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MBC <트리플>에서 하루(민효린)가 자신이 좋아하는 활(이정재)을 부르는 호칭은 오빠다. 물론 둘의 사이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복남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린 여고생이 흠모의 눈으로 오빠라고 부르는 순간순간 이정재는 과거 KBS <느낌> 시절의 ‘오빠’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사실 시청자의 입장에선 MBC <트리플>에 등장하는 세 가지 색 연애를 마냥 예쁘게 느낄 수도, 혹은 도무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복남매인 활과 하루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이윤정 감독의 상큼한 연출 안에서 그려지는 둘의 모습은 결코 금기된 사랑의 끈적끈적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여전히 이정재는 청바지와 타이트한 셔츠가 어울리고 접힌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이 매력적인, 그래서 아직 어린 여자아이의 사춘기적 열정을 자극하는 멋진 오빠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트리플>의 시청률과는 별개로 오빠 이정재의 귀환은 인상적이다.

물론 그는 분노한 민중의 우두머리(<이재수의 난>)이기도, 때가 꼬질꼬질한 저자거리의 깡패(<1724 기방난동사건>)이기도 했지만 역시 그는 자신의 육체적 매력을 과신하는 젊은 남자(<젊은 남자>)나 터프하면서도 순정파인 보디가드(드라마 <모래시계>), 곧 죽어도 폼 나는 인생을 꿈꾸는 양아치(<태양은 없다>) 역할을 맡을 때 자신의 매력을 백 퍼센트 드러내는 배우였고 30대인 지금도 중후함보다는 20대의 열정이 어울린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이정재라는 배우가 타고난 도시적 외모에 기대왔다는 걸 뜻하진 않는다. 그것만으로는 <젊은 남자>부터 지금의 <트리플>까지 올 수 있던 15년의 경력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출연하는 드라마가 논란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그래서 “내가 캐릭터에 공감하지 못하면 시청자 역시 공감할 수 없기에 대본에 비해 좀 더 고민하는 활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배우다. 즉 그의 오빠 이미지는 배우라는 바탕 위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웰메이드 캐릭터인 것이다. 그래서 최근 개봉작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고,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같은 해외 히트작을 따로 찾아보는 그의 모습은 결코 의외의 것이 아니다. 그가 유독 밀도 높은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영화의 완성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가 추천하는 이야기의 밀도가 높은 영화 5편이다.

1.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2008년 │ 스티븐 달드리

“감정을 확 자극하진 않았지만 남녀 간의 사랑, 그리고 죄와 속죄라는 무거운 주제를 추상적이지 않고 깊이 있게 풀어낸 영화 같아요. 사실 아우슈비츠에서의 유태인 학살이라는 건 어찌됐던 심각한 죄악이잖아요. 하지만 단순히 옳다, 그르다는 이분법적 판단이 아니라 “그럼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라고 묻는 한나(케이트 윈슬렛)의 항변과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300명의 희생자는 영화 내내 불편할 정도의 긴장감을 주는 거 같아요. 그 긴장감 안에서 보는 사람 역시 가해자에 대해 ‘넌 나빠’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도덕적 위치에 대해 고민하게 되죠.”

한나(케이트 윈슬렛)에게 책을 읽어주며 사랑을 키운 과거가 있는 마이클(데이빗 크로스). 문맹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 아우슈비츠에서의 죄를 실제 이상으로 덮어쓰게 될 한나를 변호해주지 못해 힘들어 하는 마이클의 모습이 인상적이지만 정확히 말해 러브스토리라고 말하긴 어려운 영화다. 그보단 문맹이고,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는 순진무구한 사람이 저지른 사회적 죄에 대해 온전히 선과 악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질문하는 철학적 영화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물론 자칫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지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한나라는 인물에 대한 공감을 완벽하게 이끌어냈다.

2.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Road)
2008년 │ 샘 멘데스

“미국의 어떤 한 세대를 딱 끊어서 그 때 있었던 중산층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데 사실 어떤 면에서 미국인이 아닌 사람이 볼 땐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거 같아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생각이 다른 사람이 부부로서 같이 살 때의 갈등, 혹은 가정을 지키려는 마음과 경제적으로 더 윤택한 삶을 원하는 마음이 부딪히는 모습을 보면서도 감독의 주제 의식을 정확하게 읽어냈는지 자신하긴 어려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이 상당히 재밌게 즐길만한, 상당히 탁월한 만듦새의 웰메이드 영화인 것 같아요.”

영화 제목인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첫 눈에 반해 결혼한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이 가정을 꾸리는 교외 지역의 이름이다. 이미 전작인 <아메리칸 뷰티>에서 미국 중산층의 위태로운 기반을 드러냈던 샘 멘데스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평화롭고 완벽해 보이는 부부의 일상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포기할 때 가능한 것인지 보여준다. 그렇다고 그 평화로움의 가치를 역설하는 영화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지긋지긋한 일상에 대한 묘사를 통해 그 너머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다고 볼 수 있다.

3. <태양은 가득히> (Purple Noon)
1960년 │ 르네 끌레망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의 연기는 정말 좋기도 좋고 탐나기도 하는 역할이죠. 정말 멋진 악역이잖아요. 자신이 질투하던 상대의 이름과 재산, 여자를 가로채고선 상체를 드러낸 채 일광욕을 즐기는 리플레이(알랭 들롱)의 모습은 그의 죄조차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이죠. 또 실제로 그가 친구를 죽이는 범행을 저지르기까지 그 친구가 너무 얄밉게 구는 과정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드러나기 때문에 리플레이에게 어느 정도 감정 이입이 되는 면이 있는 거 같아요. 단순히 나쁜 놈으로 보이진 않는단 거죠.”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소설 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따른 리메이크 버전인 <리플리>와 자주 비교되는 영화로, 원작과 <리플리>가 결국 리플리의 범죄가 성공하는 결말로 끝나는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의 리플레이는 범죄 사실이 드러나 파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기파멸적인 리플레이의 충동적 모습은 알랭 들롱이란 배우의 외모와 함께 오히려 원작에선 볼 수 없는 매력을 선사한다.

4. <어톤먼트> (Atonement)
2007년 │ 조 라이트

“오랜만에 보면서 눈가가 촉촉해진 영화에요. 주인공인 로비(제임스 맥어보이)와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의 사랑이 주위의 오해와 전쟁 등 환경 때문에 계속 어긋나는 모습이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로비를 보면 정말 안 됐잖아요.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전쟁터에 끌려가고, 좋아하는 사람과는 멀어지고. 하지만 결국 눈물샘을 자극한 건 마지막 부분이었어요. 그렇게 영화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놓은 이후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었던 작가가 할머니가 되어 ‘이건 나의 속죄의 기록이다’라고 할 때 순간 감정이 쾅 터졌죠. 그건 구성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이언 매큐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건 세실리아와 로비의 안타까운 사랑이지만 그 바탕에는 세실리아의 동생인 브라오니의 로비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있다. 때문에 이 영화를 이끄는 진짜 주인공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거짓 증언으로 로비에게 강간범 누명을 씌워 언니와의 사랑을 방해하고 그 이후 소설을 통해 속죄하는 과정을 담는, 브라오니일지 모른다.

5. <나인하프위크> (Nine 1/2 Weeks)
1986년 │ 애드리안 라인

“개봉했을 땐 엄청나게 야한 영화인 것처럼 알려졌는데 사실 지금 다시 보면 노출 자체는 그렇게 심하지 않아요. 요즘 영화랑 비교해보세요. 그런데 굉장한 노출이나 정사 신 없이도 영화가 섹시하게 느껴지는 건 백 퍼센트 디테일의 힘이에요. 가령 상대방의 눈을 가리고 관계를 가질 때 눈을 가리는 실크의 촉감을 살린 장면이나, 상대방의 몸을 얼음으로 자극하기 전 잔에 든 얼음을 짤그락 거리는 모습은 영상으로 볼 때만 그 관능미를 느낄 수 있죠.”

<더 레슬러>의 호평과는 별개로 망가지고 피폐해진 왕년의 스타 이미지가 확고해진 미키 루크가 섹시 스타로 평가받던 시절에 찍은 영화. 실제로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부유한 주식중개인 존은 여주인공 엘리자베스(킴 베이싱어)를 자신의 매력에 빠뜨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끄는 마성의 남자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 탁월한 것은 그런 나쁜 남자의 매력 안에서 오히려 여주인공이 능동적인 삶을 희망하게 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녀가 존을 떠나는 마지막은 오히려 희망적이기까지 하다. 영화의 제목인 <나인하프위크>, 즉 9와 1/2주는 당시 미국의 도시 남녀가 연애하는 평균 기간이다.

“이제 좀 편해지려고요.” 비교적 어울리는 이미지로 복귀했으니 후속작이 중요하겠다는 말에 이정재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트리플>의 활은 그동안 이정재가 보여준 그 어떤 역할보다 다양한 표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혹 그는 15년 이상의 간극을 메우며 여전히 트렌디한 연애 드라마 안에서 어울릴 수 있도록 어깨에 힘 뺀 유연함을 갖추게 된 것은 아닐까. 영화 시나리오 몇 개를 보고 있지만 하나의 역할 이미지를 정해놓고 고르는 건 아니라 어떤 영화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고민스럽기보단 여유로워 보이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빤한 이야기지만 그의 후속작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된다. 비현실적인 판타지 스타로 박제 되던가, 잊혀지거나, 아저씨가 되는 게 선택의 전부인 90년대 청춘스타들. 2009년, 그러나 이정재는 누가 뭐라해도 여전히 청춘, 스타,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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