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어 중에 “좋게 봤는데…….”란 소리가 있는데 혹시 아시나요? 이번에 모든 정황이 드러나고 보니 제 입에서 그 말이 절로 나옵디다. 많은 이들이 믿고 존경해온 어르신이 어찌 그리 후안무치한 일을 벌일 수 있는지 원. 누구든 달려가 조언을 구하면 언제나 자애로운 미소로 혜안을 빌려주시기에, 또한 관아에서도 제사장(박웅)님만큼은 어려워하는 기색이기에 그나마 의지할 어른이 탐라에 계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 했거든요. 더구나 “탐라가 조선의 귀한 보물임을 몰라주는 세상이 한없이 안타깝다”, “탐라가 뭍에 속하지 않았을 시절에는 좀 더 풍요로웠을 텐데, 탐라에서 나는 물건을 탐라에서만 쓴다면 지금보다 훨씬 풍요로울 것이야” 등, 워낙 구구절절 옳은 말씀만 하시니 철석 같이 믿을 밖에요. 그런데 진상품 도적의 수괴가 제사장님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 정도 나이쯤 되면 사람 보는 눈이 생길 줄 알았거늘

이 나이를 먹어도 여직 사람 하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 하는 간장 종지만한 제 식견에 가슴이 문득 답답해지더군요. 탐라 주민들이 진상품 도난으로 인해 갖은 고초를 겪다 못해 곤장까지 맞는 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나 몰라라 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탐라를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노상 달고 살면서 실은 탐라에 해가 되는 일을 자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서린 상단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나신 지금까지도 영 믿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친 할아방’으로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는 광해군(이호성)에게는 이미 넌지시 속을 내보이셨던 것 같더라구요. 조선 최고 상단 서린의 대행수(이승민)를 두고 “그 아이는 탐라에 해가 될 인물이외다”라고 말하며 본인에게 힘을 실어주길 청하자 광해군이 이리 물었잖아요. “그럼 자네는 어떠한가”라고.

그 순간 MBC <선덕여왕>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되더라고요. 덕만(이요원)이 월천대사의 힘을 빌려 미실(고현정)을 꺾을 요량으로 일식 시기를 계산해 달라 조르자 월천대사도 똑같은 질문을 했거든요. “당신은 다릅니까?”라고. 월천대사가 그렇게 물을 때 저도 ‘그러게!’하며 무릎을 쳤다는 거 아닙니까. 사실 덕만이 미실과 똑같은 술수를 부려 혹세무민하려는 드는 게 마뜩치 않았었거든요.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미실과 덕만이 다를 바가 무어겠어요. 그저 예나 지금이나 불쌍한 건 권력 싸움에 휘말려 고통을 겪는 백성들이지 싶어서 말이죠. 그러나 덕만은 월천대사의 질문에 대오 각성하여 천신황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격물이 백성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만천하에 공개하였잖아요. 얼마나 영특한 아이입니까. 그런데 제사장님은 같은 질문을 받았음에도 과오를 깨닫지 못한 채 어리석은 행보를 계속했으니 안타깝다 할 밖에요. 서린 상단이나 동인도회사와 거래를 터서 탐라를 교역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당신의 발상이 듣기는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 된다면 탐라를 지키기 위해 조총이나 화약 등의 무기를 사들여야 할 테니 자금 마련 때문에 주민들이 훨씬 더 시달리리라는 건 불을 보듯 빤한 일이잖아요. 탐라 인들이 왜 그런 고통에 시달려야 하죠? 제사장님을 탐라의 왕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요? 허나 광해군은 물론 대행수 서린도 벌써 제사장님의 시꺼먼 속을 다 꿰고 있던 걸요. ‘그자는 스스로 권력을 취하려 들 것’이라고 말하더라고요.

부디 다음 생애에는 정치 쪽으론 눈길도 주지 마시길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제사장님이 권력을 탐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네요. 조선이 버린 탐라를 재건하고 싶었다는 말은 아마 사실일 테지요. 그러나 본인의 손 안에 탐라를 쥐어야만 만사형통하리란 헛된 꿈을 꾸었다는 게 문제일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연륜도 있고 덕망도 있는 분이 연치 어린 덕만의 소견을 못 따라간 걸 보면 역시 견문이라는 건 무시 못 할 힘을 지닌 모양입니다. 미실은 서라벌에, 제사장님은 탐라에 갇혀 세상을 바로 볼 수 없었던 반면 덕만은 너른 세상에서 갖가지 문물을 접하고 많은 이들의 생각을 듣고 배울 기회가 있었던 거니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제사장님이 야욕을 드러낸 순간 인상이 너무나 달라졌다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는 모르시죠? 그토록 편안하고 믿음이 가던 노인에서 어쩜 그렇게 사악한 눈빛을 지닌 인물로 바뀔 수 있는지 놀랍더라고요. 하기야 멀쩡하게 정의롭던 인사가 정치판에 나선 후 탐욕스럽고 심통 맞게 돌변하는 걸 목도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의 일이던가요. 정치나 권력 앞에서 반듯함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제사장님을 통해 새삼 느꼈답니다.
어쨌거나 “탐라가 이 조선에서 착취와 천대가 아닌 존중을 받길 바랄 뿐”이라는 제사장님의 바람대로 탐라는 지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진주와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이제 마음 편히 쉬셔도 될 듯해요. 부디 다음 생애에는 정치 쪽으론 눈길도 주지 마시길.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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