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 출연한 배우 김호영 / 사진제공=JI&H 미디어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 출연한 배우 김호영 / 사진제공=JI&H 미디어
2002년 뮤지컬 ‘렌트’로 데뷔한 김호영(34)은 어릴 때부터 배우를 꿈꿨다. 동국대에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한 그에게 뮤지컬 무대는 평범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16년이 흐른 지금, 공연계에서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어떤 선택이든 ‘보통’은 없다. 누군가는 ‘특이하다’, 또 다른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했다. 하지만 김호영은 “자신감”이라고 했다. 뮤지컬 ‘아이다'(2005) ‘헤어스프레이'(2007) ‘모차르트 오페라 락'(2012) ‘킹키부츠'(2016), 연극 ‘이'(2006) ‘거미여인의 키스'(2015) ‘로미오와 줄리엣'(2016) ‘굳빠이, 이상'(2017) 등 쉼 없이 무대에 올랐다. 그중에서 유독 눈길을 끈 건 뮤지컬 ‘라카지'(2012)와 ‘프리실라'(2014)였다. 화려한 여장으로 시선을 빼앗아 잔상도 오래갔다. 그러나 그게 김호영의 전부는 아니다. 지난해 OCN 드라마 ‘보이스’에서 사이코패스 역을 소름 끼치게 표현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얼굴에서 전작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인물과 상황, 배경에 따라 달라지는 김호영이야 말로 ‘천의 얼굴’이다. 칭찬에도 쑥스러워하지 않으며 시켜만 주면 잘 해낼 거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이유다.

10.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와 뮤지컬 ‘킹키부츠’의 연습을 병행했는데 힘들지 않았나요?
김호영 : 다행히 두 작품 모두 했던 터라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어요. 게다가 연습과 연습, 공연과 공연이 아니라 연습과 공연이 겹친 것이어서 더 좋았고요. ‘거미여인의 키스’와 ‘킹키부츠’가 올해 두 번째 인데, 굉장히 편안하게 했어요. 검증된 작품이니까 수월했죠. 2년 전 ‘거미여인의 키스’를 했을 때 워낙 마니아층에게 인기 있는 작품이었고, 내용도 진한 작품이어서 끌렸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늘 연기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거든요. 뮤지컬이 아니라 대사 위주의 2인극이고, 두 사람의 심리와 상황에 집중해서 좋았습니다.

10. 두 작품으로 올해를 시작할 수 있어서 더 좋았겠군요?
김호영 : 각기 이유는 다르지만 ‘킹키부츠’와 ‘거미여인의 키스’를 다시 하게 돼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2년 전 ‘킹키부츠’를 하면서도 정말 행복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제가 SNS에 사진을 올리면, 지인들이 ‘네 사진만 봐도 기분 좋다’고 할 정도였죠. ‘거미여인의 키스’는 2년 전과 마찬가지로 김선호와 호흡을 맞췄어요. 2년이란 시간 동안 둘 다 조금은 바뀌었어요.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죠. 제가 그렇듯 (김) 선호도 저에 대해 다른 점을 느낄 것 같아요. 대사의 양이 워낙 많아서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다면 거짓말인데, 연습을 시작하니까 책장에서 책 하나를 꺼내 듯 기억이 나더군요. 아무래도 2년 전 치열하게 연습했으니까 그런 거겠죠?

10. ‘거미여인의 키스’의 2년 전과 지금, 가장 다른 점을 꼽는다면요?
김호영 : 대사, 동선, 무대 의상 등은 모두 같은데 농도는 한층 짙어진 것 같아요. 극의 상황이 발렌틴(김선호)은 저를 경계하고 저 역시 발렌틴에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워낙 친하고 잘 맞으니까 그게 독이 됐어요.(웃음) 문삼화 연출가가 “아주 오래 같이 산 부부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극 초반에 제가 발렌틴의 공간에 넘어갔다가 뒷걸음질 치는 걸 넣었어요.

10. ‘거미여인의 키스’의 몰리나는 총 4명의 배우가 연기하는데, 자신만의 몰리나를 만든 것 같습니다.
김호영 : 대사가 워낙 많은 작품이어서 긴장할 수밖에 없어요. 다만, 아…(몇 초간 고민하다) 표현을 잘 해서 이 감정을 공유하면 좋겠는데, 글로 나가는 것이어서 어려울 것 같네요. 저는 이번 ‘거미여인의 키스’를 하면서 정말 편했어요. 연출가의 말을 빌리면 “너는 2년 전에도 몰리나로서 섬세한 표정과 감정 표현을 잘 한 배우 중 한 명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몰리나 같아”라고 했어요. 2년 전엔 주어진 상황에 맞춰 ‘발렌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호감을 느끼고 있다’ ‘사랑에 빠져서 슬프다’ 등을 연기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면, 지금은 사포로 문질러져서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이에요. 처음엔 오랜만에 하는 연극인 데다 소극장이어서 ‘잘 해야지!’란 마음이 앞섰어요. 이번엔 애쓰지 않았죠. 그래서인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덕분에 극중 인물처럼 보인 것 같아요. 사실 뭐든지 자연스럽게 하는 게 좋잖아요, 연기라는 것도 그런 거고요. 저도 ‘거미여인의 키스’ 안에서는 몰리나로서 자연스러움이 생긴 것 같아요.

10. 몰입해서 연기를 하면 자신과 극중 인물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가 있지 않나요?
김호영 : 2년 전 김호영이 2년 후엔 박호영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똑같은 사람이 하는 거여서 배우가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인물이 되기 위해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하기 편한 스타일을 찾아야 보는 이들도 편해요. 몰리나를 연기하면서 저만의 손짓, 발짓을 사용했어요. 극 중 인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표현하는 거죠. 간혹 어떤 분들은 ‘김호영이잖아’라고 할 수도 있어요. 물론 연기라는 게 그 인물처럼 보여야 하는 거지만, 정답은 없어요. 배우들의 접근 방법과 표현 방식은 저마다 다르니까요. 공교롭게도 ‘킹키부츠’의 찰리와 ‘거미여인의 키스’의 몰리나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역할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 즐기면서 했어요. 주위에선 “너무 다른 인물이어서 병행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데, 사람은 한 가지 모습만 갖고 있지 않아요. 가족도, 나도 몰랐던 여러 모습이 있죠. 어떤 역할을 하더라도 저에게 전혀 없는 모습을 끄집어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기는 살면서 겪고 듣고 본 것들이 몸 안 어딘가에 남아있다가, 그걸 끄집어 내서 쓰는 작업이죠.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중인김호영(오른쪽) / 사진제공=악어컴퍼니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중인김호영(오른쪽) / 사진제공=악어컴퍼니
10. 여러 인물로 살면 ‘진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도 들 것 같아요.
김호영 : 나이를 먹으면서 받아들이고 있어요. 연기를 떠나 실생활에서도, 저는 밝고 수다스럽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 않은 면도 있어요. 자신이 예상했던 모습이 아니어서 당황하는 분들을 보면 저도 당황스러워요.(웃음) 제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을 때도 있으니까요. 기복이 커서 저도 ‘뭐가 진짜 내 모습이지?’ 싶을 때가 있죠. 사람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 외면과 내면의 격차가 멀어지는 것 같은 순간을 경험하며 힘들었죠. 문득 생각해보니 이런 감정도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있어서 다행인 것 같더라고요. 연기를 통해 풀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했죠. 해소하지 못해서 가끔 폭발하는 사람들을 보잖아요. 저는 뭔가를 폭발시킬 수 있는 장이 있다는 게 감사했고, 그걸 인정하게 된 거예요. 한 가지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요. 최근 연극 ‘굳빠이, 이상’을 하면서 사람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 그것 역시 저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예전엔 누군가가 “너 은근히 예민한 것 같아” “너 되게 진지한 면이 있구나”라고 말할 때 ‘나를 알아?’ 싶기도 했어요. 시간이 흘러 지금은, 사람들이 보는 ‘나’도 부정하지 않죠. “너 좀 차갑구나”라고 하면 “그땐 그랬겠지!”라고 받아들여요.(웃음)

10. 최근 예능에서는 밝고 유쾌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죠?
김호영 : 방송계 사람들이 저를 평가하면서 “이 역할은 김호영과 안 맞을 것 같다”고 했을 때, 예전엔 “제가 연기하는 걸 봤어요?”라고 따져 묻고 싶었는데 지금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요. 결국은 알게 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서 반응이 좋았던 건, 제가 캐릭터를 설정하고 나간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기 때문이에요. 평소처럼 탁자를 손으로 두드렸고요. 지인들도 “평소의 네 모습이어서 정말 좋았다”고 했죠. 물론 고민할 수도 있어요. 지금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도 ‘앞으로 여러 고민들이 생기겠군’이라고 생각하죠. 미리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연륜이라면 연륜이겠죠?

10. 꿈꿨던 배우의 모습대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김호영 : 무대에 오르고 싶었고 드라마, 영화에 출연하고 싶었어요. 연기를 일찍 시작했고, 사실 쉼 없이 달려왔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생각할 겨를 없이 쭉 달려왔어요. 현실의 냉혹함은 데뷔하자마자 알았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뮤지컬로 데뷔한 이후 꾸준히 일을 해왔으니까 어떻게 보면 뮤지컬 배우로서는 꿈을 이룬 거죠. 현실이 됐으니까요. 환상과 다른 현실을 느꼈고, 또래에 비해 빨리 인지했어요. 당시에도 저는 ‘나는 상품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희소성과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10. ‘꿈’이 ‘밥벌이’가 된 순간의 온도차를 일찍 받아들였군요.
김호영 : 예를 들면 연기를 잘 하고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춰도, 우리 엄마만 인정해준다면 그건 쓸모가 없어요. 재능이 재능으로 인정받고 가치가 생기려면 보여주고 상품화돼야 하는 거죠. 그것처럼 제가 하는 작품이 예술이다, 아니다라는 판단도 관객들이 있어야 가능해요. 누군가는 ‘킹키부츠’를 상업 작품으로 분류하고 ‘굳빠이, 이상’을 예술 작품으로 본다면, 그 역시 두 작품을 모두 봐야 비교를 할 수 있잖아요.

10. 뮤지컬 배우로 17년 차인데, 공연계의 환경이 달라져서 안타까운 마음은 없나요?
김호영 : 최근에 배우 정선아와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우리가 처음 뮤지컬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요. 그렇다고 자꾸 옛것을 그리워하면서 ‘그땐 이랬는데…’라고 하면 안 되죠. 그런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세상은 변했고, 우린 하던 대로 하면 돼요.

10. 그럼에도 공연계에서는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것 같습니다.
김호영 : 스스로 ‘독보적인 배우’라고 말한 것이 남보다 특출나서가 아니라, 모든 배우들은 각자 독보적인 걸 갖고 있어요. 저는 ‘김호영 스타일’의 것을 보여주는 거고요. 보통 남자 배우들이 주연을 맡으면 쭉 주인공인 작품만 하잖아요. 저는 ‘모차르트 오페라 락’에서 주인공 모차르트를 하고, 다음엔 ‘라카지’의 여장남자 자코브 역을 맡았어요. 사람들이 그때 저를 뜯어말렸어요. 주연배우로 급을 올렸는데, 왜 그러냐고 말이죠. 그런데 저는 또래 배우 신성록·홍광호·한지상·조정석·김무열·조승우처럼 한번 주인공을 꿰차고 그 결로 가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스스로 알았어요. 오히려 ‘라카지’의 역할이 탐났습니다. 우려에도 보란 듯이 했는데 그 작품으로 남우조연상을 탔죠. 이후에도 좋은 작품을 계속 했고요. 저는 그때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배우라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호영은 “앞으로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 사진제공=JI&H 미디어
김호영은 “앞으로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 사진제공=JI&H 미디어
10. 보통의 자신감이라면 선택할 수 없는 길을 걸어왔네요.
김호영 : 지금도 제 생각이 맞다고 느껴요. 예능에서도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더니 좋아해 주시잖아요?(웃음) 1월엔 트로트 음반도 내요. 10년 전에는 “네가 트로트 음반을 내면 뮤지컬계에서 안쓸 것이다”고 했어요. 그때도 전 “무슨 소리야? 나를 왜 안 써?”라고 호언장담했죠.(웃음) 장르를 떠나서 저에게 있는 다양한 면을 제대로 보여주면 된다는 자신이 있었어요.

10. 곧 트로트 음반이 나오군요.
김호영 : 녹음은 진작 마쳤고, ‘인생은 짜라짜’란 곡이에요. 라디오에선 벌써 나왔죠.

10. 취미가 있습니까?
김호영 : 근래에 찾으려고 하고 있어요. 그동안은 일하느라 바빴고, 지인들과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열변을 토하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어요. 스포츠 댄스를 한 번 배워보고 싶어요. 정말 잘할 것 같죠?(웃음) 반대로 요가 같은 정적인 운동도 해봤는데, 심신안정에 도움이 되더군요. 그릇 만드는 것도 해보고 싶고, 심지어 집에 타로카드도 사다 놨어요. 은근 공부할 게 많던데요, 하하.

10. 작품과 일상의 분리는 잘 되는 편인가요?
김호영 : 배우는 감성적인 것만으로 연기할 수 없어요. 이성적인 게 너무나 필요하거든요. 특히 무대에서 매번 똑같은 걸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계속 다르고 자신의 몸 상태도 늘 같을 순 없죠. 영리하고 똑똑해야 합니다. 머릿속으로 흐름이라는 걸 이해해야 되는 거지, 무조건 감성적인 걸로만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킹키부츠’를 하면서 배우 강홍석이 저에게 “나는 형이 애드리브의 황제인 줄 알았어”라며 놀라더군요. 저는 대본의 활자를 놓치지 않아요.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곤 애드리브보다 대본에 충실하죠.

10. 자신이 생각하는 연기는 무엇입니까?
김호영 : 연기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배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단편적으로 대사를 외워서 읊조리는 건 우리 엄마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모든 상황을 읽고 앞뒤 흐름을 파악한 상태에서, 이 대사를 왜 하는지 납득시키면서 내뱉는 건 배우의 일이죠. 그냥 외운다고 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생각하는 연기는 진실보다 더 진실된 거짓이에요. 관객들에게 환상을 불러일으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진실된 거짓을 보여줘야 하죠. 저 역시 그렇다고 믿어야 하고요. 제가 그만큼 쌓여 있어야 믿게 할 수 있어요.

10. 2018년에는 더 다양한 곳에서 자주 볼 수 있겠죠?
김호영 : 다양한 영역에서 일을 하고 싶어요. 뮤지컬이란 장르가 연기, 노래, 춤까지 하는 종합예술의 최고 경지라고 생각하는데, 이 장르에서 15년 넘게 굳건히 할 수 있는 배우여서 다행입니다. 예능은 진작 했어야 하는데(웃음) 이제라도 더 활발하게 할 생각이고요. 단발성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익숙함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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