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싸움이 독해졌다. 더 이상 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결혼을 위해 다른 여자들과 싸우지 않는다. 천 년도 더 전의 여성들은 자신과 피붙이들의 목숨을 걸고 건곤일척했다. 의 미실은 황후가 되기 위해 신라의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에도 한시도 방심하지 않는다. 천명 또한 비련의 공주로 남기를 거부하고 두려움에 떨던 대상을 향해 칼을 겨눈다. 아직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지 못한 덕만조차도 대의와 선의를 찾으며 성장하고 있다. 제 밥그릇 챙기는 정쟁을 넘어 한 나라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게 될 이들의 싸움은 그 자체로 역사가 되었다. 위근우 기자와 김선영 TV평론가가 그녀들의 건곤일척의 승부를 점쳐본다. /편집자주
글. 김선영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신라에서 미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군권을 거머쥔 설원랑과 행정을 장악한 세종이 그녀의 휘하에 있고, 화랑들은 그녀의 뜻에 따라 낭장결의를 보이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미실이 진흥왕의 서거 이후 빠르게 신라를 장악하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 MBC <선덕여왕>의 초반은 미실의 드라마였다. 물론 서역에서 진행된 덕만의 유년기를 지나 서서히 드라마의 무게 중심은 덕만과 천명 쪽으로 쏠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미실보다 더 뛰어난 주인공이 북두의 여덟 번째 별과 함께 등장해서만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미실이 느끼는 결핍이다.
자신의 시대를 살면서도 결핍에 시달리는 미실
미실이 왕위계승권자가 아닌 금륜태자를 왕의 자리에 앉혔다가 끌어내리고 진평왕의 정실황후인 마야부인을 암살하려 한 건 오직 태후, 혹은 황후 자리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스스로 “이제 미실의 시대”라 공언하지만 황후 자리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콤플렉스에 가깝다. 실질적 권력이 진평왕이 아닌 미실에게 몰린 상황에서 사실 황후라는 이름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알맹이 없는 기호를 획득했을 때만 미실은 실제 정치판의 최고 권력자를 넘어 상징체계에서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다. 박혁거세의 건국 신화에서부터 사람을 성골과 진골, 6두품으로 분류하는 신라의 국가 시스템은 각각의 상징들이 단일한 이야기 안에서 응집할 수 있는 신화적 체계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미실은 화백 회의를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화백 회의라는 체제 자체를 해체하지 못하고, 왕을 갈아치울 수는 있지만 왕이라는 상징적 존재 자체를 없애진 못한다. 그런 면에서 미실의 가장 큰 적은 덕만도 천명도 아닌, 왕권의 서사 프레임을 확립한 죽은 진흥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골 출신이 아닌 미실이 하늘이 내려준 왕권이라는 신화적 서술 안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황후라는 자리가 필요하다.
비록 미실이 편법을 쓴다 해도 그 룰 자체를 바꿀 수 없는 정치의 상징체계 안이라면 기본적으로 왕가의 사람으로 태어난 천명이 그녀에게 대항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화랑들에게 밥 한 끼 대접한 적 없어도 천명이 화랑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만호태후의 서찰을 통해 미실의 정적인 김서현의 진골 신분이 복권되는 것은 이 정치 게임의 상징적 본질을 보여준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진골이라는 기호에 편입되는 순간 그는 정치의 상징체계 안에서 병부령 바로 밑의 자리를 얻고 화백 회의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된다. 아무리 미실이라 해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진 못한다.
꿈을 꾸는 자가 승리한다
때문에 미실이 진정 자신의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신화, 즉 건국신화를 써야 한다. 그것은 체제 자체를 뒤엎는 것이기에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KBS <태조 왕건>과 MBC <주몽>, KBS <대조영>이 흥미로운 사극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래서다. 하지만 군권과 행정의 요직에 자기 사람을 두었기에 획득한 미실의 권력은 결국 신라 정치의 상징체계 안에서 작동할 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실의 콤플렉스는 반대편에 선 왕가의 덕만과 천명의 힘이 된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정말 중요한 건 남장을 한 채 천방지축인 덕만이 자신의 출신성분을 회복하는 것이 아닌 그 이후의 일이다. 덕만이 핏줄을 통해 미실이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했던 상징적 지위를 얻는 것에 만족한다면 결국 그녀 역시 진흥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덕만이 진정으로 미실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신라 최초의 여왕이든 삼국통일이든 과거에 보지 못한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진흥왕이 유훈으로 남긴 “불가능한 꿈을 꾸는” 제왕의 자격인 동시에 역동적인 사극을 만드는 조건일 것이다.
글 위근우
최근의 여성 영웅 사극들은 기존 영웅 사극의 단순한 소재 확장인가 아니면 새로운 지평인가. MBC <선덕여왕>은 적어도 그 경계를 넘어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부지런히 탐험 중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방법은 김별아가 소설 <미실>에서 선보였던 전략과 유사하다. 실존인물인가에 대한 논란과는 상관없이 소설 속의 미실은 현대 여성들의 욕망이 투영된 신여성이었다. <선덕여왕>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들 위에 군림하는 슈퍼 히로인 미실(고현정)과 그러한 미실을 뛰어넘는 알파걸 덕만(이요원), 천명(박예진) 자매가 그려내는 이 여성 영웅 서사는 마치 현대 여성들의 다양한 욕망의 패치워크처럼 보인다.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슈퍼우먼을 넘어서려는 알파걸들의 성장담
흔히 남성 영웅 서사는 신화적 아버지의 위대한 유언을 이어받으며 부계 전통을 구축해나간다. 따라서 태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진흥대제(이순재)의 유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인물을 왕위에 앉히는 미실의 행위에는 단순한 거부 이상의 전복적 의미가 있다. 뛰어난 미모로 남자들을 마음대로 조종하여 그 위에 군림하고 명석한 두뇌와 치밀한 전략으로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는 미실은 매력적인 커리어우먼 리더십에 대한 여성들의 로망이 극대화된 여성 캐릭터다. 그러나 욕망을 위해 모성마저 스스로 거세하는 그녀의 도발적인 급진성은 남성들에겐 치명적인 위협의 대상이며, <선덕여왕>이 완전한 판타지가 아닌 이상 그것은 시대의 한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천명에게 “공주께선 사내로 태어나셨어야 합니다. 마땅히 신국의 주인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해서, 황후가 되는 길을 택하셨습니까” 라고 냉소하던 미실의 대사는 그녀가 황후 이상을 꿈꿀 수 없는 이유를 이미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 미실의 꿈은 계속 지연되고 그 억압된 욕망은 그녀를 영웅이 아닌 좌절된 2인자로 머물게 한다.
요컨대 <선덕여왕>은 덕만과 천명이 악녀 미실과 싸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세대 여성으로서 그들이 선배인 미실의 경력을 넘어서려는 이야기에 더 가깝다. 그들 모두는 결국 여성이라서 감수해야 하는 운명의 한계와 싸우고 있다. ‘어출쌍생이면 성골남진’이라는 저주는 애초에 덕만과 천명이 ‘쌍음’이라서 비극이 된다. 형제였다면 그들 역시 사망하여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주와 왕이 될 운명을 동시에 지닌 이들 자매는 미실의 좌절되고 미완된 여성 영웅 서사에서 이어받을 것은 이어받되 실패한 부분은 다른 방식으로 채워나간다. 덕만이 여성성을 거세하고 남장을 한 채 남성 영웅들의 세계에 직접 뛰어들어 그들과 경쟁한다면, 천명은 특유의 부드러운 모성으로 자신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감싸 안는다. 그리고 연대하여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더욱 힘을 키운다. 몇 개 국어를 할 줄 알고 국제 경험도 있으며 남자들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이 똑똑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소녀들의 이야기는 알파걸 신드롬에 사로잡힌 현대 젊은 여성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성장담이다.
맞춤형 여성 사극으로 만개한 하이브리드 사극
결국 <선덕여왕>은 기존의 영웅 서사극에 현대 여성들의 욕망을 투사하여 21세기적 성장담으로 갱신한 맞춤형 여성 사극이다. 그리하여 바리데기 공주의 여성 영웅 설화부터 시작해서 MBC <커피프린스 1호점>의 야오이 코드를 차용한 남장 여자 모티브, 꽃미남 아이돌 문화, 미드식의 신속한 사건 전개, 여성 자기 계발서사 등 현대 젊은 여성들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흥행 공식들의 엮어 짜기로 재미를 극대화한 하이브리드 사극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앞으로 덕만이 어떠한 여정을 거치며 마침내 왕으로 귀환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여왕은 오늘날 우리 여성들의 욕망에 가장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글 김선영
글. 김선영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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