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트립 투 스페인’ 포스터
영화 ‘트립 투 스페인’ 포스터
TV를 켜면 온통 ‘먹방’ 타령이다. 아니 TV를 비롯한 온갖 매체 어디서나 맛난 음식을 소개하고 연예인들이 대거 등장해 신나게 먹어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게 요즘 추세다.

그 중에서 특히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영국남자’라는 유튜브 시리즈다. 올리라는 영국 청년이 고향의 친지들에게 한국 음식을 소개하고 그들의 반응을 담아낸 영상인데, 무심코 먹었던 우리 음식에 그런 묘미가 숨어있는지 미처 몰랐었다. 여기서 드는 한 가지 의문은 왜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영국 사람들이 이렇게 타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정학적으로 고립된 섬나라다 보니 외부세계로 뻗어나가려는 도전정신 때문에 그럴까? 아무튼 ‘영국남자’는 내가 흥미를 잃지 않고 보는 유일한 ‘먹방’이다.

‘트립 투 스페인'(감독 마이클 윈터바텀)이라는 영화도 광범위하게 보면 ‘먹방’ 유에 해당한다. 그런데 성격이 여느 ‘음식영화’와 좀 다르다.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두 사람은 실제 영화배우자 절친인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다. 이들은 영화에서 실명으로 스페인 여행을 떠나 북부에서 남부까지 지역을 소개하고 음식점들을 섭렵하는데 간단한 음식설명과 식감을 표현하는 대목들이 장황하거나 유치하지 않았다. 지역 음식 고유의 특징만 보여주는 데 주목했다는 뜻이다. 식당에서 키운 들소의 젖으로 만든 신선 치즈, 살라망가에서 온 이란 산 어린 돼지고기 구이, 캐비어를 곁들인 석쇠구이 가리비… 과연 나는 언제나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지역 고유의 풍광과 음식, 이 두 가지를 아무리 세련되게 묘사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 하나만 갖고 다른 음식영화가 구별되기는 어렵다. ‘트립 투 스페인’에서 강조하는 또 하나의 내용은 이동하는 자동차와 식탁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다. 그들은 1965년에 태어난 동갑내기에 배우, 가수, 코미디언으로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라디오 사회자에 자신의 TV 시리즈까지 갖고 있는 명실공이 영국의 대표적 연예인들이다. 두 사람은 곧잘 단짝을 이뤄 쇼를 진행했고 스티브 쿠건은 미혼모가 성장한 아들을 찾아가는 영화 ‘필로미나의 기적2013’에서 주연, 제작, 각본을 맡은 적이 있을 정도로 정평이 난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트립 투 스페인’이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그 비슷한 느낌은 주지만 말이다.

두 사람은 여행 중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진지한 주제로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마론 브란도 흉내를 내면서 말을 하다가 아예 ‘대부’의 대사 한 부분을 쏙 떼어내 주제와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다. 존 허트, 로버트 드 니로, 로저 무어, 숀 코네리, 안소니 홉킨스, 크리스토퍼 리, 이안 멕컬런 등등,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당대의 가수와 히트곡들도 종종 거론하는데 더스티 스프링필드, 믹 재거, 데이빗 보위, 연극으로는 ‘리어왕’으로 하는 상황극도 등장한다. 영국의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진정한 배우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스티브 쿠건을 오직 영화배우로만 인식했던 나로서는 큰 발견이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재치 만점의 대화에 매료되었다. 아마 나와 비슷한 시기를 거쳐 왔고 관심분야도 겹쳐서인 것 같았다. 아쉬웠던 점은 그 시절의 대한민국은 폐쇄적이어서 외국문물을 제한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기에 상황 하나하나를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훨씬 더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영화, 연극에서 인용한 아름다운 대사들은 두고두고 머리에 남겨져있으니 본전을 톡톡히 뽑은 셈이다.

영화에서 스티브는 스페인의 역사를 철저하게 공부하고 온 성실한 여행객인데다가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다. 롭은 우선 즐기는 데 치중하며 스티브가 자시 지식을 자랑할 때마다 아니꼽다는 듯이 단지를 건다. 덕분에 종교재판과 연관된 스페인 가톨릭 역사와 스페인이 자랑하는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의 낯선 이야기들을 공부했고, 쿠엥카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파라도르 드 쿠엥카 수도원의 정경과 아프리카가 지척에 보이는 지브랄터 해협도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었다. 이 정도 음식영화를 만든다면 나무랄 데가 없겠다.

영화를 보면서 새롭게 안 사실들이 있다. ‘Windmills of my mind’를 부른 노엘 해리슨이 ‘마이 페어 레이디1964’에 나온 랙스 해리슨의 아들이라는 것과 세르반테스가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핫산의 남자 애인이 되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참으로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투성이다. 두 배우는 이미 ‘트립 투 영국2010’과 ‘트립 투 이탈리아2014’에 함께 출연했다. 아무튼 이 영화의 재미는 스토리에 있지 않다.

여행이 끝나고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간 롬과 달리 스티브는 주변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 점점 더 우울해진다. 후속으로 만들어질 영화는 아마 ‘트립 투 모로코’가 될 것이다. 나도 다음에 친구들과 만나면 ‘트립 투 스페인’의 두 사람처럼 멋진 대화를 나누어 볼 수 있을까? 그런 친구가 한 사람 있기는 한데 말이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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