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명실상부한 스타급 연기파 배우의 아레나에 올려놓은 건 역시 서울이란 도시의 음울함을 십분 활용한 한국형 스릴러 <추격자>다. 하지만 수많은 관객을 감탄하게 했던 중호 역할 이전에도 그가 연기했던 인물들은 영화의 장르와는 상관없이, 음모가 판치는 도박판이나 술 냄새가 진동하는 어느 골방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 생생한 질감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관객이 그를 <추격자> 아닌 다른 영화에서 만난 빈도는 적었을지 몰라도 그 만남마다 그는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새 영화 <거북이 달린다>에서 집념의 ‘추격자’지만 중호와는 전혀 다른 순박함이 묻어나오는 시골형사 필성을 연기한 것에 대해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것은 단순히 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생활 방식 자체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허투루 들을만한 것이 아니다.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첫 인상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예전에도 그랬듯 무기력하면서도 끈기만큼은 무시할 수 없는 필성의 절박함을 통해 그 각각의 첫 인상을 배반할 작정이다. 때문에 그가 코믹한 요소가 다분한 <거북이 달린다>에 대해 “코미디가 살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은 영화”라 자신하는 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일 수도 있다. 이번 영화에서 억양이 아닌 몸 자체에 밴 충청도 사투리의 느릿한 리듬으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소박한 삶의 결을 담아낸 그가 <거북이 달린다>처럼 코미디지만 꼭 웃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웃음보단 등장인물들의 삶을 켜켜이 담는 것에 욕심을 부린 영화 5편을 소개한다.
1988년 │ 마틴 브레스트
“자신이 출연한 모든 영화에서 그렇듯 이 영화에서도 로버트 드니로는 거칠고 무뚝뚝하지만 마음 속 깊이 인간적인 허술함을 지닌 현상금 사냥꾼 잭을 완벽하게 표현해 내죠.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 영화에서 그에게 쫓기는 수배범 존 역할의 찰스 그로딘에게 더 점수를 주고 싶어요. 처음에는 존이 우악스러운 잭에게 꼼짝없이 끌려 다닐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능글맞은 존은 닭고기를 먹는 잭에게 콜레스테롤 수치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어느새 동등한 입장에 서서 그를 귀찮게 해요. 그렇게 티격태격 대는 과정은 다분히 코믹하지만 그러면서 쌓이는 둘 사이의 우정과 인간적 신뢰는 결코 우스운 게 아니죠.”
현상금 사냥꾼 잭(로버트 드니로)이 동글동글한 인상의 존(찰스 그로딘)을 잡아 호송하는 과정에서 다른 추적자들과 다투고 결국 존을 지키는 모습은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석양의 건맨 2 – 석양의 무법자>를 연상케 한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잭은 터프해 보이지만 어딘가 어설픈 면이 있다는 점이다. 전작인 <택시 드라이버>나 <디어 헌터>에서처럼 터프한 남성 역할을 자주 보여주던 드니로가 커다란 개를 보고 기겁하는 잭을 연기하며 코미디도 잘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흥미로운 영화다.
1989년 │ 닐 조단
“이 영화도 로버트 드니로의 작품 중 대표적인 코미디라고 할 수 있어요. 드니로와 역시 연기 잘 하는 거라면 빠지지 않을 숀 펜이 합세해 교도소에서 도망친 탈옥범을 연기하죠. 그 둘이 어느 마을에서 신부로 오해 받고, 그 오해를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는 설정만으로도 영화성격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거예요. 사실 그 둘이 신부 행세를 하며 조금씩 신에 대한 믿음을 찾아가는 과정은 조금 빤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에겐 믿고 의지할 어떤 존재가 필요하다는 깨달음 같아요. 단지 이 영화에선 그게 신이었던 것뿐이죠.”
약삭빠른 네드(로버트 드니로)와 조금 맹해 보일 정도로 순박한 짐(숀 펜)이 같은 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흉악범의 탈출에 휩쓸려 엉겁결에 교도소 밖으로 나오게 된 이후의 일을 그린 영화다. 미국 국경지대의, 우리나라로 따지면 동막골처럼 때 묻지 않은 마을에 정착한 그들이 신부 행세를 하며 마을의 대소사에 연관되는 모습은 꼭 웃음을 유발하진 않더라도 제법 훈훈하다. 여기에 금발에 얼굴에 주름 하나 없던 시절의 숀 펜과 성형과 보톡스에 의지하기 전의 데미 무어를 볼 수 있는 건 덤이다.
1994년 │ 조엘 코엔
“재밌는 장면이 많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한 장면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고 싶어요. 악역 머스버거로 나오는 폴 뉴먼이 실수로 빌딩에서 떨어질 뻔하는데 그걸 팀 로빈슨이 바지를 잡아 구하죠. 그런데 바지가 조금씩 찢어지는 거예요. 이 때 폴 뉴먼이 바지를 이중으로 박아주겠다던 양복점 주인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회상 신이 나와요. 그가 낭패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그 양복점 주인이 “머스버거는 좋은 분이니까”라며 바지를 이중으로 박아주는 장면이 나오고요. 결과적으로 그는 그 덕에 살 수 있었죠. 악역인 그가 무엇인진 모르지만 어떤 작은 선행을 베풀어 목숨을 구했다는 건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요.”
세계 최초로 훌라후프를 돌리는 꼬마의 진지하면서도 무심한 표정이 압권인 영화다. 회장이 자살해 회장 자리가 공석인 허드서커 사에서 소위 ‘바지회장’을 맡게 된 착한 노빌(팀 로빈슨)이 훌라후프 개발로 크게 성공하고 결국 전 회장의 유언장을 통해 진짜 회장이 된다는 내용은 그저 동화적인 입신출세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법 진지하게 제기되는 인원 감축과 실업률 증가에 대한 고민은 이 영화가 결국 착한 회장의 성공기가 아닌 착한 회장을 통한 정의로운 기업문화에 대한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1996년 │ 수오 마사유키
“저는 어떤 영화가 제대로 된 삶의 디테일을 담기 위해선 주연보다 조연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쉘 위 댄스>는 정말 탁월한 영화죠. 완벽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개성 있는 조연들이 잔뜩 등장하거든요. 보통 정열의 대머리 댄스를 보여준 토미오 역의 타케나카 나오토 얘길 많이 하는데 저는 오히려 춤을 추다 못 춘다고 핀잔을 듣자 자신이 역겹냐고 물으며 울던 당뇨병 환자가 더 기억에 남아요. 그를 울린 조금은 주책인 아줌마도 개성 있고요. 그런 개성 있는 인물들이 플롯을 받치기 때문에 영화가 가볍고 유쾌한 가운데서도 실제 생활과 같은 리얼리티와 무게감을 가질 수 있었죠.”
일상의 무료함에 지친 40대 남자가 사교댄스를 통해 새로운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과정을 그리지만 결코 춤바람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그렇다고 <더티 댄싱>처럼 춤에 대한 격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비 오는 날 다리 밑에서 스텝을 밟으며 즐거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여기서 춤은 일탈이라 할 만큼 거창한 건 아니지만 오직 일에만 매몰되어있던 그의 삶에 숨통을 틔워주는 통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제대로 된 취미 하나 갖지 못하고 일에 치여야 했던 일본의 기성세대에 대한 안쓰러움의 표현인 것은 아닐까.
1999년 │ 로저 미첼
“이 영화도 조연의 호연으로 기록되는 영화예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라는 주연배우의 이름값으로 알려진 영화인 게 사실이죠. 하지만 휴 그랜트가 연기하는 윌리엄의 집에 놀러오는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정말 대책 없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됐을 거예요. 직설적인데다 괴짜인 스파이크나 그를 좋아하는 윌리엄의 동생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탄탄해질 수 있는 거죠. 특히 톱스타인 안나(줄리아 로버츠)를 포기하겠단 윌리엄에게 “너 미쳤냐?”고 말해주는 스파이크의 모습은 사랑을 이루는 데는 동화 같은 우연이나 운명보단 용기가 중요하다는 걸 보여줘요.”
우연히 자신이 운영하는 서점에서 세계적 여배우를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은 작위적인데다 신선하지도 않다. 하지만 여기에 풋풋하고 상큼한 분위기를 덧입힌다는 점에서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의 깔끔한 관계 묘사가 돋보인다. 사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윌리엄이 안나의 사랑을 얻을 거라는 건 영화 시작부터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 과정을 평범한 관객이 공감하며 볼 수 있게 담백하게 풀어나가는 연출력은 만만한 내공이 아니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더 기대되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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