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조숙했다. 또래의 친구들이 막연하게 스타를 꿈꾸는 시절, 소년은 부모님에게 성적표를 내밀며 “이런 성적을 받을 수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며 연기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연기를 시작하자 소속 기획사의 캐스팅을 기다리는 대신 너덧 살은 많은 형과 누나들이 가득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받았고, 서서히 소년의 이름, 김범이 사람들의 입에 오를 때 쯤 스타니 슬라브스키의 <연기론>을 읽으며 제대로 연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이 조숙한 소년의 키는 180cm에 다다랐고, 목소리는 또래들에 비해 보다 안정된 저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미소를 잃은 대신 깊은 눈빛을 얻은, 조숙한 소년

사춘기의 치기 따윈 없는 잘 자란 아들. 김범은 MBC <발칙한 여자들>에서 아버지 없이 자라면서도 오히려 어머니에게 유일한 정신적 위안이 되는 반듯한 아들이었고, MBC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철없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축제 준비를 하는 방송반 반장이었다. 어린 소년의 화사함이 아닌, 세상을 조금 일찍 알게 된 조숙한 소년의 깊은 눈이 필요할 때, 드라마 감독들은 김범을 불렀다. 그는 MBC <에덴의 동쪽>에서 어린 나이부터 가족을 책임져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동철이었고, KBS <꽃보다 남자>에서는 가문을 이어가야 한다는 무게감에 짓눌려 바람둥이가 돼 버린 이정이었다. 그는 늘 소년들과 어울렸지만, 그 소년들처럼 해맑은 표정만을 지을 수는 없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친구들인 민호와 윤호 형제가 기 센 어머니 밑에서 그 나이에 어울리는 소년의 모습으로 자란 것과 달리, 김범은 마치 부모 없는 아이처럼 자기 마음대로 사는 ‘하숙범’이었다.

김범이 지난 몇 년간 어떤 신드롬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완전한 주인공이 되지 못한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침없이 하이킥>과 <꽃보다 남자>에서 그는 늘 대중의 시선을 모았지만, 그의 옆에는 늘 열광적인 환호성을 듣는 또 다른 신인이 있었다. 그는 소년의 얼굴을 가졌지만 유승호처럼 사람들을 순백의 세계로 모든 안내하는 순수함과는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었고, <꽃보다 남자>의 이민호처럼 고등학생이라는 설정이 말 그대로 설정처럼 보이는 성인 남자의 느낌도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좀 더 고민 많고, 좀 더 생각이 많은 소년. 그건 요즘 TV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유형의 소년이었지만, 그런 소년이 요즘 TV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10대 소년에게 세상 다 잊게 하는 순수함이나 어른 같은 성숙함을 요구할 때, 조숙하지만 소년의 여린 얼굴선을 가진 배우는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또래처럼 먼저 행동하고 그저 씨익 웃어 보이기에는, “가만히 있으면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것 같아 웃는 연습을 해야 했던” 김범은 한 번 행동할 때마다 많은 생각이 필요한 소년처럼 보였다.

소년, 이제 뛰기 시작하다

하지만 조숙한 소년의 매력은 폭발하지 않는 대신 은근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데 있다. 영화 <고사>를 찍은 뒤 인상적인 장면으로 자신의 출연 장면 대신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신’을 골랐던 그의 안목은, 자신의 출연작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성공 뒤에도, 김범은 하이틴 스타에 대한 팬들의 열광을 즐기는 대신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에덴의 동쪽>에서는 어린 나이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는 소년의 울분을 보여줬고, 캐스팅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부실했던 <꽃보다 남자>에서는 작품을 안정되게 지탱하는 또 다른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 팬들마저 안타깝게 만든 다른 캐릭터들의 멜로와 달리 이정과 ‘가을 양’의 이야기는 비교적 일관되게 진행됐고, 김범은 처음으로 시청자들 앞에서 확실한 끝이 있는 이야기를 선보였다. 드라마 초반에 단지 바람둥이로 묘사되던 이정은 어느새 가을을 통해 변화하고, 냉소적인 웃음 속에 가려져 있던 슬픔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꽃보다 남자>가 끝날 즈음, 김범에게는 더 이상 소년이라는 말이 따라붙지 않았고, 언론에서는 ‘차세대 한류스타’라는 말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날 어른으로 변신을 선언하지 않았다. 진짜 소년들이 그러하듯, 김범은 자신의 10대 후반의 성장통을 그대로 보여주며 만 20세가 되었다.

작품의 성패는 아직 알 수 없지만, SBS <드림>이 김범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은 그 때문이다. 나이보다 조숙한 탓에 소년들의 세계에서, 혹은 드라마의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던 그는 20세와 함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이다. <드림>에서 그는 이종격투기 선수 장석을 연기하고, 손담비와 주진모와 함께 드라마의 멜로를 이끌어야 한다. 조숙한 소년이 성인이 되면서 그는 처음으로 생각대신 ‘몸’을 쓰고, 모든 감정을 내쏟을 수 있는 무대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건 데뷔 전부터 “언젠가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도 경영하고 싶다”던 조숙한 소년에게 감춰진 뜨거운 야심이 드러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조숙하게 학교 뒤 편의 벤치에 앉아있던 소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와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다 자란 몸으로.

글. 강명석 (two@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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