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옥윤(전지현)의 총구가 친일파 강인국(이경영)을 향한다. 기다려온 순간이다. 방아쇠만 당기면 미션 완료.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녀의 눈빛은 흔들린다. 안옥윤은 분명 머뭇거리고 있다. 가족이라는 핏줄로 엮인 생부 강인국과 자신의 슬픈 운명 앞에서. 그녀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아비를 죽이지 못한다. 임시정부요원 명우(허지원)의 손에도 총이 들려 있다. 명우는 염석진(이정재)이 일제의 밀정으로 확인되면 암살하라는 김구의 명령을 받고 염석진을 미행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다. 믿고 따랐던 대장 염석진의 정체가 밝혀진다. 변절자! 그러나 명우는 염석진의 ‘진짜 얼굴’을 확인하고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해, 도리어 당하고 만다. 하와이피스톨(하정우)은 목표물을 향해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냉철한 청부살인업자다. 거액의 의뢰를 받은 하와이피스톨은 안옥윤을 죽이기 위해 조국 경성에 온다. 하지만 그는 총을 쏘는 대신, 묻는다. “당신의 정체가 뭐요?”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은 누군가를 암살해야하는 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안옥윤은, 명우는, 그리고 하와이피스톨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암살 미션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들이 조준해야 하는 타깃은 생부요, 의지했던 선배요, 동료였으니까.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독립군들을 진짜 힘들게 했던 상대는 어쩌면 일본군이 아니다. 그것은 매국노였다. 친일파 거두였다. 밀정들이었다. 그러니까 ‘내부의 적’이었다.
외부의 적은 필사적으로 싸우면 된다. 알량한 감상이 들어설 자리가 좁다. 하지만 외부의 적으로부터 파생된 내부의 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시대 레지스탕스들의 비극은 거기에서 비롯됐다. 독립군들이 진짜 경계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일본군이 휘두르는 간사한 ‘세 치 혀’ 앞에 자신도 흔들릴 수 있다는 ‘어떤 유혹’이었는지 모른다. 유혹 앞에서 염석진은 굴복했고, 안옥윤은 맹렬히 싸웠고, 무정부주의자 하와이피스톨은 잊고 지내던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비정한 시대의 슬픈 사랑
레지스탕스들의 슬픈 운명은 전세계 곳곳에 산재돼 있다. 그 유명한 이안 감독의 ‘색, 계’(2007)를 보자. 2차대전의 항일운동 시기를 배경으로 한 ‘색, 계’에서 탕웨이가 연기한 왕치아즈의 암살 대상 역시 내부의 적이었다. 친일파의 핵심인물인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 왕치아즈는 신분을 위장하고 미인계를 써서 ‘이’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지만, 자신의 마음 역시 ‘이’에게 내어주고 만다. 지독한 사랑. 예상하지 못한 돌발변수다.
결국 왕치아즈는 ‘이’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친다. 아니, 스스로 포기한다. 그녀는 이미 늦어버린 운명에 저항하지 못해 파멸의 기운을 예감하면서도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절벽 앞에 밧줄로 묶여 죽음을 기다리는 왕차이즈와 그녀의 흔적이 남은 텅 빈 침대에서 한숨 짓는 ‘이’의 모습이 아련하다. 비정한 시대의 슬픈 사랑이야기다.
히틀러를 암살하라!
흔히 레지스탕스들의 역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록되어왔다. 하지만 레지스탕스는 나치 독일 내에도 존재했다. 브라이언 싱어는 ‘작전명 발키리’(2008)에서 이를 잘 그려냈다. ‘작전명 발키리’는 2차대전 당시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실존인물, 독일군 육군대령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조명한다.
슈타펜버그 대령(톰 크루즈)을 비롯, 발키리 작전에 가담한 독인 군인들은 독재자 히틀러를 암살하는 것만이 비극의 역사를 끝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발키리 작전’(히틀러가 자신이 암살당하거나 축출당할 때 나치 정부를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비상 대책)을 역이용, 쿠데타를 일으켜 전쟁의 광기를 멈추고자 한다. 작전을 앞두고 슈타벤버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동료 군인들에게 묻는다. “개인의 힘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안옥윤이라면 아마 “알려줘야지…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다는 걸”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행동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슈타벤버그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히틀러 암살 계획은 역사가 알려주듯 실패로 끝났다. 통신대를 장악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상반된 두개의 명령서(히틀러가 암살됐다와, 아니다) 중 히틀러 편을 들어버린 통신 장교의 선택으로 인해 독일의 만행은 계속된다. 실패는 했어도 의미는 남는다. 나치만행에 대해 낮은 자세로 사죄하는 오늘날의 독일국민들에게 발키리 작전은, 그들이 부여잡고 싶은 한 가닥 양심의 흔적일 테다.
암살은, 실패 중
그런 의미에서 다시 ‘암살’을 돌아보게 된다. 영화 ‘암살’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양심’이다. 일제강점기는 결과적으로 기회주의자들에게 기회의 시대가 됐다. 민족의 불운을 발판삼아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쥔 괴물들. 오늘날 이들 괴물들을 향한 (또 다른 의미의)‘암살’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왜 암살하지 못하는가. 타깃 중 상당수가 지도층의 자리에서 본색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권력을 비호하는 또 다른 권력들이 있기 때문이 다. 암살은 그렇게, 지금도 실패중이다.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영화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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