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을 하지 않았다면 배우가 됐을 것 같다. 거침없고 표현력이 풍부한 말투, 마주 앉은 상대의 기를 누르는 듯한 눈빛은 어지간한 연기자 이상이다. 그가 연출한 MBC <안녕, 프란체스카>에 출연했던 심혜진 역시 노도철 감독에게 “배우의 피가 흐른다”고 말했다니 넘치는 ‘끼’를 감지한 사람이 한둘은 아닌 모양이다.

시작은 평범했다. 불문학을 전공한 노도철 감독은 대학교 1학년 때 프랑스 문화원에서 주관하는 불어 토론 모임 ‘Voix Amies’에 들어갔다. 1년에 한 번 있는 연극 공연에서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까뮈의 <정의의 사람들>에 러시아 테러리스트 보리야 야넨코프 역에 캐스팅되었던 그는 “이대 앞에 있던 청파 소극장 무대에 처음 서고 사람들 앞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때 처음으로 내 안의 ‘끼’라는 걸 발견하게 됐다”고 그 순간을 떠올린다. 결국 대학 4년의 겨울 방학을 모조리 연극에 쏟아 부은 데 이어 서울대 불문과 연극학회를 만들어 제대 후 사르트르의 <더러운 손>의 연출과 주연을 동시에 맡기도 했던 그에게 교수들은 몰리에르의 고전을 연구하길 권했지만 정작 노도철 감독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오네스코, 베케트, 쟝 쥬네 등의 부조리극이었다. “<안녕, 프란체스카>를 기획하며 신정구 작가가 구미호 가족 같은 아이디어를 냈을 때 저는 그런 소재를 통해 현대 사회를 비트는 가족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회상에서 엿볼 수 있듯 MBC <두근두근 체인지>나 <소울메이트>까지 노도철 감독의 작품들에서 드러난 묘하게 비틀린, 그러면서도 따뜻한 코미디의 감수성은 그런 과정을 통해 오랫동안 다듬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MBC 입사 후에는 “드라마국은 너무 바빠 아는 척도 안 해주고 추운 야외 현장에서 떨기만 했는데 예능국에서는 맨날 술 사주는 게 좋아서” 예능국에 지원했던 그는 <휴먼 TV 앗! 나의 실수>를 1년 동안 만들며 이틀 안에 꽁트 여섯 개를 찍고 직접 편집까지 하는 과정에서 기본기를 쌓았고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게릴라 콘서트’를 맡으며 한 가수를 주인공으로 감동과 눈물을 끌어내는 다큐 드라마적 연출을 익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흘러가 버리는 웃음보다는 좀 더 긴 호흡으로 메시지나 감동을 주고 싶어” 시트콤 세 편을 연달아 만든 뒤 결국 먼 길을 돌아 드라마국으로 돌아온 노도철 감독은 “나이 40이 다 되어 다시 신입사원이 된 심정으로” 지난 해 2부작 특집극 <우리들의 해피엔딩>과 미니시리즈 <종합병원 2>를 연출했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의 시스템을 배우고 장르에 맞는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혔다는 그는 이제 좀 더 자신의 스타일을 살리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장르를 그대로 따라가는 건 취향에 맞지 않는다. 어떤 주제를 다루든 유머와 감동이 동시에 살아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노도철 감독이 그런 의미에서 고른 드라마들은 다음과 같다.

日 <히어로> (Hero) 후지TV
2001년

“기무라 타쿠야의 드라마를 좋아해서 거의 다 봤다. 잘 생긴 배우이면서도 허허실실하는 연기를 보여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사람을 확 몰입시키는 매력이 있다. <히어로>는 도쿄지검 형사부를 무대로 기무라 타쿠야가 개성 있는 검사 역을 연기한 작품인데 특정 집단 안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모여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적으로 잘 그려냈다. 상대역인 마츠 다카코와의 호흡도 특히 좋았고 영화판 역시 드라마의 특별판처럼 상당히 완성도 있게 만들어서 재미있게 봤다. 기무라 타쿠야가 국무총리를 연기한 <체인지>도 그런 면에서 좋아했던 작품이다.”

美 <번 노티스> (Burn Notice) USA 네트워크
2007년~

를 좋아하는데 너무 드라이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 반면 <번 노티스>는 같은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좀 더 따뜻한 느낌의 드라마다. 조직에서 퇴출당한 스파이가 주인공이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드보일드나 스파이 물과는 달리 얼빵한 짓을 하는 주인공 마이클 웨스턴에게는 ‘골 때리는’ 매력이 있고, 다혈질에 피 보는 걸 즐기는 주인공의 여자친구 피오나 캐릭터도 재미있다. <덱스터>는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가 있어도 조금 우울한데 <번 노티스>는 유쾌하면서도 감동이 있다. <안녕 프란체스카>를 썼던 신정구 작가에게도 추천했는데 보고 좋아하더라.”

日 <혈액형별 여자가 결혼하는 방법> (血液型別 オンナが結婚する方法) 후지TV
2009년

“올해 2월 방송된 4부작 드라마다. 오프닝이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가 점점 자라 마침내 ‘테스트’를 거쳐야 하는 날이 왔다”하면서 초등학생인 여자애가 울면서 팔을 내밀어 혈액검사를 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A형, B형, O형, AB형의 네 여자가 각각의 주인공인데 발상 자체가 기발하고 개인적으로 혈액형에 원래 관심이 좀 있는 편이라 특히 초반에는 “맞아, 내가 아는 걔가 그래”, “맞아, 내가 저래” 하면서 봤다. 우리나라에서 같은 모티브를 단막극으로 만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하게 미쳐 있었던 때의 감수성을 다시 느끼고 싶다”

올 초 MBC <종합병원 2>를 마친 노도철 감독이 요즘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슬램덩크> 전편 다시 읽기, <드래곤볼> 처음부터 끝까지 복습하기 같은 일들이다. “예전에 내가 진짜 감동했던 것들, <두근두근 체인지>를 만들 때처럼 순수하게 미쳐 있었던 때의 감수성을 다시 느끼고 싶다. 연출자가 카메라로 찍을 수 있는 테크닉은 한정되어 있지만 감수성을 계속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고 어려운 것 같다. 머리가 굳어지면 안 되고 심장이 말랑말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은 작품을 많이 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랜 토리노>를 보다 너무 울었더니 끝나고 창피해서 영화관에서 얼굴을 들고 나올 수가 없을 정도였다. (웃음)” 그리고 드라마의 시스템을 좀 더 익히고 났을 때 그가 만들고 싶은 작품은 <히어로>나 <번 노티스> 같은 스타일의 “너무 힘주지 않은” 수사물이다. “웃음이 있고, 감동도 서스펜스도 있는” 장르물이라니,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그가 지금까지 내놓았던 드라마들 역시 우리가 예측할 수 없었던 작품들이었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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