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정은 예뻤다. 게다가 날씬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리여리했다. ‘훈녀’의 정석이랄까. 아기자기하게 다이어리를 꾸밀 것 같았고, 따뜻한 홍차를 즐겨 마실 것 같았다. 그런데 첫 질문부터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아침까지 술을 먹었더니 숙취가 있어요.”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더니, 어른들 말씀에 틀린 것 하나 없더라.
한희정은 꽤나 다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격정적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지기도 했고, 앨범 이야기를 할 때에는 차분하게 가라앉기도 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2013년 발표한 ‘흙’은 “흙흙흙”이라는 의성어로 시작해 “따라 뚜 자꾸 돋아났다”라는 가사로 끝난다. 독특하다 못해 괴상하기까지 하다. 반면 지난 17일 발매된 ‘슬로우 댄스(Slow Dance)’는 발라드 넘버로 채워졌다. 누군가에게는 ‘돌아이’, 누군가에게는 ‘훈녀’. 한희정의 매력은 혼을 쏙 빼놓을 만큼 다이내믹했다.
Q. 앨범이 17일에 나왔죠? 그날 뭘 하셨나요? 한희정 : 뮤직비디오를 같이 찍었던 친구들과 저녁도 먹고 술도 마셨죠. 아침까지 마시는 바람에 숙취가 좀 있네요. 하하.
Q.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한희정 : 다들 음악이 좋다고 얘기해주더라고요. 누구에게나 좋을 만한 앨범을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작업했는데, 다행이죠.
Q. 앨범 주제가 ‘느림’이에요. 한희정 : 제가 좀 느려요. 걸을 때도 느리고요, 밥도 느리게 먹어요. 심지어 영화를 볼 때도 액션 영화는 금방 이해를 못해요. 화면이 빠르게 지나가잖아요, ‘방금 그거 뭐냐’ 하는 거죠. 하하. 그래서 발라드 넘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발라드가 느린 음악이잖아요. 느림에 대해 채워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Q. 앨범 커버도 인상적이에요. 일단은 손이 보이고요, 그 뒤에는 여자의 몸인가요? 한희정 : 등이에요. 손을 뒤로 해서, 날개 뼈가 나오게끔 했어요. 커버에는 손을 찍으려고 했는데 사진을 찍어주는 친구가 이것저것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앨범 속은 신체 부분으로 채우고 싶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했죠.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뭐지?’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예쁘더라고요. 원했던 이미지가 나와서 만족해요.
Q. 그 이미지가 ‘느림’과도 관련이 있나요? 한희정 :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고요. 그냥 딱 떠올랐어요. 느린 음악과 느린 춤, 거기에서 ‘몸’도 자연스럽게 떠오른 거죠. 진정한 춤꾼은 느린 음악에서 더 실력이 드러나는 법이거든요.
Q. 희정씨는 진정한 춤꾼인가요? (웃음) 한희정 : 저는 그런 것 같은데, 주변에서는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인정은 필요하지 않아요. 하하하.
한희정
Q. 곡 이야기를 하나씩 해볼까요? 타이틀곡 ‘슬로우 댄스(Slow Dance)’부터요. 아까 발라드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만들어보니 어떻던가요? 한희정 : 노래를 부르면서 조금 힘들었어요. 제 욕심이 과해져서 가창자로서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정말 발라드 가수들을 찬양해야 해요. 가창에 있어서는 장인들이에요. 부르면서도 스스로 화가 나는 부분이 있어서 연습을 많이 했어요. 여태까지는 모자란 듯, 내던지는 느낌으로 노래를 불렀거든요. 유려한 멜로디를 부드럽게 부르는 건 이번에 처음 해보는 거나 다름없었어요. 쉽지 않은 음악이었고, 덕분에 노래 실력도 는 것 같아요.
타이틀곡 외의 곡들은 기존의 발라드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대중적인 감성이 저한테는 부족하지만, 제가 느린 노래를 만들었을 때 곡이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했거든요. 발라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제가 원하는 색깔이 나온 것 같아요. 만족하고 있습니다.
Q. 노래에 등장하는 ‘너’는 짝사랑의 대상인가요? 한희정 : 그럴 수도 있죠, 곡을 쓸 땐, 특정한 대상을 떠올리지는 않았어요. 사람일 수도 있고 무형일 수도 있어요. 그냥 어떤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을 잊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예요. 정리가 느린 거죠. 그걸 춤에 비유했어요. 어떤 대상을 잊을 때 뇌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작용이 일어나잖아요. 그 이미지가 느린 행위, 느린 춤과 비슷할 것 같았거든요. 뮤직비디오도 흔히 할 법한 행위, 이를 테면 걷거나 팔을 휘젓거나 운동을 하는 행위들을 느리게 촬영했어요. 춤처럼 보이게끔 한 거죠. 동시에 망각을 하려고 할 때 뇌의 작용을 이미지로 구현해보려는 것이기도 하고요.
Q. 안 그래도 뮤직비디오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에요. 톤도 어둡고, 어딘가 기괴한 느낌도 나요. 한희정 : 뇌에서 망각이라는 작용을 할 때 햇볕이 쨍하게 내리쬐거나 행복한 분위기일 것 같지는 않았어요. 톤을 많이 눌러서 꿈속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만들었어요.
Q. 다음 트랙 ‘가능한 일’은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무언가를 제안하는 가사라고 했는데요. 그 제안이라는 게, 혹시 섹슈얼한 내용인가요? 한희정 : 네? 무슨 말씀이세요?! (일동 폭소) 사실 거기에서 출발한 건 맞아요. 그런데 텍스트라는 게 재밌더라고요. 글자를 봤을 때의 시각적인 이미지, 읽었을 때의 소리, 생각했을 때의 메시지, 그 세 가지의 접점이 있어요. ‘가능한 일’의 가사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듯한 느낌이 있거든요. 가능한 일이 있다며 달빛에 나를 비추라고 하잖아요. 그 메시지가 주는 이미지가 있어요. 그리고 이 노래의 멜로디는 기괴한 느낌을 주거든요. 흥얼거리듯, 흘러가는 느낌, 무심한 느낌이 좋았어요. 피아노도 한 가지 멜로디가 리프되고요. 주변에서도 처음에는 “뭐 이런 노래가 다 있어”라고 했지만 “계속 들으니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한희정
Q. ‘그녀와 나’에서는 “꺾인 서로를 기억할 수 있게”라는 가사가 인상적이었어요. 한희정 : 인연이 무서우면서도 반갑기도 한 게, 다 이어져 있잖아요. 어떤 관계는 무척 아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내가 누구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전에 다른 사람을 만났고, 또 그 사람이 굉장히 오래 전에 만난 사람과 알게 되고…이런 관계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느리게 형성된 거잖아요. 그 사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 있더라고요. 그 느낌이 꼭 이 노래 같아요. 슬프잖아요.
Q. 동시에 따뜻하기도 해요. 한희정 : 네. 그렇더라고요.
Q. ‘순전한 사랑노래’에서는 왜 ‘순전한’이라는 표현을 쓰셨나요? 한희정 : ‘순전한’이 노래를 수식하는 말이에요. 그냥 사랑 노래라는 거예요.
Q. 곡의 주제는 결국 ‘사랑이 아니었어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앞뒤에 배치된 이야기들은 이해가 잘 안 되더라고요. 한희정 : 몇 가지 포인트가 있어요. TV속의 왕이 운다던지, 거리의 사람이 행진하는 모습,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것들이죠. 음… 제가 우리나라에서 서른일곱 해 정도를 살면서, 지금처럼 위태로운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저 스스로도 무척 위태로운 사람인데, 외부적으로도 너무 위태로운 거죠. 그런데 그 분, 왕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대요. 그런데 그건왕인 자신을 사랑하는 거지, 우리를 사랑하는 게 아닌 것 같았거든요. 몇몇 이미지를 가사 안에 심어놨어요.
Q. 어머. 그런 뜻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한희정 :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아서 부르는 노래는 아니에요.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드러나지 않는 이미지들이 은근히 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이 노래로 왕을 끌어내리리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요.(웃음)
Q. 마지막곡 ‘오래오래’ 차례네요. 반려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죠? 반려동물을 기르는 분들은 그런 생각을 한다면서요. ‘전쟁이 나면 우리 강아지나 고양이는 어떡하지?’ 한희정 : 제가 몇 가지 종류의 악몽을 꾸는데요, 그 중 하나가 재난 악몽이거든요. 하루는 꿈에서 깨고 나서 어떻게 짐을 꾸려야할까 고민해봤어요. 일단 사료와 고양이 간식을 챙기고, 겨울옷을 하나 넣고, 고양이를 내 몸에 꽁꽁 묶어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죠.
Q. 희정 씨 식량은요? 한희정 : 워낙 집에 먹을 게 없기도 하고요. 배가 고프면 제가 고양이 사료를 먹겠죠, 뭐. 하하하.
Q. 저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내가 반려동물에게 주는 삶이 과연 그 애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일까? 반려동물이 나와 함께 사는 건, 걔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한희정 : 맞아요. 저도 그런 고민을 많이 해요. 최대한 고양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하죠. 하하. 우리 솜이는 워낙 사람 손을 많이 탄 고양이라 애교도 많고 겁도 많아요. 이제는 제가 온전히 책임져야 할 생명체죠. 그게 두려웠어요. 내 앞날도 모르는데 어떻게 얘를 책임진다고 할까, 처음에는 너무 무섭고 감당이 안 됐어요. 솜이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났죠. 그런데 그걸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게 있더라고요. 저 스스로를 믿어야 해요. 어떻게 보면, 우리 고양이 때문에 제가 강해진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한희정
Q. 다시 앨범 얘기로 돌아가 볼게요. 이번 앨범을 ‘숨 고르기 같은 앨범’이라고 했는데, 저는 굉장히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앨범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곡에 담긴 감정도 그렇고요. 한희정 : 제가 만든 노래 중에는 가장 편한 노래입니다. 하하. 격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카페에서 나와도 흘려들을 수 있는 노래 같아요. 사운드 적으로는 특별히 새로운 시도를 한 것도 없고요, 시끄럽지도 않아요. 소리에만 집중하면 귀가 편해지는 것 같지 않나요?
Q. 가사가 대체로 함축적이잖아요.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싶은 생각은 안 드나요? 한희정 : 저는 그냥 내버려 둬요. 작업기를 통해서 ‘이 노래는 여기서 착안했다’는 정도의 설명은 하지만 ‘이 부분에서 전조가 일어나고 여기에선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이런 건 안 해요. 그냥 각자가 느끼는 거죠.
Q. 본인 앨범은 많이 듣는 편인가요? 한희정 : 안 들어요. 다음 앨범 작업해야죠.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에요. 앨범을 내고 나서 아무것도 못할 때도 있고요. 이번 앨범은 편하게 작업한 거라, 빨리 다음 앨범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 중이에요.
Q. 가볍게 만들었지만 제작에는 시간이 꽤 걸렸어요. 한희정 : 앨범이 나온 건 2년만이에요. 작업을 했다가 안 했다가 했거든요. 중간에 많이 놀았죠.(웃음) 원래는 작년에 내려고 했었는데, 올해로 미뤄졌어요.
Q. 했다가 안 했다가를 반복하면, 전에 만들어놨던 노래가 갑자기 마음에 안 들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한희정 : 그런 적은 없고요. ‘이걸 어떻게 했지?’ 싶은 때는 있어요.
Q. ‘어떻게 했지? 너무 대단한데?’ 이런 건가요? (웃음) 한희정 : 아뇨. 그보다는 생각이 안 나는 거죠. ‘어? 내가 어떻게 했더라? 나 이거 어떻게 할 줄 알지?’ 싶은 거예요. 곡을 쓸 때도 그렇고, 가사를 쓸 때도 그래요. 낯설 때가 있어요. 옛날에는 그런 마음이 안 들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스스로에게 원하는 게 많아지나 봐요. 뭔가 큰 걸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막막해요.
Q. 스스로 바라는 게 많아지면 작업이 더 힘들어지겠어요. 한희정 : 그렇죠. 만족도 안 되고요. 이건 장점인 것 같은데, 저는 제 한계를 알게 됐을 때, 그걸 웃으면서 넘길 줄 안다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노력은 하죠. 녹음을 하다가 자책감에 펑펑 울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렇게 꾸역꾸역 하고 나면 제 스스로가 기특해요. 그리고 ‘아 나는 이 정도구나’라는 걸 보게 되고, 웃으며 넘어가게 돼요. 최근에는 스스로에게 바라는 게 많아지니까 다시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지나가면 적응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한희정
Q. 공연의 관객이나, 앨범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한희정 : 어제, 금성이라는 곳에 갔어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보컬과 그 분의 친구가 만든 술집인데요, 뮤지션들의 집결지 같은 곳이죠. 거기에서 친구들을 만나 새 앨범도 주고, 술도 마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누군가에게 한희정이라고 저를 소개했더니, 딩가딩가 어쿠스틱 기타를 치며 ‘랄라라’하는 싱어로 생각하고 계시더라고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들으시면 돼요. 이번에는 그런 음악이니까요. 편하게, 꾸밈없이. 숨 고르기 같은 앨범이잖아요.
Q. 말씀하신 것처럼, 흔히 여성 싱어송라이터라고 하면 어쿠스틱 기타를 치며 예쁜 목소리로 노래하는 이미지를 떠올리잖아요? 그런 틀 때문에 답답하지 않으셨나요? 한희정 : 처음에는 그랬어요.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음악, 혹은 지금 하고 있는 음악을 영원히 할 것도 아닌데 그렇게 규정되어 버리는 게 불편했죠. 나는 더 재밌는 것들을 해보고 싶은데 말이에요. 그런데 그건 앞에 나서는 사람의 숙명인 것 같아요. 만약 제가 노래하는 사람이 아니라 곡만 쓰는 사람이었으면 어떤 식으로 규정되는 일은 없었겠죠. 스스로도 딜레마에요. 나는 사람들의 규정을 굉장히 불편해하는 사람인데도, 앞에 나서서 노래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제는 뭘 하던, 사람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그냥 제 음악을 하면 돼요, 제가 생각해서 만들어 내놓은 결과물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어떤 사람에게는 제가 ‘돌아이’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쿠스틱 성향의 싱어로 보이기도 하죠.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