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로 몸이 잔뜩 경직되었다가 서서히 풀릴 때의 기분 좋은 나른함. 문채원의 목소리, 그리고 말투에서는 그런 나른함이 묻어난다. “외국에서 살다온 사람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살짝 굴려지는 연음과 나지막한 목소리는 에서 김조년에게 자신을 취하려거든 재산 전부를 내놓으라며 “아까우시겠지요. 어떻게 모으신 재산인데. 힘없고 영세한 상인들 등치고 배문질러 모으신 거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정향의 또박또박 한 말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만약 극 속 정향이 인터뷰이라면 어떤 질문을 해도 단문으로 대답 할 타입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연기한 문채원은 김조년의 신사적 태도에 대한 정향의 감정에 대해 ‘싫다 좋다’로 규정짓기보다는 “그 사람은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들어와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라는 식으로 말하는 타입이다. 의미가 딱 고정되지 않고 부유하는 듯한 화법은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대하는 태도 그대로다.

“내게 그런 모습이 있다면 누군가 시켜주겠지”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에서 가장 정통 사극에 가까운 인물은 아마도 정향일 것이다.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힌 윤복(문근영)에게 담담히 “여인임을 속이고도 저를 마음에 담아 두었던 것을 원망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은 요즘 보기 드문 절제된 이별 장면이다. 전작 와 영화 에서 모두 교복을 입은 채 유학파 공주님이나 반항적인 야채가게 딸을 연기했던 문채원은 이 드라마로 성인 연기까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여기에 대해 어떤 발전의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단순한 흐름으로 받아들인다. “‘성인 연기로 어떻게 넘어가지’라는 물음표만 있었지, 성인 연기를 하겠다는 의지는 없었”던 이 젊은 여배우는 단지 “내게 그런 모습이 있다면 누군가 시켜주겠지”라는 생각으로 정향 역을 맡았다. 이제부터 이걸 발판삼아 더 성장하겠다는 다짐과는 거리가 먼, 조금 싱겁지만 뻔하진 않은 대답.

클리셰를 걷어낸 신선한 소설 한 편

사실 주어진 사실들을 모아 개념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입장인 인터뷰어에게 문채원은 밝은 미소와 예의 바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인터뷰이다. 그녀는 예고 진학을 위해 선택했던 그림이나, 지금 하고 있는 연기처럼 스스로 선택했던 것들이 지금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정의하기보단 그 순간순간의 우연적 끌림을 말한다. 예고 재학시절 학교 근처로 거리 캐스팅을 하러 오는 연예 기획자들을 보고 “연기를 하겠다는 목표도, 노래를 할 생각도 없이 단지 연예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호기심”만을 느꼈던 그녀가 우연히 입은 화상에도 불구하고 첫 작품인 오디션에 가서 ‘꼭 하고싶다’고 외쳤던 건, 연기라는 영역 자체에 대해 욕심을 느낀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마음껏 뭔가 학생 특유의 젊음을 풀어내고 싶어” 그 작품에 끌렸을 뿐이었다.

과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지금은 맘에 드는 작품에서 연기를 하고, 앞으로는 무엇을 할지 모를 어떤 사람. 그런 그녀를 연기자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이 과연 어울리는 일인지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흔한, 좋은 연기자로 성장하겠다는 식의 접대성 멘트조차 모두 걷어낸 이 신예의 모습이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마치 모든 종류의 클리셰를 없애버린 신선한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 순간순간을 새로운 이야기로 채운 이 흥미로운 소설의 남은 페이지에는 어떤 새로운 문장이 채워질 수 있을까.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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