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석 씨에게
저를 기억하실까 모르겠습니다. MBC <베토벤 바이러스> 방영을 앞두고 화보촬영을 위해 만났는데, 그날의 촬영이 너무나 순조롭게 그리고 빨리 이루어진 탓에 우리는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졌지요. 그래도 한 번 만난 사람이라고 그 뒤로는 TV에서 볼 때 마다 옆집 살다 이사 간 동생을 보는 것처럼 반가웠답니다. 말한 것처럼 저는 근석 씨와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근석 씨는 책임감 강하고 욕심 많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걸 싫어 하고, 본인 스스로도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욕심쟁이 말이지요. 제가 뭐 대단한 팬이라 이것저것 조사해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니고요, 지금껏 근석 씨가 보여준 옷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혹시 패셔니스타의 의무감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실 오늘 이렇게 펜을 든 것은 <백상예술대상>에서의 옷차림 때문입니다. 그 옷차림을 두고 주변에서 어찌나 말들이 많은지 그 시상식을 보지 못한 저로서는 꿀 먹은 벙어리 신세로 며칠을 버텨야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옷을 입었는지 모르겠다는 말부터 정신이 나간 것 같다는 말까지 갖가지 혹평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부디 너무 상심하진 말기를. 옆에 없을 땐 나랏님 흉도 보는 게 세상 인심 아니겠어요?
제 의견을 살짝 말씀드리자면…. <원피스>라는 만화를 본 적 없는 저로서는 그 장면을 보았을 때 일본 배우 오다기리 죠가 떠올랐습니다. 풀어헤친 파마머리에 저지 티셔츠를 레이어드해 입고, 투박한 워커 부츠를 신은 오다기리의 모습을 언젠가 본 적 있거든요. 그때 오다기리 죠가 멋있었던 건 그가 가진 전반적인 이미지와-헝클어진 머릿결이나 제멋대로 자란 구레나룻, 무심한 태도 같은 것들 있지 않습니까?- 옷차림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인데, 깎아놓은 밤톨처럼 깨끗하고 귀여운 느낌을 가진 근석 씨가 왜 저런 스타일을 택했을까 싶어 의아하고 아쉬웠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또 TPO 논란이 한창인 것 같습니다만 근석 씨의 이번 옷차림을 놓고 TPO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건 제겐 좀 구태의연하게 느껴집니다. 인생에는 TPO 라는 걸 무시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시기도 있게 마련이고. 당신은 스물 셋, 룰이라는 것을 깨뜨림으로써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싶어 할 그런 나이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혹시 패셔니스타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근석 씨를 억누르고 있지는 않은지요? 끊임없이 새롭고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언젠가 톰 포드가 그랬다지요. “충격을 주지 못한다면 패션이 아니다”라구요. 혹 근석 씨도 그 말을 기억하고 계신 건가요? 그렇다면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가 했다는 이 말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오드리의 스타일을 추앙한다면 그건 그녀가 자신의 스타일이라고 믿는 것을 평생 지켜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장근석이 장근석으로 존재하는 것
<백상예술대상>에 참석한 근석 씨의 사진을 본 뒤, 다른 시상식에는 어떻게 입고 갔나 궁금해 예전의 사진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작년 연말엔 턱시도를 입는 대신 머리를 장난스럽게 묶음으로써, 또 연달아 열린 다른 시상식에선 평범한 턱시도 대신 퍼가 장식된 화려한 슈트를 입음으로써 개성을 뽐냈더군요.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늘 파격적일 필요는 없어요. 늘 남들과 다른 옷차림을 보여주어야만 패셔니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배우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밀도 있게 채우기 위해 역할 하나하나를 고심해서 고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패셔니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이라면 자신의 의상 하나하나를 고심해서 고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이 큰 소리를 내는 대신 눈동자 움직임 하나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낼 줄 아는 것처럼 옷을 잘 입는 사람은 파격적인 옷이 아니라 같은 옷이라도 자기 식으로 입어냄으로써 감각을 뽐내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요.
며칠 전엔 패션 화보를 촬영하고 싶었던 어느 배우(의 매니저)에게 딱지를 맞았습니다. ‘패션 잡지에 너무 자주 얼굴을 비추다보면 연기자로서의 이미지가 약해진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옷 잘 입는 배우와 연기 잘 하는 배우 사이에 크나큰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아 적잖이 서운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근석 씨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자신의 스타일을 가졌다는 것, 뛰어난 패션 센스를 가졌다는 것이 좋은 마스크나 남다른 발성 못지않게 좋은 배우를 이루는 필수 요소로 여겨지는 날이 오도록 근석 씨가 초석 역할을 해주길 바래봅니다. 아,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기대가 어깨를 짓눌러도 옷 입기가 괴로운 숙제가 되어선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더 부담만 준 것은 아닌지…. 옷을 좋아하는 사람은, 옷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표가 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너무 남들과 달라지려고 애쓰지 마세요. 남들과 달라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근석이 장근석으로 존재하는 것, 장근석이 장근석임을 잊지 않는 것일 테니까요.
글. 심정희 ( 패션디렉터)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저를 기억하실까 모르겠습니다. MBC <베토벤 바이러스> 방영을 앞두고 화보촬영을 위해 만났는데, 그날의 촬영이 너무나 순조롭게 그리고 빨리 이루어진 탓에 우리는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졌지요. 그래도 한 번 만난 사람이라고 그 뒤로는 TV에서 볼 때 마다 옆집 살다 이사 간 동생을 보는 것처럼 반가웠답니다. 말한 것처럼 저는 근석 씨와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근석 씨는 책임감 강하고 욕심 많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걸 싫어 하고, 본인 스스로도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욕심쟁이 말이지요. 제가 뭐 대단한 팬이라 이것저것 조사해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니고요, 지금껏 근석 씨가 보여준 옷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혹시 패셔니스타의 의무감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실 오늘 이렇게 펜을 든 것은 <백상예술대상>에서의 옷차림 때문입니다. 그 옷차림을 두고 주변에서 어찌나 말들이 많은지 그 시상식을 보지 못한 저로서는 꿀 먹은 벙어리 신세로 며칠을 버텨야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옷을 입었는지 모르겠다는 말부터 정신이 나간 것 같다는 말까지 갖가지 혹평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부디 너무 상심하진 말기를. 옆에 없을 땐 나랏님 흉도 보는 게 세상 인심 아니겠어요?
제 의견을 살짝 말씀드리자면…. <원피스>라는 만화를 본 적 없는 저로서는 그 장면을 보았을 때 일본 배우 오다기리 죠가 떠올랐습니다. 풀어헤친 파마머리에 저지 티셔츠를 레이어드해 입고, 투박한 워커 부츠를 신은 오다기리의 모습을 언젠가 본 적 있거든요. 그때 오다기리 죠가 멋있었던 건 그가 가진 전반적인 이미지와-헝클어진 머릿결이나 제멋대로 자란 구레나룻, 무심한 태도 같은 것들 있지 않습니까?- 옷차림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인데, 깎아놓은 밤톨처럼 깨끗하고 귀여운 느낌을 가진 근석 씨가 왜 저런 스타일을 택했을까 싶어 의아하고 아쉬웠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또 TPO 논란이 한창인 것 같습니다만 근석 씨의 이번 옷차림을 놓고 TPO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건 제겐 좀 구태의연하게 느껴집니다. 인생에는 TPO 라는 걸 무시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시기도 있게 마련이고. 당신은 스물 셋, 룰이라는 것을 깨뜨림으로써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싶어 할 그런 나이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혹시 패셔니스타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근석 씨를 억누르고 있지는 않은지요? 끊임없이 새롭고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언젠가 톰 포드가 그랬다지요. “충격을 주지 못한다면 패션이 아니다”라구요. 혹 근석 씨도 그 말을 기억하고 계신 건가요? 그렇다면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가 했다는 이 말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오드리의 스타일을 추앙한다면 그건 그녀가 자신의 스타일이라고 믿는 것을 평생 지켜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장근석이 장근석으로 존재하는 것
<백상예술대상>에 참석한 근석 씨의 사진을 본 뒤, 다른 시상식에는 어떻게 입고 갔나 궁금해 예전의 사진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작년 연말엔 턱시도를 입는 대신 머리를 장난스럽게 묶음으로써, 또 연달아 열린 다른 시상식에선 평범한 턱시도 대신 퍼가 장식된 화려한 슈트를 입음으로써 개성을 뽐냈더군요.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늘 파격적일 필요는 없어요. 늘 남들과 다른 옷차림을 보여주어야만 패셔니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배우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밀도 있게 채우기 위해 역할 하나하나를 고심해서 고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패셔니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이라면 자신의 의상 하나하나를 고심해서 고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이 큰 소리를 내는 대신 눈동자 움직임 하나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낼 줄 아는 것처럼 옷을 잘 입는 사람은 파격적인 옷이 아니라 같은 옷이라도 자기 식으로 입어냄으로써 감각을 뽐내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요.
며칠 전엔 패션 화보를 촬영하고 싶었던 어느 배우(의 매니저)에게 딱지를 맞았습니다. ‘패션 잡지에 너무 자주 얼굴을 비추다보면 연기자로서의 이미지가 약해진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옷 잘 입는 배우와 연기 잘 하는 배우 사이에 크나큰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아 적잖이 서운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근석 씨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자신의 스타일을 가졌다는 것, 뛰어난 패션 센스를 가졌다는 것이 좋은 마스크나 남다른 발성 못지않게 좋은 배우를 이루는 필수 요소로 여겨지는 날이 오도록 근석 씨가 초석 역할을 해주길 바래봅니다. 아,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기대가 어깨를 짓눌러도 옷 입기가 괴로운 숙제가 되어선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더 부담만 준 것은 아닌지…. 옷을 좋아하는 사람은, 옷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표가 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너무 남들과 달라지려고 애쓰지 마세요. 남들과 달라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근석이 장근석으로 존재하는 것, 장근석이 장근석임을 잊지 않는 것일 테니까요.
글. 심정희 ( 패션디렉터)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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