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은 다양한 필모그래피만큼이나 다양한 표정을 가진 배우다. 근작들만 꼽아보더라도 무표정한 원칙주의자인 <바르게 살자>의 정도만, 의리 있는 척하지만 부하를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공공의 적 3>의 깡패 이원술, 뛰어난 검술을 숨기고 살아가는 부보상단 행수인 <신기전>의 설주를 거쳐 현재의 <김씨 표류기>에 이르렀다. 이런 다양한 역할 안에서 정재영만이 보여주는 어떤 공통적인 모습이 있다면 바로 예상치 못한 웃음을 통해 캐릭터뿐 아니라 영화의 분위기에 일종의 숨통을 트여준다는 것이다.

가령 냉정한 저격수인 <킬러들의 수다> 속 재영은 밥투정하는 동료에게 “그럴 거면 먹지마”라고 야단친 다음 “나처럼”이라 말하며 수저를 놓고, <아는 여자>의 동치성은 “이곳에선 장님도 본 것을 말하고, 귀머거리도 들은 것을 말한다”는 심문실의 형사에게 “그럼 벙어리는요?”라고 되물으며 형사의 울화통을 터지게 한다. 이렇게 별다른 표정 없이 툭 내던지는 그의 허허실실 유머는 코미디 장르 바깥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실미도>에서 뜨거운 쇠꼬챙이에 등이 지져지는 고통을 참고 나서 그 이유에 대해 옆의 강인찬을 가리키며 “저 새끼가 참기에 나도”라고 대답할 때, 폭주기관차처럼 달려가던 영화는 잠시 쉬어갈 지점을 갖게 되었던 것처럼. 이렇게 한 숨 돌리고 관객이 캐릭터의 인간적 매력에 감정 이입을 할 시간을 주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목숨을 걸고 돌진하는 실미도 대원들의 감정폭발은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즉 그가 주는 웃음은 단지 한 번의 웃음에 그치지 않고 드라마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번 <김씨 표류기>에서도 과거 자장면을 거부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자책하는 모습으로 큰 웃음을 주다가 직접 자장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으로 희망에 대한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주는 그가 자신의 출연작들처럼 웃기지만 웃음 이상의 감동이 있는 영화 5편을 추천한다.




정재영│웃음 이상의 감동이 있는 영화들
1.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
1999년 │ 로베르토 베니니

“유태인 학살이라는, 20세기뿐 아니라 전체 역사에서 인류가 저지른 가장 부끄러운 만행을 소재로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정말 놀랐어요. 수용소에서의 참담하고 위태로운 삶을 신나는 게임이라고 아들을 속이는 것은 무척이나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지만 이를 통해 아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부정이 가슴 찡하죠.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총소리만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표현하고 나서 자막이 올라가는 내내 머릿속이 멍했어요. 화자인 조슈아에게도 나에게도 인생은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선물을 안겨준 영화예요.”

감독이자 주연인 로베르토 베니니의 아카데미 수상으로 더욱 유명해진 영화다. 영화 전반부가 주인공 귀도의 기상천외한 구애작전을 통해 그의 재기 발랄함을 충분히 보여준다면 후반부에선 그 재기를 무기 삼아 유태인 수용소에서 아들 조슈아에게 탱크 상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달래며 결국 독일이 패전하는 날까지 살아남도록 도와준다. 때로는 웃음이 총과 칼을 이겨내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일 수도 있는 법이다.



정재영│웃음 이상의 감동이 있는 영화들
2. <로얄 테넌바움>(The Royal Tenenbaums)
2001년 │ 웨스 앤더슨

“일단 진 핵크만, 기네스 팰트로, 밴 스틸러 등 화려한 캐스팅이 돋보이고, 그럼에도 기름기를 쪽 뺀 담담함이 정말 매력적인 영화예요. 개성이 차고 넘치는 가족의 충돌을 보여주며 결국 사랑이란, 가족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관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유쾌하고 심플하게 얘기하죠. 가족과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놓던 <인생은 아름다워>와 정반대의 영화랄까요. 무엇보다 화장실에서 하루 종일 담배만 피워대는 기네스 팰트로의 모습이 좋았고, 채스(밴 스틸러)와 그 아들들이 입는 것처럼 나도 평소에 즐겨 입는 ‘츄리닝’을 가족과 세트로 입어볼까 잠시 생각해봤어요.”

주식천재 채스와 문학천재 마고, 테니스의 귀재 리치까지 세 명의 천재 아이를 둔 테넌바움 집안이 어떤 방식으로 몰락하고, 다시 어떤 방식으로 화해하는지를 보면 미국 가정에서 가족애의 문제가 어떻게 제기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 그들의 재능에 독설을 날려 모든 걸 엉망진창으로 만든 아버지 로얄 테넌바움(진 핵크만)이 다시 가족을 재건하지만 그 과정에 대단한 무언가가 필요한 건 아니다. 단지 아들 채스에게 “널 내버려둬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진심 한 줌만으로도 테넌바움 가족과 영화는 해피엔딩에 이른다.



정재영│웃음 이상의 감동이 있는 영화들
3. <베니와 준>(Benny & Joon)
1993년 │ 제레미 S. 체칙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 유쾌함만은 아직도 선명해요. 딱 조니 뎁 다운 영화라고 할 수 있죠. 사실 조니 뎁이 당연히 베니 혹은 준인 줄 알았는데 샘이라서 조금은 당황했어요. 하하. 빵을 구울 때 다리미를 쓰던 장면이 인상적이고, 창밖으로 그네를 타듯 준 앞에 어른거리는 샘의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던 장면도 떠올라요. 그런 샘의 평범하지 않은 모습은 베니와 준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마술 같은 순간을 선물하죠. ‘I`m gonna be 500 miles’라는 주제곡도 많이 좋아했어요.”

브래드 피트와 함께 늙지 않는 영생의 배우로 꼽히는 조니 뎁이지만 이 영화 속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 그 차이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그만큼 상큼했던 조니 뎁의 매력이 십분 발휘된 영화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판토마임 실력도 있는 샘이 스트레스성 정신병을 앓는 준과 그런 준을 보살피느라 자기만의 인생을 살지 못하는 베니와 함께 살며 준에겐 사랑을, 베니에겐 삶의 여유를 선사한다. 웃음이란 때로 고통에 대한 가장 좋은 치료제가 된다.



정재영│웃음 이상의 감동이 있는 영화들
4.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Shallow Hal)
2001년 │ 바비 패럴리, 피터 패럴리

“우연히 TV를 통해서 보게 된 영화였지만 정말 재미있어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그 후에도 여운이 남았던 영화예요. 사실 잭 블랙의 코미디는 몇몇 사람들에게 화장실 유머 취급을 당하기도 하는데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연기는 단순히 웃기는 데서 멈추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감동을 주죠. 곧 죽어도 예쁘고 날씬한 여자와 사귀겠다는 할(잭 블랙)이 최면 때문에 뚱뚱한 여자를 기네스 팰트로의 외모로 보고 사귀다가 결국 최면이 깨진 이후에도 그녀의 상냥함과 유머감각을 그리워할 때 주는 감정의 울림이 있잖아요. 전 그런 코미디가 좋아요.”

동양의 주성치와 서양의 잭 블랙이 가진 공통점이라면 굉장히 유치하고 지저분한 유머 속에서도 대상에 대한 어떤 진심 어린 애정을 잃지 않는단 점이다. 잭 블랙의 이런 면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로 화장실 유머의 획을 그은 패럴리 형제와의 작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단순히 내면의 아름다움이 얼굴보다 중요하다는 모범생적인 답을 구태의연하게 반복하기보단 최면 때문에 뚱뚱한 로즈메리를 아름답게 봤던 할(잭 블랙)이 ‘콩깍지가 낀’ 시간을 통해 그녀를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정재영│웃음 이상의 감동이 있는 영화들
5. <반칙왕>(The Foul King)
2000년 │ 김지운

“시끄러운 세상에서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은 결국 반칙으로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정말 눈물 나게 처절한 코미디죠. 송강호 선배의 프로레슬링 도전만으로도 내게 웃음을 줬지만 그 이상을 넘어선 선배의 또 다른 매력을 알 수 있게 해줬어요. <넘버 3>에서 보여줬던 코믹한 모습이 진일보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면이 찢긴 뒤에 보여주는 울분은 영화 내내 억눌렸던 임대호(송강호)의 스트레스와 결합되어 큰 공감을 주죠. 헤드락 거는 세상을 향해 니킥을 날린, 김지운 감독님 최고의 영화라고 봅니다.”

고난도 프로레슬링 기술을 구사하는 송강호와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김수로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직장 상사에게 당하는 헤드락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대호가 프로레슬링 기술을 익히며 깡패 세 명 쯤은 가뿐히 처리하는 가면 레슬러가 되는 모습은 마치 ‘슈퍼 히어로’물을 떠올리게 하지만 반칙을 주로 하는 그는 결국 영웅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반칙이든 뭐든 세상을 향해 ‘맞짱’을 시도한다는 것만으로도 일말의 희망을 남기는 영화다.


“과정이 좋은 영화를 계속 하고 싶어요”



정재영│웃음 이상의 감동이 있는 영화들
“<김씨 표류기>는 긍정적 의미로 아마추어적인, 그래서 기억에 남는 작업이었어요.” 정재영은 자신의 연기가 어땠는지, 자신이 맡은 캐릭터가 어땠는지에 대해 여간 해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이 평가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건 배우로서 <김씨 표류기>라는 좋은 작품을 만나 좋은 경험을 했다는 것뿐이다. 흥행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좋은 영화를 계속 하고 싶다”는 그의 마음가짐이라면 굳이 자신의 연기에 대해 자랑하거나 설명하지 않더라도 과정 뿐 아니라 결과 역시 좋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관객들을 진심으로 웃게 만들 수 있는 영화는 결국 배우와 스태프가 현장에서 진심으로 웃으며 만든 영화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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