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 황정민을 지우는 작업이 어려운 것 같다.
황정민
: 그게 제일 힘들다, 솔직히. 대본 속 인물은 죽어 있는 인물이고 나를 통해 살아있게 되는 건데 그 인물이 내게 올 수는 없다. 내가 다가가야지. 우리가 친구 사귈 때도 내 것 좀 양보하고 이해해야 친구가 되지 않나. 그러려면 내 것을 자꾸 버려야 하고. 내가 조금 피해 본다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그래야 친구가 되지.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역할을 맡는 건 친한 친구가 되고 싶은 욕심인 거고, 내 걸 버려야 하는 건데 어느새 보면 다 가지고 있다. (웃음)

“배우가 뭘 못하겠나. 타이즈 입기엔 몸매가 후졌으니 은 못 찍겠지만”

제일 사귀기 어려운 친구는 누구였나?
황정민
: <로드무비>의 대식. 그 때는 정말 힘들었다. 나는 늘 ‘연기는 진심 하나면 된다. 행동, 얼굴 표정 다 필요 없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대사만 하면 진심이 전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게 완전히 무너진 거다. 도대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여자만 바라봤는데 카메라 앞에서 남자를 사랑해야 한다니. 자신이 없었다. 내 눈에 드러나니까. 눈에서 하트가 나와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까. 그걸 내가 너무 잘 알지 않나. 그래서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정말 끝을 달렸다.

반대로 사귀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좋은 관계가 만들어진 친구도 있을 텐데.
황정민
: 그건 <바람난 가족>의 영작이다. 내 주위에 없는 친구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형이다.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까 ‘어? 나도 저런 면이 있었네’라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내게 희망을 주고 힘을 실어준 작품이었다. 사실 그런 면에서 늘 하나하나 나에게 공부가 되고 힘을 주는 영화들이었다. 그렇게 피터지게 싸워서 하다 보니 이번에 <그림자 살인>을 하게 됐고 나에 대해 또 다른 신뢰감을 얻게 된 거지.

모든 작품이 본인에게 의미를 갖는단 건 알겠다. 하지만 보는 사람들은 연기에 있어 확실히 폭발하는 어떤 지점들을 보고 싶어 한다. 가령 첫 영화인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강수 연기가 눈이 부셨는데 그 이후 그만큼의 무언가를 계속 바라게 되는 것 같다.
황정민
: 그런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다. 중요한 건 황정민이라는 배우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작품만 재밌게 봐주면 된다. 좋은 이야기 안에 있으면 어떤 인물이든 예쁘고 좋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배우 입장에선 좋은 배우로 기억되는 것보단 저런 좋은 영화라면 어떤 역할이든 참여하고 싶다는 느낌이 중요한 거다. 배우가 뭘 못하겠나. 물론 타이즈를 입기엔 몸매가 후졌으니(웃음) <스파이더맨> 같은 영화는 못 찍겠지만.

하지만 마음에 드는 역할이라도 조연을 맡기엔 이제 덩치가 커지지 않았나.
황정민
: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다. 그리고 내가 언제까지 주인공만 할 것 같나. 나이 50이 넘어가면 밥그릇이 줄어들 때가 분명히 온다. 거기 맞춰 소식(小食)을 하면 된다. 나는 그저 배우로서 사는 게 중요한 거다.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게 ‘가늘고 길게’다. 냉면처럼.(웃음)

“‘칠렐레 팔렐레’ 다니긴 해도 예술가라는 자존심은 있다”

어떻게 보면 배우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건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열려 있는 느낌이다.
황정민
: 배우는 철저하게 열려있어야 한다. 배우는 관객 때문에 존재하는 거다. 나는 연극을 하면서 관객이 두 명 세 명밖에 없어서 돌려보낸 적도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관객의 소중함을 너무 잘 알지. 그분들이 공짜로 보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럼 그에 대한 값어치를 해야 한다. 철저하게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줄 의무가 있는 거다. 시대 흐름에 따라서 내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어떤 것들이 관객들과 맞춰질 때 소통할 수 있는 거다. 배우도 변해야 한다. 그런 것이 배우로서의 자의식이다.

동시대와 소통하기 위해서 변화가 필요하다면 어떤 부분에 대한 건가.
황정민
: 나도 구시대의 사람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랑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가 다르다. 내가 어릴 적 좋아했던 건 <마지막 황제>나 , <태양의 제국>인데 이 때 느낀 감동과 리듬감이 <매트릭스>를 보고 즐긴 세대와 같을 수 없지 않나. 그걸 맞추기 어렵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걸 강요할 수도 없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계속 맞추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힘들다.

결국 배우는 소통하는 직업인 건가.
황정민
: 그렇다. 배우뿐 아니라 예술가라는 직업은 작품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그림자 살인>은 대단히 흥미진진하고 재밌게 소통하고 싶은 작품인 거지.

그렇다면 배우는 예술가라고 생각하나?
황정민
: 그렇다. 철저하게. ‘칠렐레 팔렐레’ 다니긴 해도 그런 자존심은 있다. 그러니 다양한 걸 보여줘야 한다. 하물며 아이스크림도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데 골라 볼 수 있는 뭔가를 제공해야지.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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