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이 글에는 ‘어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가 스릴러나 공포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극도의 몰입에서 야기되는 쾌감 때문이다. 그 묘미를 일깨워준 작품은 1980년대 미국의 TV 시리즈 ‘환상 특급(The Twilight Zone)’이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방영된 동명의 오리지널 작품을 리메이크한 시리즈였다. 초자연적이고 불가사의한 에피소드의 끝에는 반전도 있었다. 어린 나는 KBS에서 방영되는 ‘환상 특급’에 흠뻑 빠졌다. 불편하거나 불쾌한 구석에도 곱씹게 하는 자극점이 존재했다. ‘그림자 인간’ 편을 본 날에는 침대가 아닌 이불에서 자서, 그림자가 생성될 공간이 없어서, 그림자 인간과 엮일 일이 없어서 안도하며 잠을 청하기도 했다.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2017)과 ‘어스’는 ‘환상 특급’의 첫맛부터 뒷맛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이다. 공포 영화로서도 충분히 서늘하지만, 영화 곳곳에 담긴 함의는 꼬리를 단 생각들로 머릿속을 파고든다.
1986년 산타크루즈 해변로. 유원지에서 애들레이드(매디슨 커리)는 경품으로 고를 수 있는 생일선물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티셔츠를 선택한다. 엄마는 화장실에 가고, 아빠는 두더지 게임에 빠져있을 동안 애들레이드는 새빨간 사과사탕을 그러쥔 채 ‘예레미야 11장 11절’이라고 적힌 판을 든 사내를 지나쳐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영혼의 여행 – 당신을 찾으세요’라는 간판이 걸린 체험관으로 성큼 들어간다. 모래밭에 사과사탕을 툭 떨구고. 거울의 방에 갇혀버린 애들레이드는 두려움을 떨치려고 휘파람을 부르다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소녀와 마주친다.
현재. 산타크루즈 해변의 인근 별장으로 애들레이드(루피타 뇽오)는 남편 게이브(윈스턴 듀크), 딸 조라(샤하디 라이트 조셉), 아들 제이슨(에반 알렉스)과 휴가차 찾아온다. 게이브는 친구부부인 조쉬(팀 헤이덱커)와 키티(엘리자베스 모스)를 만나기로 했다며 해변으로 가자고 채근하지만, 애들레이드는 영 내키질 않는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애들레이드는 일상에 불쑥 배어드는 기억에 어질하다. 해변에서 화장실을 찾던 제이슨은 양팔을 벌리고,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한 사내를 발견한다. 그리고 ‘멀린의 숲 – 당신을 찾으세요’라는 간판이 걸린 체험관과 마주한다.
별장으로 돌아온 애들레이드는 게이브에게 홀로 끙끙거린 기억을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 해변 산책로를 걷다가 길을 잃고 거울의 방에 들어갔다가 꼭 자신처럼 생긴 한 소녀를 발견하고 달아났다는. “너무 힘들어. 여기 있으면 꼭 어떤 먹구름 같은 게 내 머리 위를 맴도는 기분이 들어. 평생 동안 난 걔한테 쫓기는 기분으로 살았어. 걔가 가까이 있다는 기분이 들어.” 애들레이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이슨이 외친다. “어떤 가족이 우리 집 앞에 있어!”
어떤 가족은 게이브의 경고에 미동도 않다가 돌연 둔탁한 신음을 내뱉으며 스르르 움직인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그들의 침입을 막아보려 하지만 집안으로 들이닥친다. 그들은 놀랍게도 애들레이드 가족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유일하게 인간의 말을 하는, 애들레이드의 모습인 레드가 말한다. “오래 전 아주 옛날에 한 소녀가 있었어. 걔한테는 그림자가 있었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지. 한몸처럼. 그림자는 소녀를 증오했어. 오랫동안. 그림자는 깨달았어. 신이 자기를 시험한다는 것을.” 그리고 끝으로 애들레이드에게 경고한다. “너와 나의 끈을 이제 자를 거야.”
지난달 27일 개봉한 ‘어스’의 감독 조던 필은 말했다. “‘어스’의 아이디어는 도플갱어에 대한 깊은 공포심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자신의 최대의 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개념이 나를 매료시켰다. 누구나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지만 진실을 숨기려 하고 타인을 원망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괴물은 우리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스’는 미국 대륙 밑에는 수천 마일의 지하 터널이 존재하고, 그 목적을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오래 전 육신을 복제하는 법을 알아낸 이들은 영혼은 둘이 나누어가지게 한 후, 지하의 사람들로 지상의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했다.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수세기 동안 지하의 사람들은 미쳐갔다. 지상에서 온 어린 애들레이드가 지하 사람들의 리더로 성장하면서 희망이 된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어린 애들레이드가 입고 있던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Hands Across America)’ 캠페인 티셔츠를 청사진 삼아서.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예레미야 11장 11절’은 그 내용이 나오지는 않는다. 외려 대칭을 이루고 있는 숫자의 배열이 더 크게 와 닿는다. 별장에서 게이브가 보는 야구 경기의 스코어도 ‘11 대 11’이고, 제이슨이 애들레이드에게 가리키는 시계의 시각도 ‘11:11’, 앰뷸런스 윗면의 숫자도 ‘1111’이다. 애들레이드의 식구와 레드의 식구도, 쌍둥이 자매를 둔 조쉬와 키티네도 ‘1111’로 설명할 수 있다. 대칭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마치 데칼코마니 같고, ‘어스’의 기본축인 도플갱어와도 연결된다.
‘어스’(Us)는 우리들로도, 미국(United States)으로도 읽히는 중의적 단어로 조던 필 감독은 예민하게 담아낸다. 겉으로 드러나는 공포와 속으로 파고드는 공포가 휘몰아친다. 지상의 사람들과 대비되는 지하의 사람들, 즉 그림자의 삶은 처연하다. 핏빛 레드 컬러의 의상, 금빛 가위, 케이지 속 토끼처럼 그들의 상징물도 공포를 넘어선 비감(悲感)을 자아낸다. ‘어스’는 호락호락한 서사는 아니지만 곰곰이 찾자면 숨은 의미들이 단숨에 차오른다. 그래서 예측이 가능하지만 김빠지는 반전은 아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기도 한 조던 필은 유머로 숨고르기도 잊지 않는다.
‘겟 아웃’에서도 음악을 담당했던 마이클 아벨스는 이번 작품으로 관객을 완벽하게 홀린다. 공포물은 사운드와 음악에 귀가 더 열리는 장르이긴 하지만, 그의 음악은 제대로 공포를 배양한다. 또한 클라이맥스에서 어린 시절 발레를 하는 두 소녀와 현재 흉기를 내두르며 맞서는 두 여자가 교차로 담기면서 관객의 심장을 부여잡는다. ‘어스’의 중심에는 루피타 뇽오가 있다. 목을 긁는 소리, 사뿐한 걸음새, 애처로이 부는 휘파람, 그리고 희번득한 얼굴…. 애들레이드의 옷이 점점 피로 물들듯, ‘어스’는 루피타 뇽오의 농익은 연기로 물든다.
조던 필의 ‘환상 특급’ 리부트 시리즈가 CBS 스트리밍 서비스로 시작된다고 한다. ‘조던 필’과 ‘환상 특급’의 조합이라니 눈도 귀도 번쩍 뜨이는 소식이다. 조던 필이 드리우는 그림자 속으로 ‘환상 특급’이 삭 배어들지 싶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스릴러나 공포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극도의 몰입에서 야기되는 쾌감 때문이다. 그 묘미를 일깨워준 작품은 1980년대 미국의 TV 시리즈 ‘환상 특급(The Twilight Zone)’이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방영된 동명의 오리지널 작품을 리메이크한 시리즈였다. 초자연적이고 불가사의한 에피소드의 끝에는 반전도 있었다. 어린 나는 KBS에서 방영되는 ‘환상 특급’에 흠뻑 빠졌다. 불편하거나 불쾌한 구석에도 곱씹게 하는 자극점이 존재했다. ‘그림자 인간’ 편을 본 날에는 침대가 아닌 이불에서 자서, 그림자가 생성될 공간이 없어서, 그림자 인간과 엮일 일이 없어서 안도하며 잠을 청하기도 했다.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2017)과 ‘어스’는 ‘환상 특급’의 첫맛부터 뒷맛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이다. 공포 영화로서도 충분히 서늘하지만, 영화 곳곳에 담긴 함의는 꼬리를 단 생각들로 머릿속을 파고든다.
1986년 산타크루즈 해변로. 유원지에서 애들레이드(매디슨 커리)는 경품으로 고를 수 있는 생일선물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티셔츠를 선택한다. 엄마는 화장실에 가고, 아빠는 두더지 게임에 빠져있을 동안 애들레이드는 새빨간 사과사탕을 그러쥔 채 ‘예레미야 11장 11절’이라고 적힌 판을 든 사내를 지나쳐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영혼의 여행 – 당신을 찾으세요’라는 간판이 걸린 체험관으로 성큼 들어간다. 모래밭에 사과사탕을 툭 떨구고. 거울의 방에 갇혀버린 애들레이드는 두려움을 떨치려고 휘파람을 부르다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소녀와 마주친다.
현재. 산타크루즈 해변의 인근 별장으로 애들레이드(루피타 뇽오)는 남편 게이브(윈스턴 듀크), 딸 조라(샤하디 라이트 조셉), 아들 제이슨(에반 알렉스)과 휴가차 찾아온다. 게이브는 친구부부인 조쉬(팀 헤이덱커)와 키티(엘리자베스 모스)를 만나기로 했다며 해변으로 가자고 채근하지만, 애들레이드는 영 내키질 않는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애들레이드는 일상에 불쑥 배어드는 기억에 어질하다. 해변에서 화장실을 찾던 제이슨은 양팔을 벌리고,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한 사내를 발견한다. 그리고 ‘멀린의 숲 – 당신을 찾으세요’라는 간판이 걸린 체험관과 마주한다.
별장으로 돌아온 애들레이드는 게이브에게 홀로 끙끙거린 기억을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 해변 산책로를 걷다가 길을 잃고 거울의 방에 들어갔다가 꼭 자신처럼 생긴 한 소녀를 발견하고 달아났다는. “너무 힘들어. 여기 있으면 꼭 어떤 먹구름 같은 게 내 머리 위를 맴도는 기분이 들어. 평생 동안 난 걔한테 쫓기는 기분으로 살았어. 걔가 가까이 있다는 기분이 들어.” 애들레이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이슨이 외친다. “어떤 가족이 우리 집 앞에 있어!”
어떤 가족은 게이브의 경고에 미동도 않다가 돌연 둔탁한 신음을 내뱉으며 스르르 움직인다. 애들레이드 가족은 그들의 침입을 막아보려 하지만 집안으로 들이닥친다. 그들은 놀랍게도 애들레이드 가족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유일하게 인간의 말을 하는, 애들레이드의 모습인 레드가 말한다. “오래 전 아주 옛날에 한 소녀가 있었어. 걔한테는 그림자가 있었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지. 한몸처럼. 그림자는 소녀를 증오했어. 오랫동안. 그림자는 깨달았어. 신이 자기를 시험한다는 것을.” 그리고 끝으로 애들레이드에게 경고한다. “너와 나의 끈을 이제 자를 거야.”
지난달 27일 개봉한 ‘어스’의 감독 조던 필은 말했다. “‘어스’의 아이디어는 도플갱어에 대한 깊은 공포심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자신의 최대의 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개념이 나를 매료시켰다. 누구나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지만 진실을 숨기려 하고 타인을 원망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괴물은 우리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스’는 미국 대륙 밑에는 수천 마일의 지하 터널이 존재하고, 그 목적을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오래 전 육신을 복제하는 법을 알아낸 이들은 영혼은 둘이 나누어가지게 한 후, 지하의 사람들로 지상의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했다.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수세기 동안 지하의 사람들은 미쳐갔다. 지상에서 온 어린 애들레이드가 지하 사람들의 리더로 성장하면서 희망이 된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어린 애들레이드가 입고 있던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Hands Across America)’ 캠페인 티셔츠를 청사진 삼아서.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예레미야 11장 11절’은 그 내용이 나오지는 않는다. 외려 대칭을 이루고 있는 숫자의 배열이 더 크게 와 닿는다. 별장에서 게이브가 보는 야구 경기의 스코어도 ‘11 대 11’이고, 제이슨이 애들레이드에게 가리키는 시계의 시각도 ‘11:11’, 앰뷸런스 윗면의 숫자도 ‘1111’이다. 애들레이드의 식구와 레드의 식구도, 쌍둥이 자매를 둔 조쉬와 키티네도 ‘1111’로 설명할 수 있다. 대칭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마치 데칼코마니 같고, ‘어스’의 기본축인 도플갱어와도 연결된다.
‘어스’(Us)는 우리들로도, 미국(United States)으로도 읽히는 중의적 단어로 조던 필 감독은 예민하게 담아낸다. 겉으로 드러나는 공포와 속으로 파고드는 공포가 휘몰아친다. 지상의 사람들과 대비되는 지하의 사람들, 즉 그림자의 삶은 처연하다. 핏빛 레드 컬러의 의상, 금빛 가위, 케이지 속 토끼처럼 그들의 상징물도 공포를 넘어선 비감(悲感)을 자아낸다. ‘어스’는 호락호락한 서사는 아니지만 곰곰이 찾자면 숨은 의미들이 단숨에 차오른다. 그래서 예측이 가능하지만 김빠지는 반전은 아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기도 한 조던 필은 유머로 숨고르기도 잊지 않는다.
‘겟 아웃’에서도 음악을 담당했던 마이클 아벨스는 이번 작품으로 관객을 완벽하게 홀린다. 공포물은 사운드와 음악에 귀가 더 열리는 장르이긴 하지만, 그의 음악은 제대로 공포를 배양한다. 또한 클라이맥스에서 어린 시절 발레를 하는 두 소녀와 현재 흉기를 내두르며 맞서는 두 여자가 교차로 담기면서 관객의 심장을 부여잡는다. ‘어스’의 중심에는 루피타 뇽오가 있다. 목을 긁는 소리, 사뿐한 걸음새, 애처로이 부는 휘파람, 그리고 희번득한 얼굴…. 애들레이드의 옷이 점점 피로 물들듯, ‘어스’는 루피타 뇽오의 농익은 연기로 물든다.
조던 필의 ‘환상 특급’ 리부트 시리즈가 CBS 스트리밍 서비스로 시작된다고 한다. ‘조던 필’과 ‘환상 특급’의 조합이라니 눈도 귀도 번쩍 뜨이는 소식이다. 조던 필이 드리우는 그림자 속으로 ‘환상 특급’이 삭 배어들지 싶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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