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은 1979년에 데뷔했다. 그 사이 수많은 드라마의 주인공이었고, 높은 계약금을 받는 CF 스타이기도 했으며, 연기 대상을 받은 적도 있다. 지난 30년 동안, 그는 착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김미숙의 시간은 거꾸로 가지는 않아도 다르게는 가는 것 같다. 연기 생활 30년이 된 어느 날, 김미숙은 악역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SBS <찬란한 유산>의 백성희는 우리가 지난 30년 동안 알고 있던 김미숙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캐릭터다. 김미숙은 언제나 <찬란한 유산>의 여주인공 은성(한효주)의 입장에 있었다. 언제나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받는 여주인공. 1980년대 숱한 멜로드라마에서 세련된 도시 여성을 연기할 때도, SBS <나도야 간다>와 <여왕의 조건>처럼 모진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밝고 쾌활한 중년 여성을 연기할 때도, 김미숙은 늘 시청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그들의 응원을 받았다. <찬란한 유산>에서 백성희가 남편이 행방불명되자 친딸처럼 키웠던 남편의 딸 은성을 내치는 것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마치 운동을 시작해 새로운 근육을 쓰게 된 사람처럼, 김미숙은 악역을 통해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김미숙이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소리치는 승미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부유한 남자 환(이승기)를 잡는 방법에 대해 말할 때의 서늘한 표정은 지금까지 김미숙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얼굴이다.

자식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사는 엄마로의 변신

이 우아한 배우의 변신이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영화 <말아톤>에서 초원(조승우)에게 마라톤을 가르치는 엄마의 모습은 헌신적이되 우아하거나 부드럽지는 않았다. 초원의 엄마는 초원을 위해 때론 악다구니를 썼고, 그의 교육법을 두고 초원이의 코치와 실랑이를 한다. 김미숙은 <말아톤>을 통해 그의 우아함을 벗고 어머니가 겪는 현실로 들어갔고, 그것은 SBS <황금신부>에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직접 동남아로 가서 결혼 상대를 찾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MBC <사랑해, 울지마>에서 결과적으로 딸의 앞길을 막는 여자 문신자와 <찬란한 유산>의 백성희는 <말아톤> 이후 5년여 동안 김미숙이 차근차근 쌓아온 변신의 결과다.

하지만 김미숙이 보여주는 흥미로움은 그가 연기 생활 30여년이 다 된 지금 변신을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 어머니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자식을 사랑했고, 자식을 버린 어머니는 그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김미숙은 그 모성 속에 어머니 자신의 인생이 들어있음을 보여준다. <말아톤>에서 그가 초원에게 집착하다시피 했던 것은 그 자신의 말처럼 “초원의 인생 속에 자신의 인생이 포함” 돼 있었기 때문이다. <말아톤>의 어머니는 헌신적이었지만, 동시에 초원이 자신의 교육법대로, 자신의 뜻대로만 크길 바란다. 자식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어머니와 자식의 혼인을 통해 부를 취하려는 어머니라는 점에서 <황금신부>의 정한숙과 <찬란한 유산>의 백성희는 정 반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똑같이 고교 동창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빼앗겼다. 그들이 자식의 성공에 그토록 신경 쓰는 데에는 단 한 번 놓친 기회로 인해 인생이 바뀐 자신의 신세에 대한 회한이 스며들어 있다. 백성희가 승미에게 환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데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물론, 자신의 인생을 바꾸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평생 여주인공의 존재감이 다시 폭발하기 시작했다

백성희가 부유한 남자들과 결혼을 반복한 것은 자식 때문일까, 자신이 함께 살 남자가 필요했기 때문일까. 김미숙은 이제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하는 대신, 그들의 어머니를 연기한다. 하지만 그는 그 어머니들에게 여자로서, 사람으로서의 인생과 욕망이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보여주는 사랑에 자신이 원하는 인생에 대한 욕망이 투영될 수 있다는 건, 지금까지 한국의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모성의 모습이다. <사랑해, 울지마>에서 자신의 사랑 때문에 딸 조미수(이유리)를 곤경에 빠뜨렸던 문신자처럼, 어머니에게도 자신의 욕망이 있고, 때론 이기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김미숙은 이 새로운 모성 앞에서 자신이 쌓은 30년의 에너지를 새로운 방향으로 바꾼다. 그가 백성희처럼 자신의 인생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어머니를 연기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연기력뿐만 아니라 그가 쌓은 존재감이 있기 때문이다. 30대 후반에 MBC <사랑>에서 장동건이 사랑하는 연상의 여인을 연기했고, 40대 중반에도 늘 남자들의 사랑을 받던 이 ‘평생 여주인공’은 그저 어머니만을 연기하기에는 그 존재감이 너무나 뚜렷하다. 김미숙이 다만 어머니로서, 방 한 편에 앉아 인자한 미소만 짓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국민 엄마’로 불리는 어머니 연기자들의 시대에서 과거의 톱스타들이 하나둘씩 어머니를 연기하기 시작한 시대. 그 시대와 함께, TV 속 어머니의 정의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미숙의 인생도 바뀌었다.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후배 배우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들을 때쯤 주연에서 조연으로, 우아한 여성에서 현실의 어머니가 됐다. 30년 만에 새로 시작한 배우의 인생. 김미숙의 시간은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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