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환이 깊어 드라마에서 하차하신다 했을 때도 설마 했는데, 그러다 급기야 중환자실로 옮기셨다는 소식에도 설마 아니겠지 했는데, 결국 떠나셨다는 기사를 보고야 말았습니다. 엄상궁(한영숙)님도 어느 날 그렇게 무심히 가시더니 정상궁(여운계)님도 이처럼 믿기지 않게 훌쩍 떠나시네요. 예전에, 마침 SBS <여인천하>와 MBC <대장금>이 한 해 차이로 방영되던 지라 노련미 넘치는 두 상궁마마님들이 한 자리에서 격돌하면 참 볼만하겠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거든요. 그저 서로를 지긋이 응시하고 서 계신 것만으로도 대단한 그림이 될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런데 이제 두 분 모두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셨으니 정녕 덧없는 상상이 되고 말았군요.
정 많은 외할머니부터 기업 회장까지
사실 수술하신 후 바로 KBS <며느리 전성시대>에 복귀하셨을 때 제 인척이 한 걱정을 하더라고요. 아마 담당 의료진에게서 무슨 소리를 들었지 싶은데, 치료에만 전념하셔도 모자랄 상황이거늘 젊은 사람들도 힘겨워하는 드라마 출연을 어찌 하시는지 모르겠다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평소 의사들의 엄포가 지나친 편이라고 여긴 터라, 그리고 워낙 밝고 건강해 보이는 선생님 모습에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어요. 보란 듯 연이어 SBS <우리 집에 왜 왔니>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주시는가 하면 작년 여름에는 ‘결혼 46년차’라는 명찰을 달고 MBC <세바퀴>에서 ‘주부5종 경기’ 우승도 하셨잖아요. 저라면 쩔쩔맬 바늘귀를 어쩜 그리 잘 꿰시던지, 그리고 달걀 거품을 내는 손길도 어쩜 그리 기운차시던지, 이젠 쾌차하신 거려니 하고 마음 턱 놓았지 뭐에요.
혹시 그날 생각나세요? 아줌마라는 소리 처음 들으셨을 때 어떠셨느냐는 질문에 소녀처럼 수줍게 웃으시며 “아줌마 소리 듣기 전에 할머니 소리부터 들었어요”라고 하셨지요. 그러게요. 제 기억에도 선생님께서는 아줌마보다 할머니이실 적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할머니’라도 MBC <사랑이 뭐길래>의 꼬장꼬장한 인텔리 할머니와 SBS <청춘의 덫>의 정 깊고 눈물 많은 윤희 외할머니가 어찌 같을 수 있으며, KBS <내 사랑 누굴까>의 소박한 시할머니와는 또 어찌 같겠습니까. 의상 하나, 소품 하나, 머리 스타일 하나 어디 허투루 하는 법이 있으셨던가요. 가난하고 한 많은 역을 주로 맡으셨지만 돈 많은 할머니를 연기하셔도 KBS <오 필승 봉순영>에서는 기업 회장답게 똑 떨어지는 세련된 차림으로, SBS <쩐의 전쟁>에서는 사채업계의 큰 손의 포스가 배어나는 차림새로, 달라도 완연히 달랐지요. 아, 그러고 보니 MBC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의 총지배인 오여사의 단발머리도 잊을 수 없군요. 삼순이 엄마(김자옥)와 오여사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한판 붙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이젠 선생님이 만들어내시는 캐릭터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거네요. 아쉽다는 수식어 하나로는 이 심정이 도저히 전달이 안 되니 어쩝니까.
눈치 좀 주시지 그러셨어요
저 역시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여기는지라 누군가의 죽음을 극도로 애달파 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연기에 몰두하셨던 걸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네요. 뭐든 하나라도 더 보여주시고자 편찮으신 몸을 이끌고 그처럼 애쓰신 걸 텐데, 무지렁이 모양 둔해빠진 저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으니 말이에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KBS <장화 홍련>이 아침 드라마인지라 설거지를 하며, 걸레질을 하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음성조차 대충 흘려들은 적도 많으니 이를 어쩌면 좋아요. 조금이라도 눈치를 주셨다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셨다면 ‘혹시?’ 했을 테고 그럼 그처럼 결례는 범하지 않았을 텐데 싶어 깍쟁이처럼 표 안 내신 선생님이 원망스럽기도 해요. 그러나 장례식장을 찾은 후배 연기자들의 얘기로는 아파도 아픈 티 절대 안 내시고 끝까지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으려 노력하셨다 하더라고요. 동료들에게도 그러셨으니 시청자들에게 티를 내실 리가 있나요.
<장화 홍련>의 치매 노인 ‘변여사’에 몰두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죄송스러워서 요 며칠 ‘변여사’를 보고 또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창출해내신 ‘변여사’는 정말이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치매 노인이에요. 아마 후배들의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그리고 집 식구들도 모르게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내내 도우셨다 하니 그 또한 귀감이 되리라 믿습니다. 저도 선생님의 여러 가르침들을 가슴에 새기고 열심히 살아보겠어요. 생전에는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훗날 만나 뵙게 되면 손이라도 와락 한번 잡아보고 싶어요. 그때까지 그곳에서 부디 평안하세요.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정 많은 외할머니부터 기업 회장까지
사실 수술하신 후 바로 KBS <며느리 전성시대>에 복귀하셨을 때 제 인척이 한 걱정을 하더라고요. 아마 담당 의료진에게서 무슨 소리를 들었지 싶은데, 치료에만 전념하셔도 모자랄 상황이거늘 젊은 사람들도 힘겨워하는 드라마 출연을 어찌 하시는지 모르겠다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평소 의사들의 엄포가 지나친 편이라고 여긴 터라, 그리고 워낙 밝고 건강해 보이는 선생님 모습에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어요. 보란 듯 연이어 SBS <우리 집에 왜 왔니>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주시는가 하면 작년 여름에는 ‘결혼 46년차’라는 명찰을 달고 MBC <세바퀴>에서 ‘주부5종 경기’ 우승도 하셨잖아요. 저라면 쩔쩔맬 바늘귀를 어쩜 그리 잘 꿰시던지, 그리고 달걀 거품을 내는 손길도 어쩜 그리 기운차시던지, 이젠 쾌차하신 거려니 하고 마음 턱 놓았지 뭐에요.
혹시 그날 생각나세요? 아줌마라는 소리 처음 들으셨을 때 어떠셨느냐는 질문에 소녀처럼 수줍게 웃으시며 “아줌마 소리 듣기 전에 할머니 소리부터 들었어요”라고 하셨지요. 그러게요. 제 기억에도 선생님께서는 아줌마보다 할머니이실 적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할머니’라도 MBC <사랑이 뭐길래>의 꼬장꼬장한 인텔리 할머니와 SBS <청춘의 덫>의 정 깊고 눈물 많은 윤희 외할머니가 어찌 같을 수 있으며, KBS <내 사랑 누굴까>의 소박한 시할머니와는 또 어찌 같겠습니까. 의상 하나, 소품 하나, 머리 스타일 하나 어디 허투루 하는 법이 있으셨던가요. 가난하고 한 많은 역을 주로 맡으셨지만 돈 많은 할머니를 연기하셔도 KBS <오 필승 봉순영>에서는 기업 회장답게 똑 떨어지는 세련된 차림으로, SBS <쩐의 전쟁>에서는 사채업계의 큰 손의 포스가 배어나는 차림새로, 달라도 완연히 달랐지요. 아, 그러고 보니 MBC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의 총지배인 오여사의 단발머리도 잊을 수 없군요. 삼순이 엄마(김자옥)와 오여사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한판 붙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이젠 선생님이 만들어내시는 캐릭터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거네요. 아쉽다는 수식어 하나로는 이 심정이 도저히 전달이 안 되니 어쩝니까.
눈치 좀 주시지 그러셨어요
저 역시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여기는지라 누군가의 죽음을 극도로 애달파 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연기에 몰두하셨던 걸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네요. 뭐든 하나라도 더 보여주시고자 편찮으신 몸을 이끌고 그처럼 애쓰신 걸 텐데, 무지렁이 모양 둔해빠진 저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으니 말이에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KBS <장화 홍련>이 아침 드라마인지라 설거지를 하며, 걸레질을 하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음성조차 대충 흘려들은 적도 많으니 이를 어쩌면 좋아요. 조금이라도 눈치를 주셨다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셨다면 ‘혹시?’ 했을 테고 그럼 그처럼 결례는 범하지 않았을 텐데 싶어 깍쟁이처럼 표 안 내신 선생님이 원망스럽기도 해요. 그러나 장례식장을 찾은 후배 연기자들의 얘기로는 아파도 아픈 티 절대 안 내시고 끝까지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으려 노력하셨다 하더라고요. 동료들에게도 그러셨으니 시청자들에게 티를 내실 리가 있나요.
<장화 홍련>의 치매 노인 ‘변여사’에 몰두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죄송스러워서 요 며칠 ‘변여사’를 보고 또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창출해내신 ‘변여사’는 정말이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치매 노인이에요. 아마 후배들의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그리고 집 식구들도 모르게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내내 도우셨다 하니 그 또한 귀감이 되리라 믿습니다. 저도 선생님의 여러 가르침들을 가슴에 새기고 열심히 살아보겠어요. 생전에는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훗날 만나 뵙게 되면 손이라도 와락 한번 잡아보고 싶어요. 그때까지 그곳에서 부디 평안하세요.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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