍어보고 싶어서 OCN <과거를 묻지 마세요>에 패러디를 하며 UFO를 만들어 찍었죠. 역시 재밌던데요.”

美 <에어울프> CBS
1984~1986년

“<에어울프>는 냉전 시대가 배경인데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KGB나 적국 스파이들이 대정부 테러나 위기를 조장하면 호크라는 주인공이 오토바이를 타고 그랜드 캐년 같은 곳에 찾아가요. 그 높은 봉우리 안에 있는 비밀병기가 ‘에어울프’라는 헬기인 거죠. 1인 히어로물인데 헬기가 정말 스타일리시하고, 거기 나오는 무기들이며 긴박감 넘치는 시그널 음악까지 그야말로 남자의 로망이었어요. 아직 우리나라에는 ‘맵시나’ 같은 자동차가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전격 제트작전>의 말하는 자동차 ‘키트’나 <에어울프>의 최신형 헬기에 대한 감동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어요.”

美 <맥가이버> ABC
1985~1992년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는데 의외로 그게 <별순검>의 과학 수사 아이템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과학은 논리인데, 드라마는 논리적이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감성도 논리적 기반 위에서 효과를 얻고 어떤 경우엔 논리 자체가 감성을 이끌어내기도 하거든요. <맥가이버>에서도 가장 재밌는 대목은 맥가이버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가 알고 있는 과학 상식을 총동원하는 거였잖아요. 그 한정된 상황에서, 이를테면 갖고 있던 껌하고 뭘 섞어서 폭발물을 만든다든가 아주 간단한 실험으로 범죄의 흔적을 찾는 과정 같은 게 최고였죠.”

“<별순검>을 이을 조선의 두 번째 프로젝트를 진행 중”

지난 해 여름 방송된 OCN <과거를 묻지 마세요> 이후 한동안 ‘프리랜서를 향한 차가운 바깥바람’을 맞으며 지내기도 했던 김흥동 감독은 요즘 <별순검>에 이어 ‘조선의 두 번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내년 초쯤 시청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이 작품에 대해 “나머지는 비밀이니 일단 기대하라”며 잔뜩 궁금하게 만드는 그가 ‘조선’이라는 화두에 매달리는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현대극은 장르가 다양하지만 사극은 영웅, 정치, 혹은 성공 스토리가 대부분이죠. 그런데 사극도 수사물이나 전문직 드라마, SF로 만들 수가 있거든요. 미개척 분야라는 점에 가장 끌리는 거죠.” 거침없는 대답에 혹시 다른 프로젝트도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다. “하고 싶은 소재는 한 5년 치 정도 있어요. 문제는 아이디어를 실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거지만.” 역시 극비라 공개할 수는 없지만 그가 귀띔한 아이디어들이 속속 드라마로 만들어질 수만 있다면 시청자들 역시 앞으로 5년 동안은 심심하지 않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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